종회소식
작성자 종친회
작성일 2013-04-21 (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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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112.xxx.237
두산백과사전 두피디아 <한효순(韓孝純) 항목> 오기수정

  네이버 지식백과 내 두산백과 컨텐츠는 두피디아 내용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이번 두산백과사전 두피디아 <한효순(韓孝純) 항목>에서 오기수정에 따라, 네이버백과사전에서는4월19일부터 변경된 자료로 반영 되고 있습니다.
또한 민중서관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도 오기수정 요구 중에 있으며 오기수정 되는대로 종회소식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수정 내용]
한효순[韓孝純,1543~1621]조선 중기의 문신
[개요부 목록]
본관 : 청주
자 : 면숙(勉叔)/면부(勉夫)
호 : 월탄(月灘)
국적 : 조선
활동분야 : 정치, 군사
주요저서 :《신기비결(神器秘訣)》,《진설(陣說)》
주요업적 : 임진왜란 참전, 조선 수군 전력 강화.
시대 : 조선시대(선조, 광해군)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면숙(勉叔) 혹은 면부(勉夫)이며 호(號)는 월탄(月灘)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을 지낸 한여필(韓汝弼)의 둘째 아들이다. 모친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유엄(柳渰)의 딸이다.
 
한효순(韓孝純)은 조선 전기의 명문거족 출신으로 1576년(선조 9)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 19위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으로 관직에 오른 뒤에 경상도ㆍ전라도ㆍ평안도ㆍ함경도 등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병조판서ㆍ이조판서ㆍ호조판서ㆍ우의정ㆍ좌의정 등 조정의 요직들을 두루 거쳤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1584년(선조 17)에는 우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천거로 이조전랑(吏曹銓郞)이 되었으며, 1588년에는 어사(御使)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서인(西人)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외직(外職)인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갔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경상 좌감사(慶尙左監司) 김성일(金誠一)이 죽은 뒤에는 그의 역할도 대신하였으며, 1594년에는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호조참판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으며, 1596년에는 체찰부사(體察副使)로 임명되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영남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 해에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에 따라 한산도(閑山島)에 가서 무과(武科)를 실시해 병사를 모집하기도 했다. 1597년에는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가 되었고, 1598년과 1599년에는 경상 감사(慶尙監司)와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를 지냈다. 1601년(선조 34)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으로 임명되었으며,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임명되어 여진족의 동향을 파악하고 방어책을 마련해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함경 감사로 있던 1603년에 화약 병기의 사용법과 병법 등을 다룬 《신기비결(神器秘訣)》과 《진설(陣說)》 등의 저술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에는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다. 1605년에는 평안감사(平安監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되었다. 1606년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607년에는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임명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다가 1610년 상호군(上護軍)으로 임명되었다. 1615년(광해군 7)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617년부터 조정에서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자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효순은 병을 내세워 출근을 하지 않는 것으로 폐비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내 여러 차례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1618년(광해군 10) 음력 1월 4일 조정의 관리들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하여 폐모론을 주장함으로써 인목대비를 폐하고 서궁(西宮)에 감금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효순은 1618년(광해군 10) 좌의정으로 임명된 뒤에도 계속해서 사직을 청하며 출근하지 않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1621년에 사망하였다. 1623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仁祖)를 왕으로 세운 뒤에 한효순은 1618년 정청(庭請)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관작이 삭탈되었다. 1864년(고종 1)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873년 호조참판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다시 삭탈되었다. 그러다 1908년(순종 1)에 관작이 다시 회복되었다.

[오류수정 요청자료]  
2013.04.05  
제 목 : 한효순(韓孝純)항목 관련 수정요청 건
수 신 : 두산백과 컨텐츠 제공업체인 두피디아
발 신 : 한범구
내 용 :  두산백과사전 수록된 <한효순 항목 관련 기사> 오기에 대한 이의제기 건

1. [16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의 이의제기
자료 :
◇ 백과사전 기록에서는“인조반정 후 관직이 추탈되었다.”로 언급으로 끝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신원 회복된 과정을 보면 영, 정조 시 영조 45년 2월 29일, 정조 7년 1월 7일에 신원회복을 위하여 홍봉한이 말하기를;“계축년에 폐모를 정청하였을 때 한효순이 수상으로서 비록 論啓에 참여하였으나, 연로하여 惶怯한 소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란 거론함이 있었으며, 신원회복은 되지못하고 다만 한효순의 후손에 대해 특별히 구애 없이 등용하라고 왕이 명하였다.

