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문집>
- 간이집(簡易集) 제5권[괴원문록(槐院文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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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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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이집(簡易集) 제7권 [공산록(公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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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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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갑일록(癸甲日錄) [선조 16년, 15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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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갑일록(癸甲日錄) [선조 17년, 15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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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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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조보감 제32권 [선조조 9, 29년(병신, 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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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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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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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박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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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별집 제1권 [계사(啓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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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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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1581년(선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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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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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부부고 제19권 [문부(文部) 16 ○ 기행 하(紀行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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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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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록(追錄) [안정 전(安挺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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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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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창한화(竹窓閑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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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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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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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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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봉일고(鶴峯逸稿)부록 제3권[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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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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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봉일고(鶴峯逸稿)부록 제3권[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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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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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우집(於于集)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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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柳夢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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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8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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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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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掌樂院)의 사연(賜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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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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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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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감사(左右監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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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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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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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손(外祖孫)이 정승이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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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하필기(林下筆記)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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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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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에 상신에 제수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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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갑인년(1614, 광해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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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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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을묘년(1615, 광해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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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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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병진년(1616, 광해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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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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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정사년(1617, 광해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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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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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무오년(1618, 광해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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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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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이집(簡易集) 제5권[괴원문록(槐院文錄)] 최립 [崔岦, 1539 ~ 1612] 그런데 경상 좌도(慶尙左道)의 순찰사(巡察使) 한효순(韓孝純)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건대, “본도(本道)에 머무르고 있는 왜적의 형세로 말하면, 기장현(機張縣), 동래현(東萊縣), 부산진(釜山鎭),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浦), 양산(梁山)의 증산(甑山) 및 그 아래의 용당(龍堂) 등 지역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떼를 지어 주둔하고 있는데, 간혹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하는가 하면 벼를 베어 가고 인민을 겁탈하며 죽이고 있습니다. 또 9월 5일에는 무려 천 명이나 무리를 지어 경주(慶州) 지역에서 분탕질을 쳤는데, 심지어는 황룡사(黃龍寺)에 비축해 놓은 미곡 천여 섬 가운데 거의 절반이나 약탈해 갔습니다.” 하였습니다.
(2) 간이집(簡易集) 제7권 [공산록(公山錄)] 최립 [崔岦, 1539 ~ 1612] 이번에 면숙(勉叔) 상공(相公) -도체찰부사(都體察副使)인 한 지사(韓知事)임- 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한다.
두 분이 서로 만난 것은 사적인 모임 아니요 / 相聚非私覿 천병(天兵)의 위엄이 가까이 임했기 때문이라 / 天威卽近傍 한 분은 이번에 새로이 임명되신 체찰부사 / 體宣新得副 한 분은 옛날부터 이름 떨친 우리 순상 / 巡察舊稱光 공동으로 임기응변 대책 마련하였나니 / 共爲臨機急 기막힌 필승의 작전 계획 세우신 줄을 알고말고 / 深知制筭長 나는 참으로 쓸모없이 놀고먹는 식객으로 / 下賓眞一冗 구우일모의 존재인걸 어떻게 도와 드리리요 / 安補九牛亡
(3) 계갑일록(癸甲日錄) [선조 16년, 1583년] 우성전[禹性傳, 1542 ~ 1593] 18일 (정유). 맑고 매우 덥다. 첫번 사표를 써서 보냈는데, 그 사표에, “신이 5월 3일부터 종기가 생겨 이제 3개월이 되었는데, 점차 깊은 고질이 되었나이다. 이름은 벼슬하는 명부에 있사오나 몸은 사삿집에 엎드려 있사와 극히 편안치 못합니다. 간혹 조금 나아서 억지로 한 번 나가면 갑자기 다시 재발합니다. 지난 6월 4일에 사간에 제수되어 6일 사은(謝恩)하려 하였더니, 하루 만에 재발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간신히 조리하여 보전하던 중 이달 6일에 군자정(軍資正)으로 사은하러 나갔다가 그날 즉시 재발하여 날마다 고통으로 지내니 몸과 뼈가 이미 탈진되고 정신이 이미 흩어져서 산 사람 꼴이 아닙니다. 논사(論思)의 중한 곳을 오래 비어 둘 수 없사오니, 신의 직명을 곧 파면하도록 명하소서.” 하다. 동료들이 조리하여 출사하기를 재차 권유하고, 교리 정희적(鄭熙績)이 사표를 올렸으므로 지금까지 사직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부제학에 김우굉(金宇宏), 교리에 정사위(鄭士偉)ㆍ정윤복(丁胤福)ㆍ정희적(鄭熙績), 수찬에 홍적(洪迪)ㆍ한효순(韓孝純)이 되었다 한다. 우상 정지연(鄭芝衍)이 사직서를 재차 올리니, 태도가 모호하다. 비답하기를, “다시 더 마음을 다하여 하라.” 하다. 대사헌 이개(李槩)가 재차 사직서를 내었다가 이제 나와서 숙배하고 사직하려 하니 물러나 기다리게 하다. 사간 성락(成洛)과 정언 황정식(黃廷式)이 양사의 출사를 청하다. 그 계사의 내용에 완곡한 말이 많으니, 가히 화란(和鑾)을 울리고 절주(節奏 박자)를 맑게 한 것이라 하겠다. 양사에서 직무에 나왔으나 다른 논의는 없다. 성락과 황정식이 어제 동료를 처리하지 못한 것으로 사직하다. 수찬 홍적과 한효순이, “전날에 차자를 올린 것은 홍문관의 공론이었사온데, 홀로 허봉만 그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 하오니, 신등은 무슨 사람이기에 얼굴을 들고 그대로 경연 자리에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신등에게도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그 비답에, “전번에 논핵한 차자는 역시 직분 안의 일이었으니 사면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다. 본관에서는 날이 저물어서 차자를 올리지 못하다. 문 열리기를 기다려 한 번 모이려 함이니 괴이한 일이다. 정희적(鄭熙績)과 윤선각(尹先覺)에게 순찰 종사관(巡察從事官)을 명하다. 영상이 강사(江舍)로 나갔다는 말을 듣다. 일과를 그만두다.
22일 (신축). 날씨가 흐리나 동풍이 불어 서늘한 기운이 어제처럼 춥지는 않다. 자첨(子瞻 이종)이 와서 나에게 출사하기를 권유하다. 이날 정사가 있었는데, 특명으로 권덕여(權德輿)가 성주 목사가 되고, 수찬 홍적(洪迪)이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임명되고 내가 사간에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이 되었으나, 옥당을 전근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여 취하하게 하고, 이희득(李希得)을 시켰다. 또 수망으로 교리에 의망되었으나 낙점이 되지 않다. 부망에 정희적이고, 말망에 조인후였는데 낙점되다. 이덕열(李德悅)이 수찬이 되다. 후에 박경지의 아들 박후경(朴後慶)이 박순 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니, 괴이하다. 한효순(韓孝純)ㆍ김홍민(金弘敏)ㆍ정숙남(鄭淑男)을 전랑에 의망하자, 왕이 하문하기를, “낭청(郞廳)에서 의망을 논의하였는가? 또는 당상에서 논의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의망을 같이 논의하였습니다.” 하다. 왕의 하교에 “한효순과 김홍민은 체직된 지가 오래 되지 않고 정숙남 전랑의 천거를 파하게 되어서 바로 의망한 것이다. 은 합당치 않으니 개정하라.” 하다. 이비(吏批)가 하직(下直)하고 나가려 하니, 하교하기를, “전랑을 내지 않고 어찌 하직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적당한 인물이 추고(推考)되었으므로 그러합니다.” 하다. 성사중이 동부승지가 되고, 중숙(重叔)이 사면하다. 유회보(柳晦甫)가 처음으로 수찬에 의망되었으나, 양사에서 합계하여 윤허하지 않다. 일과를 그만두다.
24일 (계묘). 맑고 서늘한 기운이 깊은 가을과 같으면서도 꾀꼬리 소리가 맑고 매끄러운 것이 초여름 같다. 양사의 합계와 옥당의 차자에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다. 처음 계하던 날부터 양사의 소가 비록 오전에 들어가도 저물어서야 내려보내시므로 두 번 계하지 못하다. 정사가 있었는데, 김귀영이 판중추부사가 되고, 내가 부교리에 의망이 되어 수점되다. 수망에 한효순이고, 말망에 권극지이다. 또 정경선(鄭景善)이 해운 판관(海運判官)이 되고, 김인백(金仁伯)이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다. 처음의 사표를 오늘에서야 올려서 휴가를 얻다. 《심경》을 읽다.
4일 (계축). 맑다. 상이 침을 맞으시므로 삼사가 모두 논의를 정지하고, 김우굉(金宇宏)ㆍ이덕열(李德悅)ㆍ이정형(李廷馨)수찬(修撰) 과 같이 문안을 드리고, 동료들과 회합하면서 《강목》을 교정하였다. 정원에서 안민학(安敏學)의 벼슬한 것과 승진한 날짜를 상고하여 계하니, 상이, “그때 당상과 낭청이 누구냐.” 하므로, 곧 회계하기를, “판서에 이이(李珥), 정랑에 김찬(金瓚), 좌랑에 김첨(金瞻)과 한효순(韓孝純), 그리고 이길(李洁)이었습니다.” 하다.
29일 (정축). 아침에 서리가 몹시 내리고 안개가 끼다. 이날 정사가 있었다. 공저(公著)는 응교(應敎), 숙진(叔珍)은 부응교(副應敎), 수부(粹夫)는 교리(校理), 공직(公直)은 부교리(副校理), 정사위(鄭士偉)ㆍ한효순(韓孝純)ㆍ권극지(權克智)ㆍ이순인(李純仁)이 추천되다. 이인(李認)이 승지(承旨)가 되다. 혼원(渾元)ㆍ김경부(金敬夫)는 추천되지 않다. 독서당(讀書堂)에서 독서할 사람으로 홍인상(洪麟祥)ㆍ정창연(鄭昌衍)ㆍ심희수(沈喜壽)ㆍ이정립(李廷立)ㆍ이덕형(李德馨)ㆍ오억령(吳億齡)ㆍ이항복(李恒福)을 더 뽑다.
