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잡록(亂中雜錄) 및 속잡록(續雜錄)                                             

                                                                                        조경남 [趙慶男, 1570 ~ 1641]
1) 난중잡록 1(亂中雜錄 一 상, 二 하)
 

  ◎ 난중잡록 1(亂中雜錄 一) 상   (韓孝純官職 - 左監司)

임진년(壬辰年)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경상좌도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가 없어 명령이 오랫동안 폐해졌고,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을 들어 알 수 없었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 하였다. 세 고을이 성을 각각 지킬 수 있는 것은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난중잡록 1(亂中雜錄 二) 하  

임진년(壬辰年)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다. 교지에,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경상좌도는 아직 보존되었으나 다만 도내에 감사ㆍ병사ㆍ수사가 없어서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인심이 붙일 데가 없다. 그래서 비록 창의(倡義)하여 적을 치는 사람이 있으나 통솔하기에 어려운데, 좌감사 김성일은 길이 통하지 않아 아직 간 곳을 모르고 사기(事機)는 심히 급하다. 이제 그대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토포사를 겸하게 하노니 성일이 미처 부임하기 전에 그대는 군현(郡縣)을 통솔하여 적을 치는 일을 맡고 또 성일이 있는 곳을 찾아서 급히 부임하도록 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치도록 하라. 군사나 백성으로 공이 있는 자는 일일이 자세히 기록하여 후일에 논공(論功)할 증거를 삼고 공사(公私)의 종은 곧 면천(免賤)해 주도록 하라.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은 각 고을이 연달아 무너질 때에 적을 베어 공을 세웠으니 극히 가상하다. 역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그 나머지 공이 있는 사람도 역시 예(例)에 따라 논상(論賞)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다. 이 교서는 길이 막혀서 서너 달을 지나서 한효순(韓孝純)이 감사가 된 뒤에 도착하였다.

○ 경상도 영해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등과 더불어 적을 치기를 약속하였는데, 적이 강원도로부터 와서 동쪽에서 진지를 합쳐 영해를 범하고자 하다. 한효순(韓孝純)이 군관 장기(張豈) 등을 시켜 군사를 매복시켜 맞아 치니 적이 이내 물러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금산에 머물던 적의 기병(騎兵) 4백여 명이 무주(茂朱)에 이르러 그대로 머문다 하다. 경상도 합천 진사 박이문(朴而文), 안음(安陰) 진사 정유명(鄭惟明) 등이 소를 올려 김성일을 우도 감사에 유임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고 토포사(討捕使) 한효순(韓孝純)으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이때에 모든 지방 관원들이 모두 샛길을 다니기 때문에 큰 길에는 사람이 없었더니, 한효순(韓孝純)이 순찰사가 된 뒤에는 항상 자줏빛 도포를 입고 나팔과 피리를 울리며 방백의 위의를 성대히 하여서 각 고을에 둔치고 있는 적들이 성에 올라서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로부터 길이 비로소 통하여 사람들이 그의 행차를 보고는, 다시 우리 관원의 위의를 보겠다고 하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들은즉, 김성일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韓孝純)은 영해를 보존하였다 하므로 그들에게 좌우도 순찰사ㆍ관찰사 관직을 내리고 대소(大小) 의병장에게 아울러 차등을 두어 관직을 제수하니, 너희들은 나아가서 절제를 받고 또한 함께 계책을 정하여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맞아 그의 뒤를 습격할 것이요, 적이 둔친 곳을 엿보아 그의 병영을 야습하라. 미리 여기서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기는 어려우니 기회를 보아 하는 것은 너에게 맡기노라. 손인갑(孫仁甲)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을 애통히 여겨서 판서의 중직을 내리며, 이형(李亨)이 전사한 것을 민망히 여겨서 아들 한 사람을 벼슬시킨다. 벼슬과 상 줌은 관계없이 역사에 기록함을 어찌 아끼랴. 다만 먼저 영남을 평온히 하고서야 비로소 빨리 나의 행차를 영접하라. 나의 말을 다하려 하니 눈물이 먼저 흐른다. 내가 어찌 잊으리오. 너희들은 마땅히 힘쓸지어다. 아, 예악(禮樂)의 고장에서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버린다면 산이 숫돌처럼 닳고 물이 띠처럼 마를 때까지 영원히 봉작(封爵)의 영화를 누릴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의당 잘 알 것이다. 이 교서를 받고야 어찌 힘을 다하여 적을 칠 마음이 없으리오.

