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神道碑)

 

신도비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63-1번지

(역문)

 장헌공 휘 효순 호 월탄 신도비명(莊獻公 諱孝純 號月灘 神道碑銘)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사도체찰사주사대장 겸감철양향총관사 서흥부원군시장헌공신도비명(效忠    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    傅 四道體察使舟師大將 兼監鐵糧餉摠管使 西興府院君諡莊獻公神道碑銘)

 

공(公)의 휘(諱)는 효순(孝純)이요 자(子)는 면숙(勉叔)이요 호(號)는 월탄(月灘)이다. 한씨(韓氏)는 계통이 청주(淸州)에서 나왔는데 시조(始祖) 휘(諱) 난(蘭)은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도와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위양(威襄)이며 공을 벽상(壁上)에 책록(策錄) 되었다. 다시 휘(諱) 광윤(光胤)에 이르러 벼슬이 예빈경(禮賓卿)이요 휘(諱) 강(康)은 중찬(中贊)으로서 시호는 문혜(文惠)요 휘 사기(謝奇)는 보문관 제학(普文館 提學) 이요 휘 악(渥)은 도첨의 우정승(右政丞)으로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휘 공의(公儀)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평간(平簡)이요 휘 수(修)는 중대광 우문관 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으로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요 호는 유항(柳巷)이니 모두 여조(麗祖)으의 명신(名臣)이다. 아조(我祖) 에서는 휘 상경(尙敬)은 영의정(領議政)으로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계희(繼禧)를 낳으니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니 이분이 실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사무(士武)이니 판관(判官)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승원(承元)이니 군수(郡守)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 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여필(汝弼)이니 경력(經歷)으로써 추영(追榮)된 것이다.

의정공(議政公)이 문화유씨(文化柳氏) 사도시정(司導寺正) 엄(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묘(癸卯) 七월 갑인(甲寅)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기우(氣宇)가 중위(重偉)하고 어려서 노는 것이 범상치 않으니, 의정공이 일찍이 이를 이상히 여겨 그 공보(公輔)의 그릇임을 알았다. 자라면서 과연 학문을 좋아하여 성문(聲聞)이 한 세상을 움직였다. 무진(무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신미(辛未)에 선군(先君)의 상사를 당하여 묘 옆에서 여묘(廬墓)하고 예(禮)를 다했다. 병자(丙子)에 명경과(明經科)에 뽑혀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예문관(藝文館)에 천거되어 박사(博士)를 거쳐 전적(典籍)으로 승진되고,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및 수찬(修撰)으로 옮겨졌다.

계미(癸未)에 교리(郊理). 직강(直講)에 제수되었다가 부모의 상사로 해서 부임하지 않고, 갑신(甲申)에 대부인(大夫人)상사를 당하여 또 수묘(守墓)하다가 병술(丙戌)에 예조좌랑(禮曺佐郞)에 임명되어 명령을 받고 유신(儒臣)들과 함께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음석(音釋)을 교정(校正)했다. 얼마 안 되어 검상(檢詳) 및 사인(舍人)에 승진되었다.

무자(戊子)에 명령을 받들고 선위사(宣慰使)로서 왜국에 갔다 와서 이내 부응교(副應敎)에 승진되었고, 관북어사(關北御使)로 나갔다가 복명(復命)한 뒤에 또 사인(舍人)에 제수되고 장악정(掌樂政)에 옮겨졌다. 기축(己丑)에 집의(執義) 및 사성(司成)에 임명되고, 겨울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자 상사와 부사(副使)인 정탁(鄭琢). 권극지(權克智)와 함께 중도에 파직되었다. 이 때 공은 시국이 위태로운 것으로 물러가자 임금은 말하기를 「한효순(韓孝純)이 만리 길에 사신을 갔다 돌아왔다.」하고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추천했으나 대계(臺啓)가 이발(李潑)의 당(黨)이라고 배척하여 마침내 영해(寧海)에 외직(外職)으로 나갔다.

