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회소식
작성자 종친회
작성일 2012-06-28 (목)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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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59.xxx.3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한효순 항목 내용수정 최종 수록 건
 ◑ 제출한 자료 요점정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실에 이의신청을 제출하여 수정된 내용이 나오기까지의 제출된 서류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담당연구원의 말과 같이 광해군 집권 시에 관한 일들이 아직까지도 문중간에 이해관계 때문에 분쟁소지가 많으며 이의신청을 대비하여 제출된 자료는 지속적으로 보관된다고 합니다.
그 예로 김문기(金文起)를 사육신에 포함시키자 각파문중에서 들고일어나 장관까지 사임할 정도로 큰 사건이 벌어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충분한 자료 없이는 함부로 수정을 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헌공(諱 孝純)의 관한 내용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신원된 사실을 비롯하여 잘못 수록된 자료들이 사실적으로 고쳐지고 국방부에서 편찬한 신기비결(번역)과 한국 군사인물연구(조선편1)의 서문과 같이 지속적으로 좋은 평가가 나오고 수록될 경우, 그동안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던 선조를 둔 자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평가절하 시키려고 이의제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되지 않고서는 임진왜란 시 이순신에게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도와주어 왜적을 물리쳤던 사실, 실제로 북방여진족을 대비할 수 있는 저서의 신기비결과 진설, 경상관찰사 한효순의 보고문, 적장에게 보낸 답적장서 등등이 이러한 훌륭한 업적들을 발견하였더라도 빛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좋은 평가가 나오지 않았으며 잘못 수록된 부분을 수정하기 위하여  폐모에 관련된 내용을 조선왕조실록과 여타문집에서 중점적으로 발췌하여 제출하였습니다.

  우선 강병수 팀장과 최재형 연구원이 편집실근무시에는 폐모에 관련하여 뒷부분이 연결이 잘 안되어서 정청까지만 자료를 정리하여 제출하였고, 수정되어 나온 결과로는 네이트 백과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편찬실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첨부되어 수록되었습니다.

  그런 후 속잡록에 기록된 유학(幼學) 이형(李泂)의 상소문의 기록사항을 보고 윤선도가 죽을 각오를 하고 이이첨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문을 올려 이를 왕이 탄핵하려한 내용 중에  “우의정 한효순이 의논을 거두어들이라는 명령을 따라 언로의 중대함을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 씀씀이가 또한 매우 애처로운데도 삼사가 헐뜯고 물리쳐서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므로, 수상(首相)은 병을 핑계 삼아 감히 의논을 제출하지 않고 원임(原任)들은 문을 닫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이란 수록된 부분이 왜 두 달 동안 12번씩이나 집중적으로 사의를 하였는지의 연결고리가 풀렸습니다.
  또한 추후 합의가 깨져서 정청이 일어났지만, 박승종, 유희빈, 이이첨 세 사람이 시를 써서 싸우지 않기로 합의하는 계기가 된 것을 알 수가 있었으며, 정청 후에도 폐출을 막기 위하여 허균까지 조사 할 것을 진언하였음 알 수 있어서 연결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정청 후 이이첨과 공조한 허균을 조사 할 것을 진언하고, 폐출을 추진하지 않고 사직서만 제출하자 합사 연계하여, 장헌공(諱 孝純)을 처벌 할 것을 간언하였고, 왕은 “고관대작으로서 서궁(인목대비)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말한 부분까지 연결되어 폐모에 관련하여 장헌공의 입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 “韓孝純資料集”에 수록하여 놓았습니다.  