○ 경상도 함창(咸昌)ㆍ당교(唐橋)의 적이 모여서 큰 진이 되어 용궁(龍宮) 등지에 횡행하면서 장차 다시 내지(內地)로 범하려 하는데, 좌감사 한효순(韓孝純)이 안동에 있으면서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로 대장을 삼아서 만호 민정홍(閔廷鴻) 등과 각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을 지키게 하고 또 안동 부사 우복룡(禹伏龍)으로 도지휘대장(都指揮大將)을 삼아서 예천 땅에 진을 치게 하며, 영천(榮川)의 향병과 춘양(春陽)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나아가 치다가 크게 무너져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좌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도내에 유둔한 적이 인동(仁同)ㆍ대구(大邱)ㆍ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 및 함창(咸昌)으로부터 당교(唐橋) 등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둔하고 있는데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심히 치성하니, 신은 비록 한 도의 힘을 다하여서라도 반드시 이 적을 먼저 치는 것으로 목표를 삼겠습니다. 병사 박진(朴晉)과 우후(虞侯) 권응수(權應銖), 밀양 부사 이수일(李守一) 및 부장(部將) 정대임(鄭大任) 등 모든 장수가 모두 안동ㆍ예천(醴泉) 등지에 모여서 경영하고 살핀 지가 이미 수개월이 가까우나, 적이 편리한 지점을 점거하고 있고 더구나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어 아직까지 한 번도 공격하지 못하니, 통분하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예한 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응수에게 맡겨서 기회를 보아 밤에 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장차 10여 고을의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의성(義城)ㆍ안덕(安德) 등지에 주둔하여 인동의 적세를 엿보아 만약 기회만 오면 크게 한번 공격할 것이며, 만약 불편하면 날랜 군사를 가지고 밤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 병사로 하여금 대구의 적을 밤에 공격하게 하여 이미 약속을 정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군량이 매우 어려워서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싸가지고 오도록 하자니 민간에 한 되 한말의 저축이 없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잇달았으며, 관량(官糧)을 주자 하니 각 고을의 창고가 간 곳마다 비었으니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 난중잡록 2(亂中雜錄 二)         