임진(壬辰)의 왜난(倭亂)에 공은 의거(義擧)의 계획을 세워 많은 무리를 소모(召募)하고 말하기를, 「군사는 통솔이 없으면 어지럽다.」하여 좌우로 나누어 영솔하게 했다. 이보다 먼저 공은 성지(城池)를 준비하고, 양곡을 모으고 마초(馬草)를 쌓아 두어서 군세(軍勢)가 이 힘으로 떨쳐지자 드디어 이 말을 행궁(行宮)에 알렸으나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가서 멀었기 때문에 영부(嶺府)에서 비로소 소식을 듣고 임금은 크게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나라에 사람이 있도다.」하고 명하여 통정(通政)을 더하고 초토사(招討使)를 시키면서 말하기를 대동(大同) 밖에 적병이 가득 차 있으니 수령(守令)의 군병(軍兵)을 거느리고 병사(兵史) 박진(朴晋)과 함께 협력하여 적을 치도록 하라.」했다. 계속해서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이제 너를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겸 순찰사(巡察使)에 임명하는 것이니 좌도관찰사(左道觀察使) 김성일(金誠一)과 협의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하라.」했다. 이 때 바야흐로 적의 칼날이 향하는 곳에 파죽(破竹)의 형세가 있었는데, 공은 열읍(列邑)과 의논하여 각각 맡은 구역을 지키는 민심(民心)을 결속(結束)시키고 군실(軍實)을 다스리는 것으로 책임을 삼아 날래고 용맹한 장수를 모아 요충(要衝)을 막고, 적의 머리를 베인 것이 있으면 비록 조그만 공이라도 위에 아뢰어서 반드시 상을 받게 해주니, 이 까닭에 사람들이 쓰이기를 좋아했다. 이 때 막부(幕府)에서 밤에 적의 영채를 습격할 것을 청하여 장차 떠나는데 공이 이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군사가 적에 임하는 데는 오직 장수의 책임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니 군사를 거느리고 범하는 것이 없도록 할 것이다.」했다. 이 때 도망한 군사를 베이려 하자, 공은 말하기를, 「이는 가르치지 못한 양민(良民)이니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하고 사형(死刑)을 감하여 매를 때렸다.

계사(癸巳)에 가선(嘉善)에 승진되고 명하여 도(道)의 관찰(觀察)하게 했다. 이 때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은 북쪽으로 돌아갔고, 유정(劉挺)이 오유충(吳愉忠)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를 나누어 경주(慶州) 사이에 주둔해 있고 왜군은 바다 위로 물러갔는데, 공은 민심이 동요되어 도적을 불러일으킬 가 근심하여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고 흩어지지 않도록 순무(巡務)했다.

갑오(甲午)에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군공청 비변사 당상(軍功廳 備邊司堂上)이 되었다. 을미(乙未)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겨지고,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서 경성순검사(鏡城巡檢使)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했고, 아울러 화기(火器)를 주조(鑄造)하고 병서(兵書)를 인쇄하는 일을 주관(主管)했다. 또 건의(建議)하여 도첩(都牒)과 포루(砲樓)를 수축(修築)하고 한강(漢江)과 용산(龍山)에 별영(別營)을 설치했다.

병신(丙申)에 도체찰(都軆察) 이원익(李元翼)이 공을 불러서 부체찰(副軆察)을 시키자 임금이 인견(引見)하시고 궁시(弓矢) 및 말을 하사했다. 이에 공은 이공(李公)과 함께 호남(湖南) 여러 고을의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민물(民物)의 동정을 순찰(巡察)했으니 이는 대개 응변(應變)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 공의 모든 계획이 자못 요긴한 것에 해당되자 이공(李公)은 모든 기계와 군용(軍用)을 모두 공으로 하여금 맡아 처리하게 했다. 이윽고 자헌(資憲)에 승진되고, 명하여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을 맡아 거느리게 했다. 이때 이공 순신(李公純臣)이 바야흐로 적과 대치(對峙)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명하여 이일에 대하여 조발(調發)하게 하여, 육지로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 바다에는 배를 내어 자못 적을 억제했다. 조금 있다가 이공(李公)이 백의(白衣)로 종군(從軍)한다는 말을 듣고 위연(喟然)히 탄식하기를, 「심하도다. 남을 헐뜯는 것이 이와 같이 시끄러우니, 우리나라는 장차 위태롭고 수군(水軍)도 남은 날이 없도다.」했다. 정유(丁酉) 가을에 왜병이 다시 바다를 건너오자 임금이 명하여 수군(水軍)을 재촉해서 떠나게 했다.