10일 (무자). 강도(江都 강화도)의 목장 일로 파직되다. 이날 정사가 있었다. 소옹(蘇翁)이 좌의정이 되고, 한효순(韓孝純)이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홍인상(洪麟祥)이 수찬(修撰)이 되다. 일과를 그만두다
(4) 계갑일록(癸甲日錄) [선조 17년, 1584년] 우성전[禹性傳, 1542 ~ 1593] 2일 (기묘). 맑다. 이공직(李公直)이 집의가 되고, 한효순(韓孝純)도 망에 오르다. 황정식(黃廷式)이 사간이 되다. 이홍인(李弘仁)과 한응인(韓應寅)이 지평이 되고, 윤기(尹箕)도 망에 오르다. 회지(晦之)가 예조 정랑이 되다. 그의 숙부와의 상피(相避) 때문에 체직한 것이다. 최언명(崔彦明)이 도승지가 되고, 황경문(黃景文)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특명으로 이우직을 형조 판서에 임명하다. 들으니, 양사(兩司)에서 죄를 가중하는 법을 행하고자 하는데 그 대상이 이발(李潑) 형제와 김응남(金應南)ㆍ김사순(金士純)ㆍ홍여순(洪汝諄)ㆍ홍혼원(洪渾元) 및 나라고 한다. 이발과 사순이 드러나게 윤근수(尹根壽)와 서로 미워하므로 법을 행함에 그 사감이 개입된 형적이 나타남을 곤란하게 여겨 윤근수를 체직시키고 난 뒤에 거사하려 한다고 한다. 전교를 내리기를, “군현(郡縣) 합병의 편의 여부를 감사에게 물었는데 어찌 속히 회계하지 않는가.” 하다. 《혹문》을 읽다.
(5) 국조보감 제32권 [선조조 9, 29년(병신, 1596)] ○ 윤8월. 한효순(韓孝純)을 한산도(閑山島)로 보내어 무과를 설행하여 수자리 군 사들을 시험보여 사제(賜第)하였는데, 이는 통제사 이순신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6)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박동량[朴東亮, 1569 ∼1635]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조정의 소식이 끊어지니 모두들 임의로 거취(去就)를 하오나 신은 본성(本城)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대가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글을 보고 한편 슬퍼하고 한편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한효순을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7) 백사별집 제1권 [계사(啓辭)]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 지금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한효순(韓孝純)이 통제사 이하 여러 장관(將官)들과 상의(商議)하여 경도(鯨島)에 일진(一陣)을 두고 고금도(古今島)에 일진을 두려고 하자, 비변사에서 ‘통제사가 멀리 경도에 있으면 부산, 거제의 적들에게 성세(聲勢)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록 달려가서 구원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니, 경상우도(慶尙右道)의 근처에 나아가 주둔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효순이 이를 인하여 수일 전에 신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하기를, ‘적이 향하는 곳을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전선(戰船)을 영남으로 전부 다 옮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 하였으니, 이는 정히 상교(上敎)에 이른바 호남 우도(湖南右道)에 중병(重兵)을 두어야 한다는 뜻에 해당합니다. 그는 이 밖에 또 말하기를,‘영남으로 나아가 진을 치자면 민심이 안정되기 어렵고 인력이 지탱하기 어려우며 양향(糧餉)을 대기도 어려울 것이니, 오늘날의 형편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나누어 지킬 계책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양남(兩南)의 물력(物力)이 대단히 단약(單弱)하므로, 설령 두 도(道)의 힘을 합해서 오로지 일면(一面)만을 지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진영(陣營)을 이루지 못할 것인데, 진영을 분열시켜 놓으면 형세가 더욱 고단하고 멀어서 수미(首尾)가 서로 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옛날에 이른바 ‘7백 리에 걸쳐 진영을 연이어 설치하고서는 적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른 말입니다. 그리고 육로(陸路)의 군사에 이르러서는 더욱 두서가 없으니, 대체로 근일에 이미 고갈된 기(氣)를 다 불어서 주사(舟師)에만 전력을 들이고 육병(陸兵)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육병의 형세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狀啓(계사);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安集使時○癸巳 臣自承軍糧措置之命。大事當前。料理極緊。周行列邑。勸諭民人。前後所得納粟米。僅足千餘石。又與兼巡察使臣韓孝純相議。分徵私儲於民間而總計之。亦不下納粟之數。臣竊念人民飢頓。擧將塡壑。所當登時散給。濟其死命。而皇朝馳兵遐海。大拯塗炭。恢復之勢。亶在此擧。不可他用。以乏軍興。姑就其見在之數。除出少許。隨便賑活。而因置所納之邑。以爲餉軍之需。今者劉總兵,吳遊擊等諸軍。方住尙州。當涉累日。此站支供。乃右道所屬。而軍糧缺乏。不得成形。問於右都事臣金頴男。則合計當道軍糧。只有二萬兵二日之食。未及數日。將爲告竭云。臣與戶曹判書臣李誠中及韓孝純同在一處。反覆思之。右道則更無可措之勢。湖南則時無及到之期。不得已輸運左道之納粟私儲。以爲補綴之計。臣自尙州還到豐基榮川奉化禮安安東等邑。躬自催督。急期輸送。而久旱之餘。霖雨大作。川渠極漲。人馬不通。轉運之勢。必淹時日。極爲憫慮。一國臣民。擬仗天朝之威。以雪無窮之辱。則凡支待之事。一毛一髮。固無所愛。但天兵之往還不常。去留無定。將使窮兇極惡之賊。穩登海道。人心冤憤。不能自抑。而今且彌漫於梁山以下。狡詐之計。亦所難測。則天兵之了事遲速。有不可知。許多糧餉。何路繼用。臣於輸運之事。雖未有朝廷命令。當此蒼黃之日。遇事則爲之。東奔西走。庶補毫末。而人民飢病。牛馬疲頓。事不從心。尤增痛憫。
(8)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1581년(선조 14)] 이이[李珥, 1536 ∼1584 효원이 재기가 없다면 버린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효원의 재주가 가히 쓸 만한데도 동ㆍ서의 말썽에 이끌리어 쓰지 않는다면 심히 사류들이 불안해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柳成龍)ㆍ수찬(修撰) 한효순(韓孝純)도 역시 효원의 쓸만한 점을 되풀이하여 진달하였고 옥당에서는 차자까지 올렸으나, 임금은 끝내 석연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9) 성소부부고 제19권 [문부(文部) 16 ○ 기행 하(紀行下)] 허균[許筠, 1569 ∼1618] 25일 연위사 민몽룡(閔夢龍), 유수(留守) 한효순(韓孝純), 감사(監司) 김신원(金信元)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유사(劉使)는 개독례에 대해 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사(使)는 관리 여러 명을 모아 놓고 연구해 보았으나 하는 수 없이 유연숙을 서울로 먼저 보내 임금의 뜻을 받아 오게 하였다.
(10) 추록(追錄) [안정 전(安挺傳)] 안로 [ 安輅, 1635 ∼1698] 진사 안정은 갑인생이고 자(字)는 정연(挺然)이다. 주서(注書)로 있었는데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매를 맞고 귀양갔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서울에서 살았으며, 병조 좌랑 안처선(安處善)의 아들이다. 아들 안광국(安光國)영(令)ㆍ안서국(安瑞國)생원, 사위 이덕보(李德輔)ㆍ한효순(韓孝純), 손자 안증형(安證瑩)이 있다.
(11) 죽창한화(竹窓閑話) 이덕형[李德馨, 1561 ~1613]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 24)에 장악원(掌樂院)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었다. 이때 정원(政院)에서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있다 하여 예에 의하여 상께 아뢰어서 특별히 1등 기악(妓樂)을 내리도록 했다. 이에 중사승지(中使承旨)를 시켜 술을 내렸다. 이때 정승 김귀영(金貴榮)ㆍ정승 심수경(沈守慶)ㆍ지사(知事) 강섬(姜暹)ㆍ동지 송찬(宋贊)ㆍ우윤 목첨(睦詹)ㆍ대사성 이기(李墍)와 우리 장인 참판 신담(申湛)이 미리 모여서 시축(詩軸)을 만들어 경사를 도왔고 심정승이 시를 썼다. 장인이 항상 말하기를, “기로연(耆老宴)이란 우리 동방의 성대한 행사로서 그 기구나 음식이 여기에 비교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내가 일찍이 들은 바 있었다. 그 뒤 25년 만인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또 장악원에서 기로연을 열었는데, 역시 기악(妓樂)과 술을 내리기를 한결같이 고사에 의하여 했다. 나는 이때 도승지로서 중사(中使)와 함께 명령을 받고 가서 참여했었다. 이때에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당시 정승으로서 잔치를 주재했으나 그는 기로(耆老)가 아니었다. 판추 한효순(韓孝純)ㆍ판추 노직(盧稷)ㆍ참찬 윤승길(尹承吉)ㆍ판서 이준(李準)ㆍ지사 이시언(李時彦)이 자리에 있었다. 휘장과 장막ㆍ병풍ㆍ족자 같은 기구나, 등촉(燈燭)과 채화(綵花) 따위의 화려한 것이나, 기악(妓樂)이 차려진 것이나, 음식의 풍부한 것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여 자못 이 인간 세상의 일 같지가 않았다. 모든 노인들은 모두 여러 조정의 기로들로서, 쇠한 얼굴에 센 머리털을 날리고 서대(犀帶)와 금대(金帶)가 휘황하게 빛나고 머리에 꽂은 꽃은 모자를 눌렀는데, 술이 얼큰하자 서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잔치가 파하자 자제들이 부축해서 돌아가는데 연거(蓮炬)로서 앞을 인도하고, 노래와 관악이 뒤를 옹위하고 갔다. 이것을 보는 자는 칭찬해 마지 않으면서 모두 신선이라고 일컬었다.