계사년(癸巳年) 상 만력 21년, 선조 26(1593년)   (韓孝純官職 - 左監司)
○ 그 뒤에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체찰사가 되어 순시하며 진주에 이르렀다가 성이 함락되었던 곡절을 물어서 듣고 전(傳)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계사년 6월 □일. 적의 추장(酋長) 청정(淸正)이 여러 추(酋)의 군사를 합하여 30만 명이라고 소리쳤는데, 혹은 7, 8만이라 한다. 수륙으로 아울러 나와서 장차 진주를 범하려 하다. 이때에 총병 유정은 유격장군 오유충과 더불어 대구(大邱)에 있었고, 참장 낙상지, 유격 장군 송대빈은 남원에 있었으며, 상지 등이 그 때 남원에 도달하였는데 지금 ‘있었다’ 한 것은 틀렸다. 유격 장군 왕필적(王必迪)은 상주(尙州)에 있었다. 유격 장군 심유경은 바야흐로 왜장 평행장(平行長)의 병영에 있으면서 적과 강화하여 왕자를 데려오려고 계획하였다. 송경략(宋經略)이 유경에게 글을 보내어 꾸짖기를, “네가 이미 왜놈들로 하여금 바다로 내려가게 하고 왕자를 찾아온다고 하였는데 적이 아직도 주둔하여 침범과 약탈을 그치지 않으니, 너는 모름지기 다시 적의 병영에 들어가서 분명히 깨우쳐 타이르라. 그렇지 못하면 내가 장차 병부에 보고하여 너의 죄를 중하게 문책하여 용서치 않으리라.” 하다. 유경이 도원수 김명원에게 글을 전하기를, “일본이 진주를 공격한 일은 저들이 지난해에 거기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심히 많았고 또 배들이 모두 불타고 파손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분하고 한스러워하는 것이라고 불평하였다. 하물며 우리의 병사가 여러 번 일본의 삭초(削草)하는 왜인을 죽였으므로 저희 장수들이 관백에게 알렸더니, 관백이 말하기를, ‘너희들도 또한 나아가 진주성을 공격하여 성을 때려 부수어서 전일의 원한을 풀라.’ 하였다. 행장이 본부(本府)를 보고 말하기를, ‘진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칼날을 피하게 하라.’ 하였는데, 저들이 성이 비고 사람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곧 철병하여 동으로 돌아왔을 따름일 것이다.” 하였다. 유경이 적의 병영에서 돌아올 때에 따라온 통역 이유(李愉)가 말하기를, “청정이 극력 이 일을 주장하여, ‘수길(秀吉)에게 말하여 기어코 진주를 함락시킨 후에야 그만두겠다.’ 하여, 행장이 힘껏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에 수가(秀家)ㆍ행장ㆍ삼성(三盛)ㆍ길계(吉繼) 등은 가지 않았고, 의지(義智)만이 응하여 가는 중에 들었으나 또한 중지하고 가지 않았다. 행장이 유격을 양산에서 전송할 때에 손을 잡고 작별하면서, ‘내가 힘껏 말려도 청정이 홀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진주 공격에만 그칠 뿐일 것이니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을 보장한다.’ 하였습니다.” 하다. 김명원이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더불어 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진주의 일이 급하니 힘껏 구해 주오.” 하니, 유경이 말하기를, “행장에게 하루 종일 밤새도록 간절히 말하였더니 행장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으나, 그 사세가 이미 결정되어 마침내 돌리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다른 계책은 없고 다만 진주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조금 피하게 하려 하여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 하리오.” 하다. 이때에 유 총병이 청정에게 글을 보내기를,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여 우리의 속국을 헐어서 군사가 얽히고 화가 맺혀 해가 지나도록 그치지 않으매, 황상(皇上)께서 들으시고 크게 노하시어 특별히 절월(節鉞)을 주어 범 같은 신하들을 나누어 보내 큰 고래[鯨]를 모두 죽여 동해를 길이 맑히려 하였다. 근자에 심유경이 가서 대면하여 강화하려 하니 일본이 드디어 마음을 돌려 갑옷을 풀고 정을 표시하고 맹약하기를 빌면서 조선 지방을 다 돌려주고 무리를 이끌고 귀국하고, 또 부산에서 소서비탄수구 대부(小西飛彈守久大夫)를 보내어 천조(天朝)에 가서 명령을 기다리니 지극한 정성이 깊이 가상하므로, 천조에서 보낸 수백만 군사가 장차 모두 압록강 머리에서 그쳤다. 대장군 제독 이(李)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왕경(王京)에 주둔하고, 곽 총병(郭總兵)ㆍ진 총병(陳總兵)ㆍ가 총병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요동에 주둔하며, 오 부총(吳副總)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평양ㆍ개성에 분포한 것이 10만이 넘는데,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한 번 교전이 되면 문득 화의(和議)를 어겨서 우리 당당한 천조의 천지 같은 도량을 잃을까 염려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너희들이 돌아갈 뜻을 결정하지 않고 다시 진주를 공격하여 돌연히 전일의 맹세를 배반하여 전날의 분풀이를 한다고 한다. 대저 조선의 8도 지방에 이미 7도를 부수고 남녀들이 뜻밖의 재앙을 당하여 해골이 서로 쌓여 들에 가득하고, 머리를 매단 것이 장대에 찼으니 극도로 참혹하다 하겠거늘, 다시 무슨 원수를 갚겠다고 사마귀만한 진주의 땅에 하필 적은 혐의를 가져서 중국에 큰 신의를 잃는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마땅히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 조속히 철병하여 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들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서로 부딪치거나 외국에 신의를 잃지 아니하고 너희들로 하여금 칼날에 걸리지 않고 바다에 떠서 동으로 돌아가도록 하기에 힘쓸 것이다. 만약 다시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여 군사가 쉬기 어렵게 된다면 반드시 조미복선(鳥尾福船)ㆍ누선(樓船)ㆍ백조(栢艚)ㆍ용조(龍艚)ㆍ사선(沙船)ㆍ창선(艙船)ㆍ동교소초(銅蛟小艄)ㆍ해도(海舠)ㆍ팔라호(叭喇唬)ㆍ팔장(八槳) 등의 배에다가 수군 1백만을 싣고서 바다를 질러 막아 너희들의 돌아갈 길을 끊고 너희 양식 운반을 끊을 것이니, 결전할 필요도 없이 너희 무리는 장차 섬에서 절로 죽어 한 조각의 갑옷도 돌아가지 못하리라. 또 관백과 너는 원래 비등한 지위인데 너희들이 그의 농락을 받아서 함께 구사(驅使)를 듣고 있다. 관백이 이미 천조를 사모하여 공물을 바치는데, 너희들은 왜 진주를 포위하고 공격하려는가. 오늘날 진퇴하는 사이에 이해관계가 작지 않으니 세 번 생각하여 스스로 살펴서 사향노루가 제 배꼽을 물어뜯는 뉘우침을 면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적이 오히려 듣지 않다. 이때에 변방의 경보가 매우 급하매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다. 충청 병사 황진은 군사 4백을 거느리고, 부장 장윤은 군사 3백을 거느리며, 의병장 이계련은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며,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거느리고 모두 먼저 와서 모이다. 본주 목사 서예원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과 바야흐로 성을 지킬 것을 의론하는데,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및 홍계남(洪季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내면(內面)을 지킴만 못하다.” 하니, 김천일이 소리를 높여 반대하다. 거이와 계남 등이 나와서 운봉(雲峯)에 진을 치다. 21일에 적의 기병 2백여 명이 동북 산 위에 출몰하더니, 22일 진시에는 적의 기병 5백여 명이 북산(北山)에 올라서 진을 벌이고 기세를 뽐내었는데, 성중에서는 동하지 아니하다. 사시에 많은 적이 계속하여 이르러 두 패로 나누어서 한 패는 개경원(開慶院) 산중턱에 진치고, 한 패는 향교 앞길에 진치다. 처음 한 번 교전에 성중에서 30여 놈을 쏘아 맞히니, 적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다. 초저녁에 다시 나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이 되자 물러가고, 3경에 다시 나왔다가 5경에야 비로소 물러가다. 