七월에 우리 군사가 패하자 임금이 교서를 내려 애통해 가기를, 「한산도(閑山島)의 군사가 무너져서 전선(戰船)이 한 척도 없으니 경(卿)은 급히 三十척을 만들게 하라.」하니 공은 날마다 계획을 세워 도촉하여 모두 기일에 발송(發送)시켰다. 이 때 양경리 호(楊經理鎬)가 공과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다 하여 이미 임금의 부름을 받고 떠났는데, 양호(楊鎬)가 또 임금께 아뢰기를,「청컨대 한효순(韓孝純)으로 하여금 돌아와서 양곡을 준비하게 해주시옵소서.」하여 공은 또 명령을 받고 태안(泰安) 소비포(所非浦)로 돌아와 유격(遊擊)을 기다린 지 三일 만에 수군(水軍) 三백척이 비로소 도착했다. 이에 공은 감사(監事) 김방홀(金方笏)과 함께 양곡을 독촉하기 위하여 배를 대포(大浦)에 이르렀는데 밤에 바람에 표류(漂流)되어 이틀이 지난 후에 언덕에 닿았다.  이 때 명장(明將)의 죽은 자가 二十명이나 되자 계금(季金)이 걱정하기를, 「한부찰(韓副察)도 또한 필시 죽고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하더니, 공이 돌아오자 술을 따라 위로하면서 양곡의 말은 묻지 않았다.

무술(戊戌)에 부체찰(副體察)이 바뀌이자 또 검찰(檢察)을 시켜 계속하여 양호(兩湖)의 염철(鹽鐵)과 양곡의 총관(摠管)을 명했다. 이때 명장(明將)이 바다 위에 주둔하고 있는데 양곡이 거의 없어져서 경계(庚癸)가 사방에서 시끄러워 떠드는 소리가 백 가지로 나오자, 공은 시골의 부호(富豪)와 장사꾼들을 권유하고 또 해군(海軍)에 알려서 어염(魚鹽) 숫자를 늘리도록 했다.

겨울에 적이 물러가자 임금은 명하여 전라도순찰관찰(全羅道巡察觀察)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를 삼고 말하기를, 「나는 생각하기에 전라도(全羅道)가 오래도록 병화(兵火)에 시달리더니 이제 적이 물러갔으니 모두 다 유신(維新) 할 것을 생각하여 모든 일을 초창(草創)해야 할 것인데 누가 방백(方伯)에 적당하겠는가. 경(卿)이 오직 그 사람이니 가서 힘쓸지어다. 옛날에 중흥(中興)한 것도 생각하니 어려운 일이었으니 적이 물러갔다고 해서 다행으로 여기지 말라. 그 다스림에 있어서는 편안하게 다스릴 것, 민심(民心)을 결속(結束)시킬 것, 백성의 재물을 나게 할 것, 병법(兵法)을 결속(結束)시킬 것, 백성의 재물을 나게 할 것, 병법(兵法)을 조련할 것, 군률(軍律)을 엄하게 할 것,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 염검(廉儉)을 숭상할 것, 출척(黜陟)을 분명히 할 것들이니 경(卿)은 힘쓸지어다. 벼슬이 통정(通政) 이상 및 대벽(大辟)은 모두 나의 결재를 얻을 것이지만, 군률(軍律)에 있어 명령을 하거니 하지 않는 것과 또 방어사(防禦使) 이하의 일은 경(卿)이 재량해서 처리하라.」하니, 공은 오직 조칙(詔勅)의 조목에 의해서 그 성적이 나타났다. 계속해서 정헌(政憲)에 승진되었다.