(12)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김시양[金時讓, 1581 ∼1643] 광해 즉위 초에 이조 판서 성영(成泳)을 영경의 당이라고 탄핵하여 파면하였다. 영상 이완평(李完平 완평은 이원익의 봉호임)이 그 후임으로 이광정(李光庭)ㆍ김수(金睟)ㆍ이정귀(李廷龜)를 천거하였는데, 광해가 가망(加望 관원을 추천할 적에 삼망(三望) 외에 인원을 추가하는 것임)하라고 명하므로 신흠(申欽)을 천거하였더니, 또 가망하라고 하였다. 광해의 뜻은 정창연(鄭昌衍)에게 있었으니, 이는 창연이 왕비의 외숙이기 때문이었다. 완평이 어찌할 수 없어 김신원(金信元)ㆍ한효순(韓孝純)과 정창연을 추천하여 창연이 드디어 이조 판서가 되니,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외척의 권세가 강성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자년 봄에 선조(宣祖)는 성일이 ‘적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는 설을 부르짖었다 하여 특별히 영남 우병사에 제수하였는데, 미처 진(鎭)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이 이미 이르렀다. 선조가 성일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여 금부 도사 이통(李通)이 명을 받들고 낙동(洛東)에 이르렀는데, 왜적의 선봉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다. 성일이 잡아오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 사잇길로 올라오는데, 선조가 서쪽으로 거둥하여 다시 성일을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났을 때에 백성을 타일러 안정시키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로 임명하여 영남의 백성들을 타일러 안정시키게 하였다. 성일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새 명령이 있음을 듣고서 다시 영남으로 내려갔다. 가을에 감사 김수(金睟)가 죄를 받고 파면되니, 행조(行朝)에서는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을 좌도 감사로 삼고, 성일을 우도 감사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동해에는 조수(潮水)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 중에 이것을 논한 이가 없다.우리 나라 문인 중에 성허백(成虛白 성현 成俔)과 같은 무리가 이것을 논했는데, 모두 두찬(杜撰 틀린 곳이 많은 저작)을 면치 못하고, 오직 근일에 참의 한백겸(韓百謙)의 의론만이 그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것 같다. 그의 의론에 이르기를, “양극(兩極)을 왕래하는 기운이 남쪽에서부터 북쪽을 향하여 곧장 올라가고 곧장 내려가므로 기(氣)의 여파가 좌우로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동해만이 밀물과 썰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해(西海)에도 밀물과 썰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해는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지나서 조지(條支 옛날 나라 이름으로 서해에 임(臨)하였다고 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이 몇만 리인지 알 수가 없으니, 중국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들어 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므로 의논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13) 학봉일고(鶴峯逸稿)부록 제3권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상 김성일[ 金誠一,1538 ~ 1593] ○ 같은 날에 김성일(金誠一)을 경상좌도 관찰사로, 한효순(韓孝純)을 경상우도 관찰사로 삼았다. ○ 선조 26년 계사 4월 18일(임인). 상이 하교하기를, “경상도의 군량이 매우 염려된다.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을 김성일과 한효순(韓孝純)이 있는 곳으로 보내라.”하였다. ○ 선조 대왕 25년 임진 6월. 경상도를 나누어 좌도 감사와 우도 감사를 두고는 이성임(李聖任)을 우도 순찰사로, 김성일(金誠一)을 좌도 순찰사로 삼았다. 이는 대개 영남은 지역이 넓은 데다가 왜적들이 중로(中路)를 따라 진영을 연결하여 좌우가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우도의 사민(士民)들이 상소하여 김성일을 우도에 머물도록 해줄 것을 청하자, 김성일을 우도 감사로 삼고,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을 좌도 감사로 삼았다. 김면(金沔)과 김성일이 잇달아 죽으니 모여들었던 군병들이 대부분 흩어져 수습할 수 없었다. 한효순(韓孝純)이 김성일을 대신하였으나, 군정(軍政)이 김성일에 미치지 못하였는바, 최경회(崔慶會)가 거느린 군사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는데도 굶주리고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잇따랐다.
(14) 학봉일고(鶴峯逸稿) 부록 제3권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김성일[ 金誠一,1538 ~ 1593] ○ 임진년 8월 27일에 경상도 합천(陜川)의 진사(進士) 박이문(朴而文)과 안음(安陰)의 진사 정유명(鄭惟明) 등이 상소하여 김성일을 그대로 우도 감사로 삼아 우도를 안무(按撫)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토포사(討捕使) 한효순(韓孝純)을 경상좌도 순찰사로 삼았다. 이 때 여러 사신들이 모두 샛길을 통해 다녀서 큰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효순이 순찰사로 임명된 뒤에 항상 자포(紫袍)를 입고 나각(鑼角)을 울리면서 감사의 위의(威儀)를 성대히 차리고 다녔다. 그러자 각 고을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성 위에 올라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바라보았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부터 도로가 비로소 개통되었으며, 사람들이 그의 행차를 바라보고는 다시금 조정 관원의 위의(威儀)를 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15) 어우집(於于集) 유몽인[柳夢寅 1559~1623] 본문(本文) "於于 柳夢寅(1559·1623)의 詩文集 後集의 필사본이다. 8代 旁孫인 榮茂의 後敍에 의하면 1832년(純祖 32)에 前集 6卷 141帙, 後集 6卷 40帙이 간행되었으며 그 후 續集(年譜 1편, 野譚 4편 등)이 간행되었다 한다. 著者의 字는 應文, 號는 於于堂·艮齋·默好子, 본관은 興陽, 成渾의 문인. 1582년(宣祖 15) 進士가 되고 1589년 增廣文科에 장원, 1593년 文學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나 경박한 성품 때문에 스승의 책망을 받고 절교당하자 李爾瞻 등 大北派와 교유하면서 中北의 領首가 되고 成渾이 죽은 뒤 그를 모독하는 글을 써 비난을 받았다. 宣祖 말년에 黃海道 관찰사, 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1612년(光海君 4) 禮曹參判에 이어 吏曹參判이 되었다. 廢母論 때 李爾瞻과 대립, 이에 가담하지 않아 1623년(仁祖 1) 仁祖反正 때 화를 면했으나 柳應時의 告變으로 奇自獻·柳敬宗 등이 반란을 일으킨 李适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 하여 체포되자 楊州의 西山에 도피했다가 잡혀 아들 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朝鮮中期 說話文學의 大家였으며 篆書·隸書·楷書·草書에 모두 뛰어났다. 卷頭에는 盧守愼, 柳成龍, 尹根壽, 權擘, 李廷龜, 車天輅, 權鞈, 申欽, 車雲輅, 洪瑞鳳 등의 간략한 詩文批評이 들어 있는데 柳成龍은<文氣高勁, 有洪波砥柱之勢>라고 평했다. 卷1·2:詩 382수(卷1 165수, 卷2 217수). 이들 시는 布衣錄·關東錄·朝天錄·拾遺錄 등 17항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시기별 또는 내용별로 나눈 것이며 編次가 정연하다. 卷3:序 35편(送李而立尙信赴賀冬至于燕京序, 皇華集序, 題金得之大德令公詩卷後詩序 등). 卷4:記 19편(甘露亭記, 自娛窩記, 恥齋記, 任實東軒重修記, 燕京沿路可遊者記 등), 應製文 8편(敎鄭汝昌家廟書, 敎黃海觀察使柳永詢書, 敎全羅道觀察使兼巡察使韓孝純書 등), 文 4편(祭李台徵壽俊文, 西江村民祭癘疫文, 免宴禮部初度文 등), 書 6편(與崔參議鐵堅書, 奉崔牛峰生員行衢二兄弟疏 등), 題跋 6편(題詩經鄭衛風後, 撰集廳三綱行實跋 등). 卷5:墓道文 16편(王考司諫院司諫府君墓碑陰記, 皇考濟用監主簿府君墓碑陰記 등), 列傳 6편(節婦安氏傳, 孝子李至男傳 등), 哀辭 4편(哭尹生哀辭 등), 雜著 2편(安邊三十二策贈咸鏡監司韓益之浚謙, 承政院紫檀書板銘). 卷6:雜識 11편(遊頭流山錄, 解辨, 十三山辨, 工拙辨, 館試策題, 式年殿試策題, 禮羅賦, 一士與天爭賦, 擬宋朱陽祖進八陵圖表, 鳥籠二章 등), 附錄으로 祭文, 獻議, 謚狀 등이 첨부되어 있다. 끝에 후손 柳榮茂의 跋이있다. <安邊三十二策贈咸鏡監司韓益之浚謙>은 柳夢寅이 巡撫御史로서 咸鏡南北道를 두루 살펴본 뒤 監司 韓浚謙에게 바친 安邊策으로 賦稅·屯田등 변방, 또 지방행정에 관한 32개 조항과 그에 관한 설명이 들어 있다. 前集은 詩·序·記·應製文·疏箚·書·文·墓道文·行狀·哀辭·列傳·題跋·雜著로 되어 있다 하며 중요한 史料이다. 설화문학인 ≪於于野譚≫은 여기에 수록되지 않았다.
(16)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8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유원[ 李裕元, 1814 ∼1888] 장악원(掌樂院)의 사연(賜宴) 광해군 7년에 장악원에서 잔치를 베풀어 한결같이 고사(故事)대로 하여 음악을 하사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당시의 재상으로서 잔치를 주도하고 지신사(知申事) 이덕형(李德泂)이 중사(中使)와 함께 참석하였으며, 판중추부사 한효순(韓孝純)ㆍ노직(盧稷), 참찬 윤승길(尹承吉), 판서 이준(李準), 지사(知事) 이시언(李時彦)이 함께 자리하였다. 난막(㡩幕)과 채화(綵花)의 성대함에 기악(妓樂)과 찬품(饌品)의 풍성함이 자못 인간 세상의 일이 아니었다. 서금(犀金)이 빛을 내고 잠화(簪花)가 모자에 얹혀 있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서로 더불어 일어나 춤을 추니 소리와 음악이 하늘까지 울려 퍼졌다. 잔치를 끝낼 때가 되니 연등(蓮燈)이 앞에서 인도하고 가관(歌管)이 뒤에서 옹위하였는데, 구경하는 자들이 떠들썩하게 모두 말하기를, 신선(神仙)과 같다고 하였다.
(17)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2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유원[ 李裕元, 1814 ∼1888] 좌우 감사(左右監司) 임진년의 왜란 때에 또 경기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성영(成泳)이 좌감사(左監司)가 되고 이정형(李廷馨)이 우감사(右監司)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도로 혁파하였다. 또 경상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한효순(韓孝純)이 좌감사가 되고 김수(金睟)가 우감사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도로 혁파하였으며, 을미년에 또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다가 병신년에 도로 혁파하였다.
(18)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이유원[ 李裕元, 1814 ∼1888] 외조손(外祖孫)이 정승이 된 사람들 심온(沈溫)과 외손 노사신(盧思愼), 이원(李原)과 외손 윤호(尹壕), 박은(朴訔)과 외손 어세겸(魚世謙), 송일(宋軼)과 외손 홍섬(洪暹), 정유길(鄭惟吉)과 외손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유홍(兪泓)과 외손 김자점(金自點), 신흠(申欽)과 외손 조사석(趙師錫)ㆍ박세채(朴世采), 한효순(韓孝純)과 외손 여성제(呂聖齊), 여성제와 외손 오명항(吳命恒), 김육(金堉)과 외손 서문중(徐文重), 원두표(元斗杓)와 외손 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심지원(沈之源)과 외손 이집(李㙫), 이행원(李行遠)과 외손 유봉휘(柳鳳輝), 민정중(閔鼎重)과 외손 홍치중(洪致中), 이집과 외손 서명선(徐命善), 김구(金構)와 외손 서지수(徐志修), 민진원(閔鎭遠)과 외손 이은(李溵), 김약로(金若魯)와 외손 박종악(朴宗岳), 박종악과 외손 조두순(趙斗淳)이다.