이보다 먼저 성중에서 적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의론하기를, “성 남쪽 촉석루 남강이 가장 험하니 적이 반드시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오. 서북쪽은 참호를 파서 그 밑에 물을 채워 둘 수 있으니 다만 동편만이 적이 범할 곳이다.” 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적이 그 참호를 파서 물을 트고 마르기를 기다려 흙을 져다가 메워서 큰 길을 만들었다. 23일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그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더니, 적이 밤을 타서 일시에 크게 부르짖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다. 성중에서 어지러이 쏘아서 죽은 자가 그 수를 헤일 수 없었다. 24일에 5, 6천 명의 적이 더 와서 마현(馬峴)에 진을 치고, 또 5, 6백 명이 더 와서 동쪽에 진을 치다. 25일에 적이 동문 밖에서 흙으로 메워 언덕을 만들고 흙집을 지어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총 쏘기를 비가 퍼붓듯 하다. 충청 병사 황진이 또한 성 안에서 상대하여 높은 언덕을 쌓는데 초저녁부터 밤새도록 황진이 옷과 전립(戰笠)을 벗고 친히 돌을 지니 성중의 남녀들이 감격하여 울면서 힘을 다하여 쌓는 일을 도와서 하룻밤에 마치다. 이에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맞혀 부수니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날에 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또 4번 싸워 4번 물리치다. 26일에 적이 나무 궤를 만들어 소가죽으로 싸서 각기 그것을 지고 탄환과 화살을 방어하면서 와서 성을 헐었다. 성중에서는 큰 돌을 굴러 내리고 화살 쏘기를 비가 퍼붓듯 하니 적이 그제야 물러가다. 적이 또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위에다 판자 집을 설치하고서 성내에 대고 불[火]을 많이 쏘니 초가집들이 일시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다. 목사 서예원이 겁을 내어 넘어지므로 의병 부장 장윤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다. 이때에 큰 비가 와서 활이 모두 풀어지고 군사들의 힘이 이미 피곤하였다. 적이 성중에 글을 던지기를, “대국의 군사도 장차 항복할 것인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는가.” 하다. 성중에서 답서를 던지기를, “우리는 죽는 것이 있을 뿐이다. 하물며 천병(天兵) 30만이 이제 바야흐로 너희들을 추격하여 다 무찔러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하다. 적은 옷을 벗어 볼기를 두드리면서, “명병(明兵)은 이미 다 물러갔다.” 하다. 이날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치다. 27일에 적이 동ㆍ서 두 문 밖에 다섯 언덕을 쌓고 대를 엮어 책(柵)을 만들어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총을 비 퍼붓듯 쏘아대니, 성중에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다. 또 나무 궤를 가지고 사륜차(四輪車)를 만들어 적 수십 명이 모두 쇠 갑옷을 입고 궤를 밀고 들어와서 쇠 송곳으로 성을 뚫다. 이때에 김해 부사 이종인이 군중(軍中)에서 제일 힘이 세었다. 종인이 연달아 다섯 놈을 죽이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다. 성중의 사람들이 횃불을 묶어 기름을 부어서 던지니 궤 속에 든 왜놈이 모두 타죽다. 초경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에 범하였는데, 종인이 자기 수하들과 함께 힘껏 싸워서 물리치다. 28일 여명에 종인이 지키던 성첩으로 돌아오니, 그날 밤에 서예원이 야경(夜警)을 조심하지 않아서 적이 몰래 와서 성을 파서 성이 장차 무너지게 되었으므로 종인이 크게 노하여 꾸짖다. 적이 나아와 성 밑에 육박하였는데 성중에서 죽도록 싸워서 적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적추(賊酋) 한 놈이 탄환에 맞아 죽으니 여러 적이 송장을 끌고 가다. 황진이 성 아래를 굽어보며, “오늘 싸움에는 적이 죽은 놈이 1천여는 되겠구나.” 하다. 한 왜놈이 성 밑에 잠복하였다가 쳐다보고 탄환을 쏘니 궤 속에 목판이 튀면서 황진의 왼쪽 이마를 맞히다. 이때 황진과 장윤이 힘껏 싸우는 것으로 가장 칭송받아 모든 장수의 으뜸이 되므로 온 성중이 믿고 의지하였는데, 황진이 탄환에 맞아 죽으니 혹은 탄환을 맞아도 죽지 않았다가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피살되었다 하니 틀린 말이다. 성중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다. 29일에 서예원으로 황진을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을 삼으니, 예원이 겁을 내어 전립을 벗고 말을 타고 울면서 다녔다. 병사 최경회가 예원이 군중을 놀래키고 요동하게 한다하여 목을 베려다가 말고 장윤으로 대신 장수를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장윤도 또한 탄환에 맞아 죽다. 미시에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니 많은 적이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오다. 이종인이 친병(親兵)과 더불어 활을 버리고 창과 칼을 가지고 싸워 쳐 죽인 것이 쌓여서 산과 같으니, 적이 물러갔다가 또 서 북문에서 고함을 치고 돌진하니 창의사의 군사가 무너지고 흩어져서 모두 촉석루에 모이다. 적이 이내 성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날뛰니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다.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고 이종인은 탄환에 맞아 죽다. 천일의 좌우 사람들이 천일을 붙들어 일으켜서 퇴각하여 피하도록 권하니 천일이 굳게 앉아서 일어나지 않으며 돌아보고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에서 죽겠노라.” 하고, 드디어 그 아들 상건(象乾)과 서로 안고 강에 몸을 던져 죽다. 적이 본성을 무찔러서 평지를 만들었는데, 성중에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이었다. 뒤에 감사 김륵(金玏)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니 성중에 쌓인 송장이 거의 1천여가 되고, 촉석루로부터 남강의 북쪽 언덕에 이르기까지 쌓인 송장이 서로 겹쳐 있었으며, 청천강(靑川江)으로부터 무봉(武峯)에 이르기까지 5리의 사이에 죽은 자가 강을 막아 내려갔다. 고득뢰(高得賚)는 남원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그가 우의 부장(右義副將)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줄을 아는데 이 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건대 다른 사람도 빠진 이가 필시 많을 것이다. 하물며 한도의 대장으로 순찰사ㆍ병사 및 창의사(倡義使)가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혹은 수원에 둔치고 혹은 강화에 진쳐서 수륙의 요로를 질러 막았고 10월 사이에 개령에서 세운 전공(戰功)을 체찰사와 전라ㆍ경상 순찰사에게 보고하였고, 11월ㆍ12월 사이에 성주에서 세운 전공은 체찰사와 경상 우순찰사에게 보고하였으며, 지금 계사년 2월간의 군공(軍功)은 체찰사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의병(義兵) 군공의 장계는 도사(都事)의 체찰사가 오로지 맡았다 하는데, 두 도의 순찰사는 혹은 장계하기도 하고 혹은 장계하지 않기고 하여 공을 세운 장사(將士)들이 아직까지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부장 장윤은 비록 무인(武人)이나 말을 듣고 기색을 보매, 다만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털 만큼도 공을 바라는 태도가 없으니 은전을 입지 못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군졸들에 있어서는 깊이 다른 도에 들어와서 해[年]가 넘도록 고생하면서 사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쏘아 죽인 공이 많이 있으니, 세운 군공이 만일 누락됨이 있다면 각기 원통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3) 난중잡록 3(亂中雜錄 三)          