경자(庚子)에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또 불러서 부체찰(副體察)을 시켜서 다시 영남(嶺南)으로 갔다. 신축(辛丑)에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가 되었다가 이내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명했다. 또 특별히 함경도 순찰사(咸鏡道巡察使)에 임명하자, 공은 계청(啓請)하여 가르치고 조련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궁시(弓矢)와 조총(鳥銃). 창검(槍劍)을 익히려 했으나 삼갑 육진( 三甲六鎭)에 이르니 남자 장정이 몹시 적으므로 건장한 여자들을 불러다가 활과 총을 가르쳤더니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기고 어사(御史)를 보내서 무예(武藝)를 시험하여 상을 주었다. 또 신기비결(神機秘訣)을 모아다가 이를 인쇄해서 장사(壯士)들에게 나누어 주어 익히게 하고, 풍폐관(豊폐館) 및 동남 문루(東南門樓)를 세웠다.

계묘(癸卯)에 호조판서(戶曹判書)로 들어가자 포흠난 것을 갚아주고 녹질(祿秩)을 더해주니 백성들이 모두 칭송했다. 갑진(甲辰)에 선무공신(宣武功臣) 二등에 책록(策錄)되고 서흥군(西興君)에 봉해졌다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겨졌다. 공은 항상 붕당(朋黨)의 기울고 어긋나는 것을 걱정하여 통용(通用)하기에 힘쓰고 다투는 것을 억제하더니, 이에 당시 사람들이 기뻐해서 지사(知事)로 바뀌었다가 호조판서(戶曹判書)로 들어갔다.

을사(乙巳)에 특별히 평안감사(平安監司)에 제수되었는데, 서관(西關)은 본래 강하고 사나워서 스스로 감내하기가 어렵고 정령(政令)이 또 떨치지 못한다고 일컬어졌으나 공은 부임하자 이를 바로잡아서 민심(民心)이 엄숙히 복종했다. 이에 명하여 숭정(崇政)으로 승진시키고 사도체찰사(四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가 들어와서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고, 무신(戊申)에 선묘(宣廟)가 승하(昇遐)하자 공은 남달리 애통하더니 이윽고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지사(知事)에 임명되자 드디어 편주(編舟)로 고향을 찾아 호연(浩然)히 늙음을 마칠 계획을 세웠으나 임자(壬子)에 김직재(金直裁)의 옥사를 듣고 서울에 올라왔고, 그 뒤에 숭록 보국(崇錄輔國) 판중추(判中樞)에 승진되었는데 혹 취임도 하고 혹 사퇴도 하다가 병진(丙辰) 十월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이 때 정조(鄭造) 등이 앞장서서 대비(大妃)를 폐할 일을 의논하여 간사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총명을 가리어 곧은 사람이 입을 열지 못했다. 이에 진사(進士) 윤선도(尹善道)가 이것을 가지고 이첨(爾瞻)을 탄핵하여 화를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자, 공을 말하기를, 「선비를 죽이는 것은 옮지 않다.」고 힘써 구원하자, 삼사(三司)가 드디어 공을 당역(黨逆)으로 배척했다. 이 대 이전방(李傳芳)이 또 윤(尹)의 소(疏)를 불태우라고 청하자 공은 드디어 밖에 나가서 급히 소장(疏章) 十一차를 올렸고, 이수(李수) 및 이형(李炯)이 또 소(疎)를 올려 이첨(爾瞻)을 탄핵해 말하기를, 「한상(韓相)이 죽이는 것을 소중히 여긴 것이 무슨 죄여서 이같이 헐뜯는 것인가. 삼사(三司)는 이첨(爾瞻)의 삼사(三司)란 말인가. 충량(忠良)을 모두 내쫓아 그 불꽃이 하늘을 태운다.」했다.