(19) 임하필기(林下筆記)제30권 [춘명일사(春明逸史)] 이유원[ 李裕元, 1814 ∼1888] 만년에 상신에 제수된 사람들 권중화(權仲和)는 83세에 정승이 되었고, 허목(許穆)ㆍ윤증(尹拯)은 81세, 유관(柳寬)ㆍ강순(康純)은 79세, 장순손(張順孫)ㆍ정호(鄭澔)는 78세, 정인홍(鄭仁弘)ㆍ김상헌(金尙憲)ㆍ권상하(權尙夏)는 77세, 구인후(具仁垕)는 76세, 권진(權軫)ㆍ심수경(沈守慶)ㆍ이헌국(李憲國)ㆍ이홍주(李弘胄)는 75세, 한효순(韓孝純)ㆍ서매수(徐邁修)는 74세, 목내선(睦來善)ㆍ이완(李浣)은 73세, 김상용(金尙容)ㆍ서경우(徐景雨)ㆍ남이웅(南以雄)ㆍ조상우(趙相愚)ㆍ최규서(崔奎瑞)ㆍ정만석(鄭晩錫)은 72세, 조익(趙翼)ㆍ이경일(李敬一)ㆍ이서구(李書九)는 71세, 심덕부(沈德符)ㆍ허조(許稠)ㆍ하연(河演)ㆍ윤호(尹壕)ㆍ이기(李芑)ㆍ정탁(鄭琢)ㆍ심열(沈悅)ㆍ김육(金堉)ㆍ이시백(李時白)ㆍ윤지선(尹趾善)ㆍ임한호(林漢浩)는 70세에 정승이 되었다.
(20)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갑인년(1614, 광해군 6)] 저자/미상 ○ 15일 정사가 있었는데, 한효순(韓孝純)을 판중추부사에, 김치(金緻)를 대사간에, 유활(柳活)을 지평에, 박노(朴)를 정언에, 이홍망(李弘望)을 사간에 제수하였고, 전라 감사 이경전(李慶全)은 김응벽을 잡은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하였다.
(21)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을묘년(1615, 광해군 7)] 저자/미상 ○ 25일 정사에, 이조 판서 조정(趙挺)이 상중(喪中)이므로 그 대신으로 박홍구(朴弘耈)ㆍ유희분(柳希奮)ㆍ한효순(韓孝純)ㆍ박승종(朴承宗)ㆍ이이첨(李爾瞻)ㆍ오억령(吳億齡)ㆍ박건(朴楗)을 천망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아울러 우상(右相)에게 물어서 상의하라.”하였다. 다음 정사에, 김질간(金質幹)을 집의에, 남이준(南以俊)을 사간에 제수하였다. 이조 판서의 천망에, 박홍구(朴弘耈)ㆍ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ㆍ한효순(韓孝純)ㆍ이이첨(李爾瞻)ㆍ박건(朴楗)ㆍ오억령(吳億齡)이 들었고, 이형(李覮)을 대사헌에, 유인길(柳寅吉)을 대사간에, 금개(琴愷)를 장령에, 이위경(李偉卿)을 정언에, 양시진(楊時晉)을 지평에 제수하였다.
○ 2일 숙의(淑儀)가 될 처녀로, 찰방 김종해(金宗海), 수사 김전(金全), 선전관 구인후(具仁垕), 판관 홍매(洪邁), 진사 임근(任僅), 인의 심협(沈浹), 참봉 윤승현(尹承賢)ㆍ김덕망(金德望)ㆍ심천수(沈天授), 유학 심숙(沈俶), 판서 한효순(韓孝純), 생원 윤홍업(尹弘業), 현감 성여발(成汝撥) 등의 딸을 낙점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이 낙점한 처녀 외에는 모두에게 혼인을 허가한다.” 하였다. 가도사 4명이 전교를 듣고 나갔다.
○ 1일 이조 판서 한효순(韓孝純)의 차자는 대개, ‘매제인 경희가 바야흐로 국문을 받는 중이므로 사직한다’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차자의 사연은 잘 알았으니 안심하고 사퇴하지 마오.” 하였다. 친국하였는데, 죄인 황난수는 한 차례 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고, 조연(趙連)과 윤세헌(尹世獻)을 대질시킨 뒤에 윤세헌은 놓아보내고, 양시진과 윤길을 대질시킨 뒤에 윤길은 한 차례 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지 않고, 신경희와 소명국을 대질시킨 뒤에 경희는 한 차례 형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22) 응천일록 1(凝川日錄一) [병진년(1616, 광해군 8)] 저자/미상 ○ 6일 정사가 있었는데, 정창연(鄭昌衍)ㆍ박승종(朴承宗)ㆍ윤근수(尹根壽)ㆍ홍진(洪進)ㆍ이광정(李光庭)ㆍ유근(柳根)ㆍ유희분(柳希奮)ㆍ한효순(韓孝純)ㆍ이상의(李尙毅)ㆍ이이첨(李爾瞻)을 복상(卜相)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대개, “한효순(韓孝純)은 준겸(浚謙)의 숙부로서, 역적의 무리에게 눈짓하며 이번 수의할 때를 당하여 입치(立幟)할 소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어찌 몰래 망극한 일을 감싸는 말을 혐의로 삼아서 인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양사를 모두 명하여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 하였다.
(23) 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정사년(1617, 광해군 9)] 저자/미상 26일 합사하여 기자헌의 일을 아뢰었다. 옥당의 차자는, ‘공론을 쾌히 좇으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내가 매우 불행하여 이 큰 변고를 만났으니, 귀로 듣고 싶지 않고 어찌 할 바도 몰라 매우 근심스러울 뿐이다. 이런 때에 어찌 대신의 죄를 다스려서 나의 부덕함을 겹치게 할 수 있으랴? 다만 대신이 논핵을 받았으니, 일의 형세가 출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걱정스럽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정승의 직을 오래도록 비워둘 수는 없으니, 체차하라.” 하였다.
생원 진호선(陳好善)의 상소는 대개, ‘삼사의 계차(啓箚)를 즉시 윤허하지 아니하여, 사당(邪黨)이 딴마음을 내고 이의(異議)가 더욱 성행하니, 빨리 명하여 기자헌을 잡아다가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되, 의정부에서 수의할 적에 이론(異論)한 사람과 협(浹)의 공초에서 인증된 당역(黨逆)의 여러 재신을 먼저 죽이거나 귀양보내고, 이어 이항복을 참수하여 신하로서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의 경계로 삼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유학 한천정(韓天挺) 등의 상소는 대개, ‘자헌의 차자가 유생의 상소를 배격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으나, 서궁을 위해 충성을 다한 정상은 환하여 가릴 수 없다. 감히 하나하나 분석하여, 그의 간사함을 깨뜨리고 이어서 그의 머리를 베어 효수함으로써 신하로서 나라를 저버리는 자의 경계로 삼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합사가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이미 체직하였으니, 번거롭히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합사가 삼차 아뢰고, 옥당이 두번째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고집하여 논하니, 파직하라.” 하였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네번째 정사를 입계하였더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27일 유학 김정량(金廷良)의 상소는 대개, ‘큰 일은 지연할 수 없는데, 한효순이 어찌 끝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되, 만약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기자헌과 함께 참수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더니, 비답하기를,
“합사가 앞서 계(啓)한 대신은 그 직을 이미 파면하였으니, 책벌이 이미 행해진 것이다. 어찌 꼭 위리안치를 해야만 하겠는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25일 의정부 회의에서 제신(諸臣)들이 올린 단자를 정부의 당상으로 하여금 수를 세어 봉입하라.” 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대개, ‘빨리 기자헌의 흉악한 차자를 불태워서 뒷사람의 의심을 없애고, 빨리 공론을 따라서 신민(臣民)들의 분을 풀어 주라’는 것이었고, 또 올린 차자의 대개는, ‘원로을 등용하여 공경히 현인을 맞이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은 합사의 신계(新啓)와 같았다. 또 비답하기를,
“서서히 처치하겠다.”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는 대개, ‘급속히 어진 정승을 새로 간택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국을 진압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서서히 처치하겠다.” 하였다. 합사하여 두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노라.” 하였다. 세 번째 아뢰니, 비답하기를,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라.” 하였다. 옥당이 재차 차자를 올렸더니, 비답은 합사에서와 같았다.