(1)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韓孝純官職 - 副道體察使)

6일 한효순(韓孝純)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부 체찰사((韓孝純) )는 순천으로 돌아갔다.

○ 도 제찰사가 재촉하는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청야(淸野)하는 한 가지 일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관건인데, 어렵지 않은 일을 진작 거행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어 적간(摘奸)할 때에 각 고을 수령과 각 면의 도유사(都有司)와 이(里)의 유사 등을 군령에 종사하게 하여, 재삼 명령하여 말린 연후에 죽음을 받아도 한이 없도록 하라. 각처의 인민이 산성을 싫어하고 꺼려서 다른 고을로 옮겨 피한 자는 왜적에게 붙은 자이니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난 뒤에 보고할 일이다. 이상을 3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의논하여 호남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군사를 나누고, 광양 현감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와서 영남에 교부하게 하되, 담양ㆍ남원 등 산성이 있는 일곱 고을에는 군사의 징발을 제외하였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ㆍ장수ㆍ진안ㆍ임실ㆍ구례ㆍ곡성 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 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을 성내에 설치하여 장차 모두 아문의 관할로 들이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지어 가속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도체찰사는 단결을 위한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각도 각 관아에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수효가 많기를 기하고, 명망이 있어 아랫사람을 통제할만한 자로써 주장(主將)을 삼고, 그 고을에 무사 및 수령의 군사 가운데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있는 자를 영장(領將)으로 정하여 각기 그 관아의 나장(羅將) 5인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고, 무릇 군무(軍務)에 관한 것은 영병장(領兵將)이 직접 체찰부에 보고하되, 문서는 관인(官人)에게 주어서 왕래하도록 하라. 전직 조관(朝官)이나 생원과 진사 중에서 물망이 있는 자를 도청유사로 선택해 정하여 고을에서 문서에 능한 2명을 불러 사환으로 삼도록 허락하라. 조련군으로 군적을 만든 외에 빠진 남정과 전직 조관과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ㆍ좌수(座首)ㆍ한량ㆍ재인ㆍ백정을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없이 책을 만들어 별갑(別甲)으로 정하고, 조군(漕軍)ㆍ수군(水軍)으로 전에 도피한 자는 한량의 예에 의하여 소속시키고, 양반의 종은 3명에 1정(丁)을 취하고, 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그 아들을 취하고, 삼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두 아들을 취하고, 활과 화살을 각자가 준비하고, 화약과 조총은 관(官)에서 준비해 주고, 단결 훈련하여 죽음으로써 동맹하였다가 변방의 보고와 전령을 따라 즉시 거느리고 달려가되 일체 체찰부의 분부를 따르고, 원수(元帥) 이하는 절제하지 못한다. 운운. 이상을 3도에 관문으로 보내었다. 이때에 이원익이 초계(草溪)에 있으면서 진주(晉州)로 하여금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을 쌓게 하였다.