정사( 丁巳) 겨울에 폐모(廢母)의 의논이 더욱 드세어서 대비(大妃)를 유폐(幽閉)하자고 광해(光海)를 움직이자 그 소(疏)를 봉해서 내려 보냈으나 공은 병을 핑계하고 보지 않고서 또 글을 올렸다. 이 때 윤유겸(尹惟謙) 등이 소(疎)를 올리기를, 「한상(韓相)이 발논(發論)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사직하니 대신(大臣)의 의리가 아니온 즉 급히 형벌을 바로하기를 청합니다.」하고, 또 새로 정승을 뽑자고 합계(合啓)했다.

무오(戊午)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는데, 정월 十六일에 기준격(寄俊格)이 허균(許筠)의 역변(逆變)을 고하자 공이 맨 먼저 그 국문을 청했으니 이는 대개 허균(許筠)이 일찍이 글을 서궁(西宮)에 보내서 선동하기를 백 가지로 간사하게 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없애려 한 것이다. 이 때 대계(臺啓)에 말하기를 「큰 의논을 가볍게 여기고 먼저 국문하기를 청한 것은 전도(顚倒)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하여 공은 또 탄핵을 입어 파직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바야흐로 흉한 무리들이 모후(母后)를 폐하는 일을 대론(大論)이라 하여 정월 초四일부터 비로서 정청(庭請)을 시작했는데, 광해(光海)도 또한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백료(百僚)가 정청(庭請)하는데 대신(大臣)이 오지 않았으니 경(卿)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했다. 이에 공은 탄식하기를, 「권간(權奸)이 윤리를 상하고 있으니 말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하고 드디어 사표를 올리고 문을 닫아걸었다.

어느 날 박경신(朴慶新)이 말하기를, 「기상(奇相)이 이의를 세우니 의논이 비록 정당해도 일에 유익할 것이 없다. 이제 대비(大妃)가 위태로워서 공의 조카 유천(柳川)이 칠신(七臣)의 참혹한 화를 당할 것이 박두했는데 벌판의 불이 타오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인즉 기상(奇相)을 없애도록 공이 마땅히 급히 나와서 조제(調劑)해야 할 것이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한번 나가서 자전(慈殿)의 화를 면할 수 있다면 비록 만번 죽어도 뉘우칠 것이 없다.」하고 드디어 정청(庭請)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二十四차 글을 올린 二十七일이었다. 이때 흉도(匈徒)들은 이미 절목(節目)을 마감하고, 거기에 또 「폐(廢)자를 더하여 공을 위협하여 글을 올리자 공은 항언(抗言)하기를, 「이는 신자(臣子)로서 감히 할 일이 아니다.」하고 끝내 꺾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당일의 정부 청(廳) 위의 먼지를 모두 한상(韓相)의 소매가 털어버렸다.」했다. 이 일을 정공 재륜(鄭公載崙)의 문견록(聞見錄)에 보인다.

이에 이첨(爾瞻)이 공의 이름을 남몰래 써넣어서 열 가지 죄를 아뢰어 대비(大妃)를 폐했다. 신공 익성(申公翊聖)의 일기(日記)에, 정청(庭請)을 유간으로 하여금 꺼내게 했고 초계(草啓)는 이첨(爾瞻)이 지었고 절목(節目)을 감손(減損)하는 것은 최관(崔灌)이 이를 주장했고 대신(大臣)들은 실상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공은 나가서 즉시 사표를 모두 十一차례 올렸다. 이 때 명(明)나라 조정으로부터 군사를 뽑아 가는데 나라에 상사(喪事)가 있어 광해(光海)는 오히려 이를 소중히 여기고 대신(大臣)들은 경황이 없어서 중신(重臣)을 보내서 돈독하게 타일렀는데 송영서(宋永緖)등이 탄핵하기를, 「한상(韓相)이 이미 이론을 내세우고 또 사직하니 청컨대 이를 베어서 그 저버리고 한만한 것을 징계하고 관학(館學)과 삼사(三司)를 시켜 일을 끝내시옵소서.」하자 광해(光海)는 말하기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서궁(西宮)을 부호(扶護)한 것이 유독 한상(韓相) 한 사람 뿐이 아닌데 어떻게 다 베인단 말인가.」했다.