3일 유학 이국광(李國光)의 상소는 대개, ‘역적을 토죄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유학 서의중(徐義中)의 상소는 대개, ‘유희발은 세렴을 사주하여 대론에 화의 단서가 생기게 하였는데도 오히려 징계하지 않고 뻔뻔하게 정치에 참여하고, 양사의 많은 관원들은 위엄과 권세에 겁내어 잠자코 한 마디 말도 없으니, 먼저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양사의 죄를 다스리고, 빨리 기자헌을 참수할 것이며, 이어서 유희발을 다스려서 대론을 정하고 종묘 사직을 편안케 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기로(耆老) 이숭수(李崇壽) 등 및 시민들의 상소는 대개, ‘빨리 화근을 없애어 종묘사직을 편안케 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행 상정(行司正) 표헌(表憲) 등의 상소는 대개, ‘대론이 이미 발하였으나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하였으니,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장점을 좇아 처치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군기 부정 정문진(鄭文振)의 상소는 대개, ‘시비를 정하고 공론을 밝혀 먼저 기자헌의 머리를 베고, 그 다음 역적을 두둔한 뭇 간인들을 다스리며, 서궁의 휘호(徽號)ㆍ시위(侍衛)ㆍ봉진(封進) 등의 일을 빨리 명하여 삭감 철폐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유학 황정필(黃廷弼)의 상소는 대개, 《춘추》의 의리를 가지고 이 반역의 무리를 처단하되, 기자헌ㆍ한효순ㆍ김세렴ㆍ이항복ㆍ박홍구(朴弘耈)ㆍ민형남(閔馨男)ㆍ정홍익(鄭弘翼) 등을 빨리 삼사의 청을 좇아서 종묘사직을 편안케 하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합사와 옥당이 전의 일(기자헌을 죽이라는 것)로 계(啓), 또는 차자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어찌 반드시 위리안치해야 할 것인가? 비록 위리안치를 않을지라도 가하다.” 하였다. 합사가 재차 아뢰고, 옥당이 재차 차자를 올리니,
“이미 말했노라.” 비답하였다. 삼차의 계는 서의중(徐義中)이 상소하여 피혐하였기 때문에 연계(連啓)하지 못하였다
(24) 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무오년(1618, 광해군 10)] 저자/미상 12일 유학 윤노(尹魯)의 상소는 대개, ‘의로운 일을 곧 거행하지 않고 지연시킨 한효순(韓孝純)의 죄를 먼저 다스리고, 그 다음 한효순을 비호한 삼사의 죄를 다스리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진사 하인준ㆍ민심ㆍ정기(鄭淇)ㆍ김상하(金尙夏) 등의 상소는 대개, ‘종사와 군부를 위해 대궐에 엎드려 소장을 연달아 올려서 화의 근본을 제거하려 하였는데, 어제 원궤(元簋)의 처소에 전한 흉서를 보았더니, 흉서 가운데 신들 네 사람의 서명이 들어 있고, 예조 판서 이이첨ㆍ참찬 허균ㆍ승지 김질간(金質幹)ㆍ수찬 서국정 등의 성명도 모두 거론하여 역모로써 무고하였으므로 감히 흉서를 봉입하니, 청컨대 원궤를 나문하여 흉서의 출처를 핵실하여 신들의 지극한 원통함을 씻게 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서궁의 일로 백관ㆍ삼사ㆍ종실이 삼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관학 유생 이정(李挺) 등의 상소는 대개, 서궁의 일에 관한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정신들이 하루에 세 번씩 진정하여 청하니, 너희들은 아울러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학 박홍익(朴弘益) 등의 상소는 대개, ‘흉서의 곡절을 보았다.’는 것이었는데, 입계하였다.
(25) 수산집(修山集)卷之十四 이종휘 [李種徽, 1731 ∼ 1797] 漫筆(만필) 神器秘訣 〭 卽 近世兵家 論 火器 者。其 下 雜引 諸 兵書。頗 有 裨益 於 今日 者。攷 其 卷 弁。則 乃 昏 朝 相 韓孝純所述。以 韓 之 庸 瑣 憒憒 者 而 能 有 此。先輩 之 不可 慢 如此。
역문(譯文); 신기비결이라는 책은 즉, 근세의 병법의 전문가가 화기에 관하여 논술한 것이다. 그 책에는 여러 병술서적들을 끌어 들여 놓았는데, 오늘 날에도 자못 유익함을 더하는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을 상고하여 보면, 이는 곧, 혼미한 조정의 재상 한효순이 저술한 책이다. 한공의 떳떳하고 섬세함이, 능히 이런 책을 저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선배의 게으를 수 없음이 이와 같았다.
<미 번역 문집>
(1) 초간집(草澗集) 草澗集年譜 草澗先生年譜 권문해 [權文海, 1534~1591] ...似無後獘云云。閏二月。論啓獨對之弊。因自劾請罷。兵判李珥入侍啓曰。臣欲陳所懷。請於燕間賜對。司諫權克智以未卽紏正。欲避嫌。先生曰。人臣自請獨對。果似有後獘矣。權公卽與掌令黃暹。極陳獨對之獘。上震怒。下嚴批。先生與正言韓孝純自劾曰。臣等之見。與克智無異。而昨日處置克智之時。不爲引嫌。若初不相干者然。臣之所失尤重。請命罷斥云云。十一日。朝講。講罷。先生因奏曰。臣等濫叨諫諍。昵侍經幄。而素乏學識。無補聖...
(2) 율곡전서(栗谷全書) 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 經筵日記三○起今上十年丁丑。至 十四年辛巳。凡五年。 萬曆九年辛巳○今上十四年 이이 [李珥, 1536~1584] ...。上曰。雖不用孝元。豈無可用之人乎。珥曰。一人之用舍。雖非大關。而但東西之說未消。則士類相顧疑忌。無有妥帖時也。自上必須洗盡東西。使無毫髮痕迹可也。孝元若無才氣。則棄之何惜。今者孝元之才可用。而乃牽於東西之說不用。則甚爲士類不安之根本矣。副提學柳成龍, 修撰韓孝純。亦及覆陳達孝元可用之狀。玉堂至於箚論。而上終不釋然也。○黃海道旱災。無異去年。民又阻飢。新監司安容將赴任。上問大臣曰。黃海又歉。安容非...
(3) 송강집(松江集) 松江別集卷之四 附錄 行錄 정철 [鄭澈, 1536~1593] ...。則乃不吉人也。如公之爲人。金河西, 退溪, 栗谷, 牛溪, 思菴, 先君子, 李土亭, 奇高峰, 趙重峰, 柳希春, 李後白, 具鳳齡, 辛應時, 洪聖民, 李海壽, 尹根壽, 李山甫, 朴枝華, 朴洲諸君子好之。如鄭仁弘, 李潑, 鄭汝立, 李山海, 李爾瞻, 李弘老, 李慶全, 韓孝純, 許鏛, 宋言愼, 洪汝諄, 許篈, 宋應漑, 申慶禧, 朴謹元, 宋瑄, 尹三聘, 沈憬, 金佑成, 任...
(4) 건재집(健齋集)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五 白沙記事 김천일[金千鎰.1537~1593] ...營。隨行通使李愉悅。稱淸正力主此事。言於秀吉。期於必陷晉州而後已。行長力止之。不聽。故是行也秀家行長, 三盛, 吉繼等不往。義智在應往之中。亦止不行。行長送游擊于梁山。把手爲別曰。我力止淸正猶不回。然止於晉州而已。保無他憂也。金命元與巡察使韓孝純見惟敬曰。晉州事急。願盡力救之。惟敬曰。與行長終日終夜懇懇言之。行長之意亦然。但其勢已成。終不回。奈何。無他策。只欲晉州諸將。空城少避。而不從吾言。奈何。...
(5) 건재집(健齋集)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五晉州敍事 김천일[金千鎰.1537~1593] ...關伯旣慕天朝而納貢。汝等何向晉州而攻圍。今日進退之間。利害所關非細。三思自審。免悔噬臍。賊不聽。沈惟敬力說行長使止之。行長曰。今日之擧。吾無所預。惟淸正力主此議。開喩百端。而猶不回。不如先自空城。以快其情而已。及惟敬還都元帥金命元巡察使韓孝純謂曰。晉州事急。願老爺力救之。惟敬曰。彼因去歲失志於此。是以憤恨。銳意再擧。今無他策。只令諸將。一如行長所言也。時官軍義兵。俱在咸安等地。倡義使金公千鎰謂諸將...
(6) 백암집(柏巖集) 栢巖先生文集卷之五 狀啓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김륵 [金玏, 1540 ~ 1616] ...絶。雖寇賊據城之邑。皆設伏兵於山谷。而其稱義兵者亦多。故射中而殪之者。列邑皆然。但不能全隊盡捕。難於斬首。故獻馘之數則不多。都付兵使。覈實啓達。第以我國長技。莫如弓箭。而各官軍器。擧皆蕩失。至於軍人之自持者甚鮮。而亦皆不合於用。旣無所入之資。措備之勢。亦爲甚難。寧海上北道入送箭竹。因各官所報。已令輸用。竝與數爻。當隨後開錄稟達。長箭四十部。則府使韓孝純竝爲輸送。故亦置此待變。而軍糧則當變之初。公私...
(7) 백암집(柏巖集) 栢巖先生文集卷之五 狀啓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김륵 [金玏, 1540 ~ 1616] ...防守者。將欲鎖竹嶺以西之重險。完豐基以下之一帶。而今則賊亦乏食。累垂頑涎。分遣國人之投入者。探見積穀聚軍之處。其闌入之勢。難保其必無。人心痛迫。將決一戰。而利害相牽。久未得成。臣自下道還到安東。則兼巡察使韓孝純與兵使朴晉同在一處。臣問其圍勦之策。則朴晉言親到賊巢近處。觀其形勢。非徒地甚坎險。不宜於行軍。聞慶尙州之賊。若蹙其後。則我軍似無得脫。是以爲難。又令虞侯權應銖探視其可否。則亦如此云云。在今不...
(8) 백암집(柏巖集) 栢巖先生文集卷之五 狀啓 條陳慶尙道軍情賊勢狀啓 김륵 [金玏, 1540 ~ 1616] 臣自承軍糧措置之命。大事當前。料理極緊。周行列邑。勸諭民人。前後所得納粟米。僅足千餘石。又與兼巡察使臣韓孝純相議。分徵私儲於民間而總計之。亦不下納粟之數。臣竊念人民飢頓。擧將塡壑。所當登時散給。濟其死命。而皇朝馳兵遐海。大拯塗炭。恢復之勢。亶在此擧。不可他用。以乏軍興。姑就其見在之數。除出少許。隨便賑活。而因置所納之邑。以爲餉軍之需。今者劉總兵,吳遊擊等諸軍。方住尙州。當涉累日。此站支供。乃右道所...
(9) 한음문고(漢陰文稿) 漢陰先生文稿卷之九 呈文 呈楊經理文 이덕형 [李德泂, 1566~1645] ...殺掠人民。長城及蘆嶺等處。賊徒充滿等因。節據哨探人等說稱。全羅道人民。多欲倡起鄕兵。勦捕零賊。而本道節度使李福男戰死之後。各兵散潰。未易收合。若得天兵一枝進駐羅州近處。作爲聲勢則遠近之民。必將聞聲來赴等因。又據體察副使韓孝純報稱。職收聚官民大小船四十四隻。分爲四起派定差官。初起差官德山縣監金用礪,二起差官所斤浦僉使張彥平,三起差官馬梁僉使呂卿軸,四起差官唐津浦萬戶金夢龍。鱗次督送江華等因。又據兵曹...
(10) 추포집(秋浦集) 秋浦先生集卷之一 啓辭 憲府請還收韓孝純等加資罷李山輝啓 황신 [黃愼, 1562 ∼ 1617] 爵賞公器也。上不可虛授。下亦不敢虛受。苟失其當。則終歸於私濫。而非所以爵人於朝之意也。咸鏡監司韓孝純。纔被方面之寄。旋下增秩之命。崇班重加。是何等爵名。而無故混施於不當施之地乎。設令孝純。他日北門有可酬之勞。則復以何賞加之。近來爵賞之濫。最爲疵弊。而至於崇品。則猶不敢輕施者。其意有在。此命一下。物情駭異。請還收成命。以重名器。靑城僉使李繼善。履歷最淺。別無已試之效。而遽陞堂上之職。政體顚倒甚矣。雖...