2월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이 수군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남원ㆍ광주가 더욱 태만하였으니, 청컨대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보여서 하나를 징계함으로써 백을 북돋우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부 체찰사(韓孝純)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 체찰사(韓孝純)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한효순(韓孝純)이 순천으로부터 한산도에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위로 하였다. 권율(權慄)이 진주로부터 순천으로 향하였다.

○ 시랑(侍郞) 손헌(孫憲)이, “심유경이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항상 강화한다는 것을 핑계로 자주 왕래하여 백성만 괴롭히니, 비록 전화(戰禍)를 해결한다 하나 실은 왜놈을 도우는 것이니, 먼저 심유경을 베어 죽여야 조선에 나갈 수 있겠다.” 하고, 차관(差官)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량 사정을 묻고 인하여 심유경이 왜놈을 도운 실정을 탐지하게 하니, 심유경이 듣고 급히 체찰사(李元翼)ㆍ부 체찰사(韓孝純)ㆍ도원수 및 3도의 감사ㆍ병사를 남원으로 청하여 미리 답사(答辭)를 만들었다.

○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경상좌도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지키고, 진주 목사 등으로 정개 산성(鼎盖山城)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으로 안음(安陰)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지키게 하고, 우병사로 악견 산성(岳堅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 임금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전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에 체찰사와 도원수가 거느린 군사들이 이미 다 흩어져 떠났고, 단기(單騎)로 말을 달려 왕명에 부복하였다.

○ 체찰부(體察府)의 장계에 의하여 3도의 수령 60여 명을 잡아다 옥에 가두어 신문하고, 관으로 돌아가 일을 보게 하지 않고 수개월 동안 형틀을 씌우고,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처형하니, 안성 군수(安城郡守) 유몽경(柳夢經)ㆍ용인 현감(龍仁縣監) 임충간(林忠幹) 등이 사형되었고, 그 나머지 사람은 쌀 30석을 경창(京倉)에 바쳐서 속죄하였다.

(2) 병신년 만력 24년, 선조 29년(1596년)

○ 체찰사 이원익이 경주로부터 진주에 와서 주재하였다. 이때에 부 체찰사(金玏)가 체차되고, 한효순(韓孝純)이 대신하였다. 한효순이 서울로부터 수군에게 무과(武科)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고 바로 한산도로 내려갔다.

○ 부 체찰사 한효순이 한산도에 이르러 무과초시(武科初試)를 보였다.
9월 10일 이원익은 나주에 머물고, 권율은 곡성에 머물고, 한효순은 한산도로부터 남원에 나왔다. 20일 이원익ㆍ한효순이 명령을 받고 환조(還朝)하는데 이원익이 남원을 지나다가 부민(府民)들의 진정에 의하여, 명나라 병사에게 공급하는 건어물과 염찬(鹽饌)을 연해의 고을에 나누어 배정하여 납품하게 하고, 또 상번(上番) 군사와 각 사찰의 노비(奴婢)의 신책(身責)을 면제하고, 강군(扛軍)으로 나누고, 을미년 이전의 각종 미납(未納)된 물품을 감면하여 주니, 남방 백성들이 손을 모아 축원하고 즐거워 뛰었다. 다음날 서울로 향하였다. 간 곳마다 백성을 구해 주니 백성들이 살 길을 얻었다. 옛적에 사직(社稷)의 신하가 있다더니, 이 대감이 거기에 가깝도다.