  이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부가 김창겸 팀장과 선봉조 연구원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내용들을 추가하여 기 제출된 서류를 보완하여 제출하였습니다.
  편집부에서는 확실히 장헌공의 입장을 파악함으로서 주관적인 평가 없이 당시의 왕조실록 사료를 소개하는 선에서 재수정하여 수록 되었으며 두 번 다시는 기록이 사실과 다르게 변경되는 것은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폐모관련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응서(朴應犀) 역모사건(최초로 폐모 거론) → 이이첨, 허균공조(흉서 사건) → 윤선도의 상소(이이첨의 비리공개 처벌 요구) → 윤선도 처벌(장헌공(諱 孝純)은 언로의 중대함을 알렸으나 관철되지 않자 2개월동안 무려12번 사의로 처벌반대 의사를 표명하다.) → 이이첨(李爾瞻) . 박승종(朴承宗) · 유희분(柳希奮)3인이 화합하기로 시를 써서 합의(그 후 결렬) → 이이첨 등이 장헌공(諱 孝純)을 협박 정청(박경신이 말하기를 조카 유천(柳川 韓俊謙)이 7신(臣)으로서 참화가 임박하다.) → 기준격의상소 허균의 흉서 사건(장헌공(諱 孝純)은 맨 처음으로 두 사람 모두 조사할 것을 진언하다.) → 광해군은 기준격과 허균 조사를 반대(장헌공은 관직을 사의하다.) → 이이첨 등이 장헌공에게 앞장서서 폐출권유(사의로 반대의사 표명하자 합사 연계하여 처벌을 상소하다.) → 광해군은 처벌 반대의사 표명 "서궁(인목대비)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2012년 6월 30일

                                                            宗 孫   範 九 씀

http://encykorea.aks.ac.kr/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색)

한효순

[간략정보]
• 한자 韓孝純
•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 유형 인물
• 시대 조선
• 성격 문신
• 성별 남
• 생년 1543년(중종 38)
• 몰년 1621년(광해군 13)
• 본관 청주(淸州)
• 대표관직(경력) 우찬성|판돈녕부사|이조판서|좌의정
• 집필자 김용국
  
[콘텐츠 이력]

 내용수정
  1. 개설 부분의 표현법 수정(가족 열거 시 성씨 포함).
  2. 폐모론과 관련한 한효순의 태도를 광해군일기(중초본)에 의거하여 보충 서술함.

 저서추가
  신기비결, 진설 등의 저술서 추가

[정의]
1543(중종 38)∼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한사무(韓士武)이고 조부는 한승원(韓承元)이다. 아버지는 한여필(韓汝弼)이며,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내용]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 검열·수찬을 거쳐 영해부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월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관찰사에 승진, 순찰사를 겸임해 동해안 지역을 방비하며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1594년 병조참판, 1596년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그 해 한산도무과(閑山島武科)에 시관(試官)으로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군강화에 힘썼다. 그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남해 지역의 순찰사로 해상군비강화에 계속 노력하였다.
일찍이 1599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의 전선감조군관(戰船監造軍官)으로 있으면서 거북선 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羅大用)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북선 모양의 소형 무장선인 창선(鎗船) 25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1604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다음해 평안도관찰사·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1606년 우찬성·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이조판서를 역임한 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1617년 이이첨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일자 소극적인 자세로 관망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다. 폐모론자들은 한효순의 이러한 태도를 문제 삼아 기자헌 이항복 등과 함께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한효순의 태도는 『광해군일기』(중초본)에 자세히 전한다.
합사(合辭)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전 좌의정 한효순은 본래 견해를 달리했던 사람인데 인재가 부족했던 탓에 정승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초 대론이 일어났을 때 관망한 채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공의가 발의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긴 했으나 본래 성의가 없어 겨우 책임만 때웠을 따름입니다. (후략)” 이에 대해 광해군은, “번잡스럽게 소란 떨지 말라. 한효순의 일도 그렇다. 고관 대작으로서 서궁(인목대비)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후략)”
1621년(광해군 13)에 판중추부사로 졸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폐모론에 가담한 죄로 관직이 추탈되었으나 1908년에 신원되었다.
저서로는 『신기비결(神器秘訣)』, 『진설(陣設)』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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