(11) 인재집(訒齋集) 訒齋先生文集年譜 [年譜] 訒齋先生年譜 최현 [崔晛, 1563년 ∼1640년] ...知薦在何時。然先生筮仕在癸巳。恐是薦在亂前。未及擧行。而始擬於翌年爾。夏。島夷入寇。連陷三都。大駕播遷龍灣。先生與一鄕同志倡起義旅。推盧公景任爲義兵將。朴公遂一爲副將。先生爲掌書。 有鄕兵約束文及通開寧義兵文 八月。避亂寓義城申姨兄仡家。○與兵使朴晉書。請先討豐山賊。○九月。上右巡察鶴峯先生書。論禦敵。○十月。爲善山鄕兵。呈左巡察韓孝純書。乞軍器。○十二月。與韓巡察書。論軍機。○哭曹夫人二十一年癸...
(12) 우복집(愚伏集) 愚伏先生文集卷之六 疏箚 辭起復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伏以臣於前月二十六日。得慶尙道巡察使韓孝純公移。恭審聖旨以時事艱虞國書塡委。勅令臣不得顧私服。速入都下。與贊辭命之事。臣聞命以來。惶悸震越。寤寐不寧。進退罔措。不得不號呼於君父之前而冀蒙裁宥也。天降大割。國有外侮。冕旒蒙塵。宗社僅存。此誠臣子遑遑汲汲捐軀赴急之日。而一家私情。容或有不可計者矣。第以臣乃天地間一罪人也。將母不善。致罹兇鋒。而身不能死。讎不能報。權厝荒山。未得永窆。日月逾邁。再期將迫。...
(13) 사류재집(四留齋集) 四留齋集卷之八 [年譜] 行年日記[上] 이정암 [李廷馣, 1541~1600] ...曰。李某雖無弓馬之才。隨機應變。不在人後。仍遣爲當云。○六月。辭朝到尙州。賃舟由洛東江。倍日趲程赴任。時監司柳永立任滿。權克智代之。都事許昕。○是年冬。日本國使橘康廣出來。言新國王平秀吉。廢前王。發兵平定諸島。欲與我國修好。請遣通信使。爲此而來云。宣慰使柳根下來迎接。朝廷以通信使不送。殆百有餘年。今難開端。不從其請。其還也。宣慰使韓孝純下來。自乙酉以後。倭國因內難。諸殿巨酋。絶不往來。余到任之後。...
(14) 지헌집(芝軒集) 芝軒先生年譜 年譜 芝軒先生年譜 정사성 [鄭士誠, 1545~1607] ...關。風餐露宿。過安東鄕家而不入。詳見日記。行到堤川。報湖西伯。還向嶺南。權奉于禮安柏洞書堂。踰竹嶺。聞大駕西狩。道路梗塞。卽以晬容奉避狀。馳報忠淸監司尹先覺。自原州,平昌。轉向嶺南。至禮安。奉安于退溪書堂。本道監司韓孝純。來到奉審。以竭忠奉避之意。啓達于肅川行朝。○金柏巖玏狀啓略曰。集慶殿參奉鄭士誠,洪汝栗等。陪奉御容。指向都城。行至原州。賊已踰嶺。道不得通。還到禮安。臣馳進同縣。見縣監申之悌問之...
(15) 지헌집(芝軒集) 芝軒先生文集卷之四 附錄上 行狀[李象靖] 정사성 [鄭士誠, 1545~1607] ...夷發難。陷萊,釜。東都朝夕且危。同任洪汝栗欲埋置御容。公毅然曰。此臣子所不忍爲。不如陪向京城。若有擅動之罪。吾請自當。遂間關顚頓。過鄕家不入。行到堤川郡。聞大駕西狩。道路梗不通。卽馳報湖西伯。還向嶺南。權奉于退溪書齋。本道監司韓孝純來到奉審。啓達于行朝。甲午。吏曹啓曰。鄭士誠與洪汝栗保護御容之功。實爲一體。而監司奉審之日。鄭士誠留奉安所。洪汝栗隨往安東。修啓時。只書渠官銜姓名。而脫漏鄭士誠姓名。以...
(16) 지헌집(芝軒集) 芝軒先生文集卷之四 附錄上 墓碣銘[金是瓚] 정사성 [鄭士誠, 1545~1607] ...丁亥。擧遺逸。除泰陵郞。己丑。辭歸。辛卯。又肅集慶殿之命。翌年。倭變作。邊臣皆死之。殿在東都。賊朝暮且至。同僚欲埋置御容。公曰。臣子何敢忍。當陪向京城。若擅動爲辠。吾自當。遂陪護向京。過鄕家不入。間道至堤川郡。聞上西狩。道不通。乃還向嶺南。時守僕仗卒。皆中道散。間關頓踣。權安于禮安之柏洞書堂。凶焰得不及。道臣韓孝純來審。啓達行朝。甲午。天官白其勞。超內贍簿。仍監楊口縣。未幾。以親老賦歸。築芝山之陽...
(17) 오리집(梧里集) 梧里先生續集卷之二 狀啓 四道都體察使時狀啓[十二月初七日]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十月。丞召還朝。十月復南下。開府星州。多發舟師。攔截海路。爲今日急務。而舟師寡弱。不能成形。至爲悶慮。今令副察使韓孝純馳到兩湖。船隻格軍軍粮及過番闕軍抄發等事。便宜措置。火急入送。而措置間拘碍事。則直爲狀啓施行。分付以送。舟師之勢稍成後。李舜臣自欲橫截釜山之路。別定他將。分駐閑山及全羅海路事。啓下備邊司。
(18) 오리집(梧里集) 梧里先生續集卷之二 狀啓 四道都體察使時狀啓[二月初一日]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我國所恃。惟在舟師。而淸賊之渡。失其機會。以軍法論之。舟師之將。當不免其罪。誠如下諭。第以事勢言之。湖嶺沿海。自壬癸以後。以舟師之故。不特水軍散亡。村民亦皆蕩析。一帶地方。幾至空曠。臣以此意。前後狀啓。非止一再。海陣待變。已至五載。船隻櫓格之比前減損。理勢固然。雖欲督發。常加整齊。其道無由。而忠淸道,全羅右道之船。則冬月例爲放送。閑山留泊之船。其數尤少。以此數少之船。勢難邀截洋中。副使韓孝純自上年...
(19) 오리집(梧里集) 梧里先生續集卷之二 狀啓 四道都體察使時狀啓[四月二十一日]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必先以舟師橫截海路。使衆賊不得渡海。粮餉無以繼。然後進陣據險。迭出奇兵。左右侵軼。而天兵在後爲之聲援。賊有所忌而不敢衝斥。則彼勢必窘。或可以行吾計。但舟師格軍。調集極難。時到船數。猶不滿數百。則以此亦難於橫截。反覆思量。未得善策。以今日時屯賊勢觀之。則大衆未渡之前。必未能發動。帝錫山入防湖南之軍。量宜移屬於舟師。充格於新造無軍之船。限日輪番。以添兵勢。則庶可以爲。故臣使權慄馳往副使韓孝純所在處。...
(20) 오리집(梧里集) 梧里先生續集附錄卷之二 行狀 行狀[權愈]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侍。上講問備禦䇿。諸將能否。已曰。上有天朝。下有卿。賊不足憂也。公進曰。今兵革久未已。國人蒿焉有遠心。保民之政。臣爲殿下急之。願上無忘在灣時。務節省以綏民。上嚮納之。公至星營。見賊之復擧心。於我奏上可。許令統帥李舜臣領舟師截釜山路。部諸將。分守閑山及南海傍衝要地。密言統帥。令遉剌淸正。遣副使韓孝純。發兩湖戰船及軍食。急輸之諸兵所。命列郡淸野乗城。丁酉春。淸正憚李舜臣。不敢渡海。欲以計誤舜臣。使平行...
(21) 오봉집(五峯集) 五峯先生集卷之十 敎書 敎慶尙道義兵將濟用監正鄭仁弘,陜川郡守金沔等書。 이호민 [李好閔, 1553~1634] ...色。秋晴路乾。政屬擒胡之月。馬肥弓勁。實是殺賊之期。鐵馬亘於大定,淸川。舸艦聯於登萊,江浙。狂寇惡積。天誅當加。況我義兵烈士之徒。竝在畿,黃,忠淸而起。在處斬馘。逐日獻功。寔賴天地默佑而然。此是宗祊再造之會。緬爾多士。更勵精忠。聞金誠一駐居昌。韓孝純保寧海。就加左右道觀察,巡察等使。號大小義兵將等。幷除職有差。爾其就聽節制。亦宜交參籌謀。邀賊歸途。可以躡擊其尾。偵賊屯所。可以夜斫其營。遙制爲難。相...
(22) 오봉집(五峯集) 五峯先生集卷之十二 奏文 陳奏奏文 이호민 [李好閔, 1553~1634] ...來。俺訪得。本月十九日。豆毛浦屯賊。焚掠本府地面。多被我兵殺死。以此恠恨。伊酋俱來商議。將要大勢報復。又據走回婦人玉眞說稱。本年九月十一日。被賊搶去。前到林郞浦營裡留住。聽得本賊休養兵馬。等待明年春汛。將要順搶全羅地面等因。又該本月內。陪臣慶尙道觀察使韓孝純馳啓。左道東菜,機張,釜山浦,西生浦,林郞浦,仇法谷。右道金海,熊川,加德,德橋,竹島等處留住諸賊。如前充斥。而巨濟縣地面。賊徒尤多聚集等因。...
(23) 금역당집(琴易堂集) 琴易堂先生文集卷之二 疏箚 六條疏 [裵龍吉, 1556~1609] ...官。軍官之絡繹於道路者。侵暴民吏。極其欲而後已。大臣以下。不知此弊。少有不及則追究官吏。無有紀極。守令何暇於恤民乎。而況擇吏之際。以討賊爲辭。無問賢否。惟取弓馬則無知武夫。自謂得時。或爲妻子之奉。或爲窮乏得我。托公營私。盡徵新舊之稅。兼收負租。則民困極矣。間有恤民者。少有縱舍。如以一杯水救車薪之火。恐亦未能大有所濟。而生民之禍。愈深愈酷矣。如巡察使韓孝純。禦侮之才。有愧於方叔。澄淸之志。不及於范滂...