○ 통제사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힘을 다하여 청정의 오는 길을 막으려 하니, 각 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진력하여 수병(水兵)들을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 부체찰사 한효순에게 수군의 일을 전담하게 하여 3도의 수병 및 격군(格軍), 격량(格糧)을 밤낮으로 조발(調發)하여 들여보내고, 병선(兵船)과 기계를 급히 수리하여 이순신이 적을 막는 힘을 부추겨 주게 하였다


4) 난중잡록 4(亂中雜錄 四)
     

(1) 기해년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

○ 수군의 격량(格粮)에 대한 값을 정한 법을 공포하였다. 이때에 수군이 대패해서 아주 조금 밖에 남아 있지 않아 바다를 방어하는 배가 운행할 길이 없으므로 비변사에서 의논한 끝에 하삼도(下三道) 안의 기병과 보병 및 팔결군(八結軍)을 격군(格軍)으로 충당하였다. 이때에 전라 감사 한효순(韓孝純)이 전에 부 체찰사(副察)로 있을 적에 육지의 군사는 수군의 역을 감내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그 까닭을 임금께 아뢰어 기병과 보병은 무명 5필을, 팔결군은 쌀 20말을 수영(水營)에 바치어 수군의 양곡 값으로 삼게 하였다. 그 뒤에 격량(格粮)을 감하여 12말로 하다가 다시 감하여 8말로 하였다. 영남의 기병ㆍ보병과 각 절의 노비들은 모두 수군으로 들어갔다.

(2) 경자년 상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 한효순(韓孝純)이 갈리고 이홍광(李弘光)이 전라 감사가 되었다.


5) 속잡록 1(續雜錄一)     

정사년 만력 45년, 광해군 10년(1617년)        (韓孝純官職 - 右議政)

○ 경운궁(慶運宮)에 투서가 들어왔는데, 망측한 말이 많았다. 영상 기자헌(奇自獻)은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나갔다. 우상 한효순(韓孝純)도 사직서를 내놓고 강상(江上)으로 나가니, 이이첨도 또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임금은 승지를 시켜 그들을 부르게 하여 모두 다시 일을 보도록 하였다. 역적 허균(許筠)은 간교하고 속이기를 잘하여 이이첨과 더불어 표리(表裏)가 상응하였다. 몰래 역모를 품어 나라의 명맥을 동요시키려고 투서를 한 것은 실은 허균이 한 일이었다. 경운궁은 대비가 계시던 정릉(貞陵)의 옛 궁궐이다.

○ 유학(幼學) 이형(李泂)이 상소하기를, “아뢰옵나이다. 신은 태어나서 성세(聖世)를 만났고, 맑은 교화에 은혜를 입었으므로 털끝만큼의 보답이라도 없을 수가 없습니다. 또 종묘와 사직의 안위에 관계됨이 있는데도 조정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는 것을 생각하니, 그 책임은 마땅히 초야에 있는데 어찌 그 직분에 넘친다고 해서 말도 없이 임금을 등질 수 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상소한 유생 윤선도(尹善道)의 일을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대략 그 줄거리를 아뢰겠습니다.

예조 판서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모양은 이미 윤선도의 상소에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신은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겠으나, 다만 이이첨의 권세는 한 나라를 기울게 하고, 세력은 임금을 핍박하는 것을 길 가는 사람들도 눈을 흘기는데,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윤선도는 일개 서생으로서 종묘와 사직의 위태함을 직접 보고 감히 피가 뚝뚝 드는 소를 올렸으니, 혈기가 있다고 하는 자는 모두 놀라서 뛰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모두 성상을 우러러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라는 것은, 이이첨이라고 하는 자는 마땅히 자리를 깔고 엎드리어 죄를 기다릴 겨를도 없을 것이요, 그의 심복이라고 하는 자들도 또한 의당 두려워할 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은 조금도 반성하여 삼가는 일도 없고 더욱 흉악한 불꽃을 피울 뿐이요, 삼사와 정원의 관원과 반궁(泮宮)과 사학(四學)의 유생에 이르러서는 다만 이이첨이 있는 것만을 알 뿐 임금이 계시다는 것은 모르며, 눈을 부릅뜨고 옷깃을 걷어붙이고 없는 일을 만들어 내고, 반드시 윤선도를 죽을 지경에 빠뜨리려고 하여 급급하기가 오히려 혹시 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니, 그 마음이 있는 곳은 길 가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란 자는 그 부자가 모두 학문이 없는데도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합니다. 게다가 그의 한 아들이 지난해의 식년시에 등과하였으니, 이른바 자표(字標)로써 서로 주고받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마땅히 두려워하고 물러나야 하거늘 꼼짝도 아니하면서 그대로 관직에 있으면서 자기들의 마음대로 하여, 전하의 비답이 아직 내리기도 전에 감히 흉악하고 참혹한 계(啓)를 올려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떠보고, 아래로는 깃발을 세울 땅을 만들려고 합니다. 옛날 우리 선왕께서, ‘다른 날 조정에 서면 그 마음 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신 가르치심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증험되었습니다. 아! 오늘날의 정원과 삼사는 전하의 정원과 삼사가 아니오라, 이이첨의 정원과 삼사이오며, 오늘날의 반궁과 사학은 전하의 반궁과 사학이 아니오라, 이이첨의 반궁과 사학이니, 윤선도가 말한, ‘이제는 이미 덩굴이 뻗어나갔다.’ 한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을 도모하는 것이 빠르지 않으면 세력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춥지도 않은데 떨려 옵니다.