그러나 공은 마침내 탄핵을 입어 영중추(領中樞)로 바뀌었는데, 삼사(三司)의 아룀이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五월의 비망기(備忘記)에 말하기를, 「한영부(韓領府)가 여러번 교서가 있었는데도 나오지 않으니 진실로 대신(大臣)의 의리가 없은즉 금시 벼슬을 면하게 하고 해가 지나도록 이 의논을 중지하는 것이 옳다.」했다.

공은 신유(辛酉)十一월 병자(丙子)에 졸했으니 이 때 나이가 七十九였다. 그 해 납월(臘月) 갑신(甲申)에 광주(廣州) 영장산(靈長山) 선영(先塋) 정좌(丁坐)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초상과 장례는 모두 관(官)에서 돌보았다. 시호는 장헌(莊獻)이다. 이완평(李完平) 및 여러 공이 모두 만장(輓章)을 지어 이를 슬퍼했다. 신공 식(申公湜)의 제문(祭文)에 말하기를, 「종이에 가득한 탄핵의 말에서 비로소 공의 뜻을 보겠다.」했고, 민공 형남(閔公馨男)의 자신소(自伸疏)에 말하기를, 「이항복(李恒福). 기자헌(奇自獻). 한효순(韓孝純). 정홍익(鄭弘翼) .김세렴(金世濂) 및 신(臣)이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가 흉한 무리에게 배척당한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아는 바이다.」했었다.

계해(癸亥)에 반정(反正)하자 대신(臺臣)들이 추탈(追奪) 할 것을 청하자 인묘(仁廟)가 말하기를, 「반정(反正)한 처음에 이처럼 시끄러우니 내 마음이 개연(慨然)하나 이제 아직 그 말에 좇으리라.」하고, 즉시 하교하기를, 「각각 따로 녹용(錄用)하라.」했고, 효종(孝宗)도 또 이러한 하교가 있었다.

 영묘(英廟) 기축(己丑)에 경연(經筵)에서 홍상 봉한(洪相鳳漢)이 말하기를,「무오(戊午)에 정청(庭請) 할 때 고상신(高相臣) 한효순(韓孝純)이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문자(文字)로 전하는 바이오니 그 오대손(五代孫) 종찬(宗瓚)을 이제 대관(臺官)의 직책으로 올려 쓴다는 것이 반드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신(臣)이 한판부(韓判府) 신 익모(臣翼暮)가 입시(入侍)했을 때 같이 의논한 바입니다.」했다.

임금이 또 그 일에 대해서 묻자 판부(判府)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한상(韓相)의 심적(心跡)은 이미 원통하오니 그 자손은 마땅히 재주에 따라서 올려 쓰시옵소서. 이는 비단 신(臣)의 뜻만이 아니옵고 고중신(高重臣) 이정보(李鼎輔) 및 지금의 중신(重臣) 신회(申晦) 등 여러 재상의 공의(公義) 이옵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아뢴 바는 가위 나의 의지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으니 한 줄기 나라를 위한 공심(公心)에 깊이 감탄(感歎)한다.」했다.

민상 백상(閔相百相)은 일찍이 말하기를,「고한상(高韓相)은 임진(壬辰)에 끝내 훈로(勳勞)가 있어 실로 판탕(板蕩)때의 성신(誠臣)인데 추삭(追削)한 것이 지극히 원통하므로 복전(複典)할 것을 청하려한다.」했는데 그 말은 그 홀기(笏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정종(正宗) 계묘(癸卯)에 이조참판(吏曹參判) 정창순(鄭昌順)이 홀로 정사를 하는데 한종찬(韓宗瓚)을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천거하여 윤허(允許)를 받았는데 우상(右相) 김욱(金煜)이 이를 방해하여 개정(改正)의 명령이 있었다. 이에 한석민(韓錫敏)이 격쟁(擊錚)하자 전교(傳敎)를 내리기를,「고대신(高大臣)의 일은 기축(己丑)에 경연(經筵)에서 아뢴 말을 비단 지금까지 기억할 뿐만 아니라, 또 그 일의 시말(始末)을 또한 듣건대 선조(先朝)의 하교가 정녕하니 그 누가 그 마음을 알고 그 뜻을 민망히 여기지 않으랴.」했다. 또 임금은 비답(批答)을 내려 한종찬(韓宗瓚)은 구애될 것이 없으니 조용(調用)하도록 하라고 했다. 정미(精微)의 도정(都政)에 한덕후(韓德厚)를 지평(持平)에 제수하자 김욱(金煜)이 또 이문원의 파직을 청했으니 이는 대개 덕후(德厚)를 추천한 직책이다. 이 때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에게 묻자 좌상(左相) 이재협(李在協)이 말하기를, 「한상(韓相)의 후손에 부윤(府尹)이 있으니 이제 대간(臺諫)으로 천거하는 것이 없습니다.」하고, 영돈령(領敦寧) 홍낙성(洪樂性) 및 판부사(判府事) 서명선(徐命善)도  모두 이상(李相)의 뜻과 같았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대신(大臣)들의 말이 정히 내 뜻에 맞으니, 개정(改政)과 파직의 청은 윤허하지 않는다.」했다.