(24) 백사집(白沙集) 白沙先生別集卷之一 啓辭 [舟師事宜啓] [李恒福, 1556 ~ 1618] ...我師之後。尤不可不慮也。此外又有萬萬難便者。盖壬辰變後。湖南沿海之民。一隷舟師。非死不還。加以遠離本土。設陣於閑山嶺南之地。至今湖南之民。視舟師爲鬼窟。軍情如此。故往在丙申丁酉年間。朝廷督令統制使。進陣於見乃梁之外。屢度促之。而舟師不敢離閑山一步者。非惟安骨,加德以下海路形勢難以設陣。抑且湖南軍情。進一步則加一苦。加一苦則潰散立至。故因軍情相地宜。躑躅而不敢進者。政以此也。今全羅廵察使韓孝純。與統...
(25) 동강집(東岡集) 東岡先生文集卷之八 箚 請廣開言路箚 김우옹 [金宇顒, 1540 ~ 1603] 伏以殿下躬上聖之資。抱高世之智。而能自降屈。延禮草茅。引接周之。恩意隆厚。及其貢疏納忠。誠激辭切。而曲賜優容奬諭而嘉納之。其於下士來諫之道。亦可謂無憾矣。至於事渉更革者。重於遽施。而欲加商量。固無不可。然臣等至愚。三復聖諭。終有所未解者二焉。不敢緘黙以負殿下。請試言之。臣等聞古之明王。旣已選建賢能。列位公卿。而委任責成矣。猶懼其未也。則又有風憲之地。諫諍之臣。彈劾官邪。斥刺政疵。以警其不及。猶懼其...
(26) 동강집(東岡集) 東岡先生文集卷之八 箚 論金孝元擬司諫箚 김우옹 [金宇顒, 1540 ~ 1603] 伏以頃日。銓曺以金孝元擬於副諫。而上敎以爲致朝廷不靖者。皆非也。臣等於此。固有以知聖念務欲安靖朝廷而然也。雖然。竊伏思惟。似亦有未安者。不敢無說。惟聖明察焉。夫國之設官。非爲其口實。臣之事國。惟貴於直道。茹柔吐剛者。渾世同流而鮮後災。當事匪躬者。孤立屢憎而多致患。所以明王包容孤直而奬進狷狂。非爲人臣之利。乃國家之長計也。今孝元非有懷私僨事之失。只欲當官盡職而孤立致患耳。其是非曲直之實。聖鑑所明燭。...
(27) 동강집(東岡集) 東岡先生文集卷之十四 經筵講義 經筵講義 김우옹 [金宇顒, 1540 ~ 1603] ...。上下豈可相持。願速賜睿斷。應南言趙穆。李滉高弟。白首窮經。尤邃易學。可除正職。召之使出入經筵。上可之。因問東方易學。應南言李滉作啓蒙傳疑。金安國知易學。金正國門人鄭之雲作天命圖說。李滉有辨論云云。又言韓浚謙韓伯謙及參判韓孝純。皆知易云。乙未正月二十五日。晝講。特進官申渫洪進承旨吳億齡修撰鄭經世史官李德溫閔有慶尹暉大憲臣宇顒等入侍。講易坤卦象曰地勢坤止豈能含章也。至扶陽抑陰云云。上曰。陰只言抑不言...
(28)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惺所覆瓿稿卷之十九 文部十六 紀行 下 己酉西行紀 허균[許筠, 1569~1618] ...陞官來賀掛紅。余以國恤辭紅。二十日。宿鳳山。廿一日。中火釰水。夕宿龍泉。夕。劉使致玉圈子一枚,玉簪一副致于余。夕。田相公來訪。廿二日。中火安城。宿平山。廿三日。午憩吾助川。中火金郊。夕抵松京。廿四日。夕。楊相公來話。微問詔書開讀禮。余答以自前無弊。楊曰。中國王府。例有開讀禮。該銀累千兩也。余對以不能知。廿五日。延慰使閔夢龍,留守韓孝純,監司金信元。行見官禮。劉使令講開讀禮以來。使會多官商搉。不得已...
(29) 은봉전서(隱峯全書) 隱峯全書卷七 記事 晉州敍事 안방준 [安邦俊, 1573 ~ 1654] ...,八喇唬,八㯍等船。裝載百萬。邀截海涯。斷汝歸路。絶汝糧餉。不待決戰。爾將自斃。島嶼片甲。不還矣。且關伯與汝。原是比肩。爾等被彼牢籠。俱聽驅使。關伯旣慕天朝而納貢。汝等何向晉州而復圍。今日進退之間。利害所關非細。三思自審。免悔噬臍。賊不聽。沈惟敬力說行長使止之。行長曰。今日之擧。吾無所預。惟淸正力主此議。開喩百端。不如先自空城。以快其情而已。及惟敬還。都元帥金命元,巡察使韓孝純。謂曰。晉州事急。願...
(30) 은봉전서(隱峯全書) 隱峯全書卷十八 混定編錄[前集] 宣廟朝 안방준 [安邦俊, 1573 ~ 1654] ..孝元才氣可用。棄之可惜。近日東西之說。尙未消盡。故被駁者及置散者。皆以東西爲口實。今不用孝元。則藉口者尤衆矣。上曰。雖不用孝元。豈無可用之人乎。淳曰。一人之用舍。雖非大關。而但東西之說未消。則士類相顧疑忌。無有妥帖時也。自上必須洗盡東西。使無毫髮痕跡可也。孝元若無才氣。則棄之何惜。今者孝元之才可用。而乃牽於東西之說不用。則甚爲士類不安之根本矣。副提學柳成龍,修撰韓孝純。亦反覆陳達孝元可用之狀。玉堂...
(31) 은봉전서(隱峯全書) 隱峯全書卷二十三 混定編錄前集 宣廟朝 안방준 [安邦俊, 1573 ~ 1654] ...明甚。此果混同無別之語乎。渾意只以三司附會之人。爲朋讒奇中耳。附會之人。干士類何事。而潑輩乃有此云云乎。又曰。珥不顧公論。一循私情。盡斥其時攻己之人。盡用異日失志之徒云云。此說尤爲誣罔。珥主銓之日。如金宇顒,金弘敏,韓孝純,成泳之輩。則所謂其時攻己者而皆用之。至於三司之人。則其誤事之失。反有甚於三尹。故韓孝純,成泳之外。依三尹例。竝不授淸要。是果盡斥攻己者乎。至於鄭澈,辛應時,李海壽之類。則所謂異...
(32) 백헌집(白軒集) 白軒先生集卷之四十一文稿 諡狀 鷄林府院君贈左議政李公諡狀 이경석 [李景奭, 1595~1671] ...。邊上官吏皆厚遇之。期之以北兵使。戍還。隷訓鍊院。爲權知奉事。例也。累擬宣傳官而不利。出爲三水小農堡權管。堡甚凋弊。公手鍤繕壁。捐俸厲兵。與疲卒同甘苦。官滿而歸。無不涕洟。至今稱爲李令公。兵使申恪留置幕下。軍旅錢穀。咸屬于公。整飭籌營。多所裨益。庚寅。拜宣傳官。辛卯。用不次之薦。監長鬐縣。初至。老吏竊相語曰。非久於此者也。壬辰之亂。列郡震駭。人皆雉鳥散。公乃糾合義旅。與寧海府使韓孝純檄諭郡邑。出沒...
(33) 백헌집(白軒集) 白軒先生集卷之四十六 文稿 墓碣 分承旨贈吏曹判書趙公墓碣 이경석 [李景奭, 1595~1671] ...。舅及姊皆高年。奉養于家。衣食共之。每於初辰節日。輒置酒爲壽。務盡歡悅。里巷以爲美譚。其在臺府也。臨海君蒼頭橫行勢張。都人不能支。吏不敢何問。公嚴勅府吏。縛致其爲首者。治之甚峻。人有爲宮家請寬之。而公不少撓。莫不快之。北路之賑。所活者甚衆。方伯韓孝純謂公曰。活一人尙有陰德。況今所活幾數萬。聞公再聘。必有弄璋之慶矣。後果驗焉。莅光之時。閔雨方甚。民皆釋耒。公躬行田野。勸督耕種。夏適得雨。秋乃大熟。在...
(34) 송자대전(宋子大全) 宋子大全卷一百八十三 墓誌 鷄林府院君李公墓誌銘 송시열 [宋時烈, 1607 ~ 1689] ...未科。丙戌。爲三水小農堡權 管。公早有名。自擢第。輿望日隆。朝夕當大用。物論至是稱屈。而公無幾微見乎色。惟盡其職事。日以撫摩繕修爲務。識者尤以爲巨人長者。考滿而遞。士卒皆涕送之。仍以褊裨隷帥幕。帥盡委以邊上機宜。庚寅。始拜宣傳官。辛卯。被不次之擢。除長鬐縣監。人吏迎觀皆曰。此非久於吾縣者也。壬辰。倭寇大入。公召集義旅。移檄旁邑。斬獲甚多。寧海府使韓孝純上公首級于行在。時道路梗塞。久後始達。宣廟甚...
(35) 송자대전(宋子大全) 宋子大全卷二百二 諡狀 兵使贈左贊成黃公諡狀 송시열 [宋時烈, 1607 ~ 1689] ...雪前恥。而仍創湖南地。秀吉許之。六月十五日。淸正合諸陣兵。號三十萬。發自釜山,東萊。直向晉州。時天朝諸將。留駐湖嶺。而師老不能用。沈游擊惟敬。方在倭營中。與賊講和。移帖于本朝元帥金命元曰。今日事惟淸正力主之。其餘皆不欲。今計只令晉州空城而避之。則彼當撤回而已。又見體臣韓孝純言之。而劉總兵綎。移書淸正。力止而不聽。時賊報甚急。倡義使金千鎰。領兵三百。十四日馳入晉州。公以卒七百往會焉。慶尙右兵使崔慶會...
(36) 백호집(白湖集) 白湖先生文集卷之二十 諡狀 左參贊贈領議政尹公諡狀 윤휴[尹鑴, 1617 ~ 1680] ...義。仍覘其動靜。不自廟堂指揮。下書于公。使授方略。廟堂之倚重如是。金將興 興 與公語。退謂譯官曰。爾國亦有人也。丙申。公積勞成疾。經歲而不敢告休。至是疾益甚。再上章乞罷。備局覆啓準請。上令極擇議薦。時申磼代爲監司。憲府論遞之。吏曹又以備邊司所薦柳根,韓孝純,洪履祥。備望以入。傳于政廳曰。此望無可當之人。前監司病勢不至甚重。則因任可矣。公遂因任調病。然公久不莅位。及秋。因臺諫啓論得遞。寓居河東村舍。...