고종(대원군 섭정 시) 고종 1년 7월 11일에 관작을 회복시켜라 명을 받아 신원된 10년 후 고종 10년 11월 3일에 최익현 상소에 따라 다시 추탈 되었다가, 순종 1년 1월 30일 (양력), 순종 1년 4월 30일 (양력)에 시호와 관작이 모두 신원회복 되었다.
이와 같이〈신원 회복-추탈-다시 신원 회복〉등의 사실이 있었음을 상세히 밝힐 필요가 있음:
즉, 당초 인조반정 후 관직이 추탈 되었으나, 그 후 신원회복 논의가 영・ 정조 때 있었고, 고종(대원군 섭정)때 신원이 회복되었음. 그러나 10년 후 최익현의 상소로 다시 삭탈관직 되었다가 순종 때 최종적으로 신원이 복권되었음.

2. [14줄~15줄] 이듬해 폐모론을 발의하여 인목대비의 삭호(削號)를 주청한 뒤, 이에 반대하는 이항복(李 恒福)·기자헌(奇自獻)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의 이의제기
자료 :
◇ 기자헌과 이항복이 〈광해 9년 12월 11일 , 광해 9년 12월 17일 유배 될 당시에 한효순은 그 당시 집권 주도세력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한효순 본인도 무려 10여 차례 상소문〈광해 9년 1월4일 , 광해 9년 11월 26일 , 광해 9년 12월 3일 (10여 차례 상소문중 일부)〉에 기자헌. 이항복이 귀향가기 직전까지 함께 탄핵받고 있었던 상황이므로〈기자헌 ・ 이항복에 대한 한효순의 탄핵〉이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삭제될 필요가 있음.

3. [13줄] 1610년(광해군 2) 재차 이조판서가 되어 이이첨(李爾瞻)과 일당이 되어 반대파를 몰아내고, ~ [15줄]1618년 결국 폐모를 실현시켜서 궁에 유폐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의 이의제기
자료 :
⑴ 속잡록 1 정사년 만력 45년, 광해군 10년(1617년), 이형의 상소의 기록을보면
~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왕명에 의하여 의논을 거두어 들이라는 명령을 따라 언로의 중대함을 대략 아뢰었으나, 그러나 그 말 씀씀이가 또한 매우 애처로운데도 삼사가 헐뜯고 물리쳐서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므로 병을 핑계 삼아 사의(2개월 동안 12번으로 왕조실록에 기록)로~
이이첨을 처벌하라는 윤선도상소에 삼사에서는 윤선도를 처벌 하려하자 언로의 중대함을 들어 처벌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⑵ 광해 10년 1월 16일 기준격 ,허균 조사 할 것을 맨 먼저 진언하다.(허균과 이이첨공조)
⑶ 왕조실록 광해 10년 6월 4일 서궁을 비호한 자 한효순뿐만 아니다.
[“우선 처치를 기다리고 번잡스럽게 소란을 떨지 말라. 한효순의 일도 그렇다. 고관 대작으로서 서궁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더구나 이미 체차시켰으니 그만 논하도록 하라.”]
⑷ 광해 12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월 4일(갑자) 5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 등이 백관을 인솔하고 정청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다에서
[이이첨이 지은 것이다. 이첨이 한효순을 협박하여~
한효순이 우상의 신분으로서 이이첨에게 내몰려 부림을 받은 나머지 앞장서서 백관을 인솔하고 나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정청(庭請)하는 일을 따름으로써~]
⑸ 장헌공 신도비 명(177줄) 박경신(朴慶新)이 말하기를 조카 유천(柳川)이 칠신(七臣)의 참 혹한 화를 당할것이 임박하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정된 한효순(韓孝純)항목 네이트백과사전과 네이버백과사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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