대사헌(大司憲) 김재찬(金載瓚)은 곧 욱(煜)의 아들인데 그 뒤를 따라 또 덕후(德厚)를 방해하자 채상(蔡相) 제공(濟恭)이 아뢰기를, 「한상(韓相)의 자손들은 계해(癸亥) 이후의 사람들인데, 아들은 음사(蔭仕)로 문관(文官)이요 외손(外孫)에는 상신(相臣)이 있는데도 반대가 없으니 한상(韓相)을 만일 흉론(匈論)을 주장한 자와 같이 의논한다면 원통한 일입니다.」했다.

고종(高宗) 갑자(甲子)에 비로소 복관(復官)하고 시호를 내렸다. 계유(癸酉)에 최익현(崔益鉉)의 소(疏)에 말하기를, 「등극(登極)한 뒤에 정령(政令)은 속류(俗類)와 사설(邪說)이 이를 해쳐서 말이 몹시 한 세상을 핍박하여 임금의 뜻을 움직여 드디어 시끄러워서 대원군(大院君)도 또한 피해 나왔으니, 군자(君子)들이 그 어려운 말을 범했다고 기롱했다. 이에 공도 또한 헐뜯음을 당해서 삭관(削官)되었다가 융희(隆熙) 무신(戊申)에 또 훈작(勳爵)과 시호가 회복되었다.

공은 기량(器量)이 굉후(宏厚)하고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했다. 일찍이 임진(壬辰)의 난리를 당해서 부체찰(副體察)의 중임(重任)으로 근로(勤勞)하여 그 수군(水軍)과 양곡에 이미 훈로(勳勞)가 있어 이름이 당시 세상에 나타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흥(中興)의 신하라고 일컬어져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이 그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공의 충근(忠勤)함과 경략(經畧) 및 조그만 행동이나 작은 절개까지도 뒷사람에게 남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선묘(宣廟)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효순(韓孝純)은 역학(易學)이 몹시 고명(高明)하다.」했고, 유상공 서애(柳相公西厓)는 징비록(懲毖錄)에게서 공의 장략(將略)을 칭찬하여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주었으며, 이항복(李恒福)은 말하기를, 「내가 한공(韓公)을 본 뒤로부터 명성(名聲)이 더욱 무거워 졌다.」했다. 대개 하늘이 현량(賢良)을 내서 중흥(中興)을 협찬(協贊)하게 한 것이지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공의 초취(初娶)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전적(典籍) 정(挺)의 따님으로서 四남 二 녀를 낳았고, 재취(再聚)는 진주강씨(晋州姜氏) 현감(縣監) 효윤(孝胤)의 따님으로 三 남 二녀를 낳았는데, 세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세 아들은 음사(蔭仕)에 올랐으며 하나는 기적(記績)으로 사맹(司盟)이요 사위는 모두 목사(牧使). 수령(守令)이며, 내외 자손이 백 명에 이른다. 공이 몰(歿) 한 후에 더욱 번성해서 문과(文科)로 나가는 것을 세습(世襲)했고 음관(蔭官)도 또한 백여 명이나 된다. 이제 묘도(墓道)의 글을 나에게 부탁하는데 병관(炳觀)이 일찍이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를 읽었는데 말하기를, 「유민(遺民)들이 공의 군(郡)을 순찰하는 것을 보고 한(漢)나라 때 관원의 위의(威儀)라고 칭찬하여 중심(中心)으로 이를 사모한다.」고 한 것이 어제의 일과 같은데, 이제 삼가 옛 행실을 평(評)하여 사모하는 뜻을 나타낸다.