(37) 밀암집(密菴集) 密菴先生文集卷之二十三 行狀 家世故事 이재[李栽, 1657 ~ 1730] ...之智。一日以賊充斥近境。遲明將稍上鼈項山以避之。會雨不果。其夜賊入鼈項山。焚刦無噍類。是時兵戈搶攘。道殣相望。府君以一布衣。煢然在疚。痛念國事。慷慨揮泣。日以濟活飢民爲事。捐家廩拾橡實。每日熟而貯之。有貿貿然來者。必館而哺 之。或槖而遣之。遠近聞之。襁負來歸者日且數百。賴以全活甚衆。巡察使韓孝純領兵過眞寶。軍缺食。府君聞之。卽運米數十斛以濟之。巡察馳啓。有初無希賞之心。能濟倉卒之急之語。道梗不得...
(38) 도곡집(陶谷集) 陶谷集卷之二十八 雜著 陶峽叢說 이의현 [李宜顯:1669 ~ 1745] ...,姜士尙,金貴榮,鄭芝衍,鄭惟吉,柳㙉,李山海,鄭彦信,鄭澈,沈守慶,柳成龍,李陽元,崔興源,尹斗壽,兪泓,金應南,鄭琢,李元翼,李德馨,李恒福,李憲國,金命元,尹承勳,柳永慶,奇自獻,沈喜壽,許頊,韓應寅。光海朝。鄭仁弘,鄭昌衍,韓孝純,閔夢龍,朴承宗,朴弘耈,趙挺。仁祖朝。尹昉,申欽,吳允謙,金瑬,李廷龜,金尙容,洪瑞鳳,李弘胄,李聖求,崔鳴吉,張維,申景禛,沈悅,姜碩期,沈器 遠,金自點,...
(39) 눌은집(訥隱集) 訥隱先生文集卷之十七 行狀 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資憲 大夫行工曹判書。花山君。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毅公。權公行狀。 이광정 [李光庭, 1552 ~ 1627] ...君永川之捷。一路無保存之勢。此一着。爲國 家恢復之基。未幾。文忠換右監司。將赴任而賊梗道。公爲之先道擊賊。文忠乃發道。遇朴晉領兵來候。戒無沮抑義旅。又馳啓言本道自權應銖殲滅永川賊。軍聲大振。士卒咸奮。臣見應銖驍勇有智慮。若使之當一面。任其所爲。必成大功。而頗爲兵使所掣肘。不得行其志識者。深以爲歎云。十二月。公移拜本道左兵馬助防將。癸巳正月。公自安東移軍醴泉。與觀察使韓孝純合七郡兵。陣於聞慶之唐橋...
(40) 대산집(大山集) 大山先生文集卷之四十九 行狀 芝軒鄭先生行狀 이상정[李象靖, 1710 ~ 1781] ...陷萊釜。東都朝夕且危。同任洪汝栗欲埋置御容。公毅然曰。此臣子所不忍爲。不如陪向京城。若有擅動之罪。吾請自當。遂間關顚頓。過鄕家不入。行到堤川郡。聞大駕西狩。道路梗不通。卽馳報湖西伯。還向嶺南。權奉于退溪書齋。本道監司韓孝純來到奉審。啓達于行朝。甲午。吏曹啓曰。鄭士誠與洪汝栗保護御容之功。實爲一體。而監司奉審之日。鄭某留奉安所。洪汝栗隨往安東。修啓時。只書渠官銜姓名而脫漏鄭某姓名。以至差出他參奉。後...
(41) 수산집(修山集 ) 修山集卷之十四 漫筆 漫筆 이종휘 [李種徽, 1731 ~ 1797] 成夏山夢井。字應卿。嘗於壁書孝衰於妻子。官怠於宦成。病加於少愈。禍生於驕盈。淸心寡慾。怡神養性。忍快耻復。三十二字以自警。古人懲艾也如此。禪經。兀然無事坐。春來草自靑。語意亦自好。神器秘訣。卽近世兵家論火器者。其下雜引諸兵書。頗有裨益於今日者。攷其卷弁。則乃昏朝相韓孝純所述。以韓之庸瑣憒憒者而能有此。先輩之不可慢如此。柳公權曰。心正則筆正。余足之曰。筆正則心正。盖於胸中冗憒時。習數行字。則心必正矣...
(42) 성재집(性齋集) 性齋先生文集卷之三十 傳 花巖尹義將傳 허전[許傳, 1797 ~ 1886] ...草炭灰數百堆以待之。癸巳二月。賊果從太和乘夜而入。公乃使諸部勇士因烈風縱火。揚沙U25CFD灰。烟焰漲天。乃使精兵鼔譟而夾擊之。積屍蔽江。賊勢大挫。天使李訥曰龍驤大元帥尹鴻鳴與諸義將。大有功於和江蓮浦之戰。兵勢大振。招諭使金鶴峰啓聞于朝曰慶蔚之賊。賴倡義諸人。以摧其鋒。甲午巡察使韓孝純傳檄。邀與相助。公率精兵二百餘人赴巡營。未幾賊又涉海。公卽還軍。大書龍驤於十丈旗竿。立之開雲浦上。賊望見不敢入。乙...
(43) 남천집(南川集) 南川先生文集卷之四 附錄 康節婦閭閣實錄 권두문 [權斗文, 1543 ~ 1617] 平昌郡守權斗文妾康召史。僉知希哲之女也。姿禀穎悟。行循女範。鄕黨常穪美。年三十一。其夫守平昌。遭倭變。據險于郡南面井洞里壁窟上。壬辰八月。賊來圍。兵殘力弱。賊躝入窟中。拔劒擊其夫。召史冒刃趍覆。泣請俱死。只傷夫臂與妾面而僅免之。賊不忍更擊。先縛其夫而出。召史知其辱將及己。遂自墜窟下千仞深潭而死。江原監司姜紳,慶尙監司韓孝純皆啓聞。宣祖朝癸巳賜祭。光海壬子㫌閭。
(44) 모당집(慕堂集) 慕堂集附錄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舘藝文舘春秋舘觀象監事世子師。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舘事世子左副賓客府君言行錄。 홍이상 [洪履祥, 1549 ~ 1615] ...第一。宣廟命廟堂薦公輔之器。履祥與李恒祥,李德馨等俱被薦焉。壬辰扈行。力陳嬖幸干政之罪請誅之。由此忤旨。數求補外而出。爲人端方溫雅。論議不偏。或遇大議。持正不撓。至是棄開城留守。舁疾還家卒。史官李植宣祖甲申十一月。下敎三公。各薦賢才。朴淳薦辛應時,李山甫徐益。盧守愼薦李時潑,金顒,韓準,白惟讓,尹先覺,鄭汝立,金晬,金弘敏。鄭惟吉薦尹先覺,權徵,洪▣▣,韓孝純,李大海。出東閣雜記
(45) 하의유고(荷衣遺稿) 荷衣遺稿年譜 荷衣年譜 홍적[洪迪, 1549 ~ 1591] ...。季適崔毅量。監察。七年 我宣祖十二年。己卯。公三十一歲。因在騎曹。伯氏唐興公入銓。故不得遷。八年 我宣祖十三年。庚辰。公三十二歲。春。知製敎。夏。歸葬外舅議政公于原州佳麻島亥坐巳向之原。至戊申。夫人申氏喪。移卜靑龍外麓乾坐巽向之原。合葬。歷掃驪州大松里恥齋先生墳塋。所後親。連作宰。每歲受恩暇省覲。故私親墳塋。難於據法請掃。至是因便展謁。秋。彗星見。受命測候瞻星臺。金應南,李山甫,金睟,韓孝純遆番...
(46) 문월당집(問月堂集) 問月堂先生文集卷之三 [雜著] 壬辰日記[下] 오극성[吳克成, 1559 ~ 1616] ...諸屯。而佯示信意。宣言曰癸巳平壤之戰。唐將托稱許和。陰懷禍心。反害吾軍。今日所言。必復瞞我。何可取信。惟願天使速入吾營。然後當悉如約。余之同郡有李涵,朴毅長。先是李涵在憂中。念國事艱危。常慷慨不已。憂民饑饉。散給儲粟。濟活甚衆。巡察使韓孝純自安東率兵過眞寶。軍糧將盡。計無所出。李涵運米救急。使不闕乏。及天兵南下。公私蓄積。蕩掃無餘。韓孝純使李涵主東海煮鹽事。多助軍餉。朴毅長素有經天緯地之才。每懷存...
(47) 모하당집(慕夏堂集) 慕夏堂文集卷之二 附錄 龍蜿事實摭錄 김충선[金忠善, 1571 ~ 1642] ...之內。七八戰連續獻馘。諸賊畏其鑄銃造藥。莫敢來犯。自是領兵精銳。甲於八路。十月賊船六隻來自機張。陸賊自阿厼浦向蔚山郡。公與郡守金太虗,全應忠,朴弘春,徐仁忠終日力戰。斬陸軍三十餘級。二船之賊。鏖殺無遺。廵察使韓孝純與兵使並爲馳啓公之向化於行在所。上曰以金太虗爲蔚山實郡守。沙也可則向化立功。尤爲奇之。卽命乘馹上來。引見試藝後。命除嘉善。特賜我朝冠冕及靑布三千疋。以爲軍兵服色。癸巳四月十八日。諸賊水陸...
(48) 잠와유고(潛窩遺稿) 潛窩遺稿卷之二 書 答李蒼谷 書 이명준 [李命俊, 1572 ~ 1630] ...其父兄尊丈。而强爲非正之供。豈非不思之甚乎。不有以昌言正議。以左右吾君。而獨以口體之養有缺於前時爲未安。則不近於婦寺之忠乎。向在宣祖朝。吾洞丈黃沂之作縣也。私獻於朝。至被臺評。宣祖雖終始寬饒。而見棄淸議。終身坎軻。生之爲督郵北路。嘗見方伯李時發。則自詑曰。某雖無寸長。獨無私獻。韓孝純之爲方伯也。每月私進。上弊驛路故云。 然則其時士大夫莫不以私獻爲大恥。彼爲私獻者。豈皆要寵。然而以爲恥者。豈非有涉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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