아아! 공은 이제 三백년이 되었다. 세상에는 혹 당논(黨論)에 갖혀서 공의 심적(心跡)의 가히 일월(日月)과 다툴만한 것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열성(列聖)으로부터 하교가 정녕했고 여러 공들의 의논이 있는데도 광해(光海)가 서궁(西宮)을 부호(扶護)했다고 말하고 흉도(匈徒)들이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인가. 후세(後世)의 군자(君子)들이 반드시 의논을 숭상하는 자가 있어 묘도(墓道)에 와서 뵈우 리라.

아아! 명(銘)에 말한다.

오직 나라의 기초로서 융성하게 아름다운 덕일세. 목능(穆陵)께서 용서하시어 공이 즉시 벼슬에 나갔네. 임진. 계사가 어느 해인가 여러 선비들이 힘을 다했네. 공은 이 때에 영좌(領左)의 한 수령(守令)이었네. 의병(義兵)을 불러 모아 큰 도둑을 공격했네. 육비(六蜚)가 안심하고 백료(百僚)들이 얼굴을 고쳤네. 왕부(王府)에서 궁시를 임금의 말을 하사받았네. 충무공(忠武公)이 발탁하고 이완평(李完平)이 칭찬해 불렀네. 절부(節符)를 쥐고 군사를 독려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힘썼네. 삼도(三道)의 양곡을 맡아서 군량(軍糧)을 어렵게 대주었네. 중국 군사와 힘을 합하여 산하(山河)를 다시 세웠네. 공은 오직 자랑하지 않았으나 왕이 비로소 나타내 주었네. 임금의 사랑은 산하(山河)에 넘치고 이조(吏曹)의 자리에서 인선(人選)을 신중히 했네. 대신( 大臣)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눈물 흘릴 화액(禍厄)이 어이해서 나오는가. 늦으막에 정승이 되었으나 돌아갈 생각이 날로 급했네. 남달리 경계하고 인륜(人倫)을 원망하니 누가 죽고 사는 것이 없으랴. 비밀히 사람에게 도모한 것은 아아! 저 귀신과 물여우일세. 해와 달이 이미 밝았는데 아직도 촛불 켜는 것이 더디었네. 공의 곧고 밝음으로써 끝내 맑고 분명했네. 그 유풍(遺風)을 손질해서 기린 것은 이 비석에 새겼네.
        가선대부 전행규장각지후관(嘉善大夫 前행奎章閣紙後官) 이병관(李炳觀)
        삼가 지음.
        정헌대부 전의정부찬정 겸장례원경 규장각 제학
        (正憲大夫 前議政府贊政 兼葬禮院卿 奎章閣 提學) 박기양(朴其陽) 삼가 씀.
        자헌대부 전행궁내부특진관(資憲大夫 前行宮內部特進官) 윤조영(尹肇榮) 전자(篆字)를 씀.

[註]1 <庚癸>: 군중에서 양식을 구하는 은어(隱語). 경(庚)은 서쪽에 위치해서 곡식을 주관하고, 계(癸)는 북쪽에 있어서 물을 주관하기 때문임.
[註]2 <大群>: 사형(死刑).
[註]3 <合啓>: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중에 세 관사나 또는 두 관사가 합동으로 올리는 계사(啓辭).
[註]4 <備忘記>: 여기에서는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承旨)에게 전하는 문서.
[註]5 <擊錚>: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하여 거동 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의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일.

 [자료수집]
 [청주한씨 정선공파보(淸州韓氏旌善公派譜) 上卷 18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