그들이 선도를 무함하는 방법은 그 말들이 비록 많으나 그 요점은 세 가지이니, 곧 역적을 옹호한다는 것, 품행이 더럽다는 것,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등입니다. 역적을 옹호한다는 것은 바로 반역이니 어찌 나라를 근심하여 집안을 잊고, 임금을 사랑하여 몸을 잊는 윤선도와 같은 이가 하는 일이겠습니까. 장식(張軾)의 말에,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감히 간언하는 가운데에서 절의(節義)에 죽는 신하를 찾는다.’ 하였는데, 윤선도가 위엄을 무릅쓰고 권세 있는 간신을 감히 말하였으니,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감히 간한다는 것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역적을 옹호하는 것이 어찌 이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이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역적의 무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한 것이나, 이른바, ‘유영경(柳永慶)에게 보답할 터를 만들고, 김제남의 옥사(獄事)를 뒤집을 계략을 꾸몄다.’ 한 것은, 성상의 총명을 어지럽혀서 반드시 말하는 자들을 불측(不測)한 곳에 처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극히 흉악하고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귀신이 옆에서 증거 하지 않으셔도, 임금께서는 이미 통촉하셨으리라 생각되어 많이 변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전방(李傳芳)이 상소의 속에 엮어 넣은 바와 삼사가 계차(啓箚)에 만들어 넣은 바와 윤선도 부자의 악행이 모두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죄입니다. 또 ‘나라의 언론이 떠들썩하다.’ 한 것은 이 사람에게 참으로 이러한 행동이 있어서 나라의 언론이 떠들썩하다면 유적(儒籍)에서 깎아버릴 수도 있으며, 과거를 못 보게 할 수도 있으며, 풍문(風聞)으로 고증해 볼 수도 있으며, 삼성(三省)에서 교대로 국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당의 우두머리가 나라의 정권을 천단하여 잡고 있고, 그들 당의 무리들이 형조(刑曹)에 깔려 있는데도 일찍이 윤선도 부자의 악행을 말하지도 않다가 이제 비로소 말들을 하는 것은 전하께옵서 궁중 속에 깊이 계시어 비록 바깥의 일을 모르실지라도 이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시면 그것이 무망(誣罔)하다는 것을 밝게 아시고 의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윤선도가 권세를 가진 간신을 극언(極言)할 때에는 어찌 엄청난 화가 곧 이르리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사생(死生)이란 역시 커다란 문제인데, 그가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 죽는 지경에 나아가려고 하였겠습니까? 하물며 그들이 이른바 아비의 권고라 하는 것은 결단코 이러할 리가 없는 것이니 변설(辨說)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발분하여 늠름하고 힘에 차 있으니 반드시 남의 말을 듣고 억지고 지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남의 사주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분명한 일입니다. 아! 이이첨을 칭찬하고, 이이첨에 아첨하는 소(疏)들은 어찌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이이첨의 간사스러운 점을 말한 소만을 홀로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얽어서 일망타진하려는 계략이 분명합니다.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이대(二代)의 이야기에 관하여는 경방(京房)이 옛날 일을 끌어다가 당시의 일에 인용하였는데, 대강 대강 의논한 것이니 당시의 임금에만 적절할 뿐만이 아니고, 그 말은 심각하고 절실하고 명백하여 임금에게 여쭙는 데에 가장 합당하므로 진덕수는 이것을 《대학연의(大學衍義)》에 실어서 임금에게 올렸던 것입니다. 신하로서 진덕수와 같이 임금을 공경할 수 있다면 또한 옳은 일이니, 이것이 과연 잊을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윤선도가 무고를 받은 것은 신이 마땅히 따져서 밝힐 것은 아니오나, 이 일을 따져서 밝힌 후에는 삼사와 정원과 관학(館學)이 이이첨과 죄악을 같이하여 말하는 자를 얽어 빠뜨리려는 뜻이 드러날 것이며, 이것을 밝힌 후에는 이이첨의 도당이 많은 것과 세력이 두려울 정도라는 것과 나라의 위급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그 한둘을 아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 옛날 융성했을 때는 간하는 자를 상을 주어 언로를 열었어도 감히 아뢰는 자는 오히려 얻기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말하는 자를 무거운 형벌로 처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말하는 자를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하물며 말하는 자의 부형을 죄로 다스리는 일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감히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드문 일인데, 어찌 자기의 어버이가 큰 화를 입는 것을 돌보지 않으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도 소인들이 언로를 막는 술책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직언하여 임금에게 꺼림을 당하여 죄를 쓴 사람은 있었으나 그래도 연좌(緣坐)의 형벌은 없었는데, 이제 윤선도는 이이첨에게 장차 연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쉬우나, 권세를 지닌 신하의 과실을 말하기는 어렵다.’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삼사와 정원과 관학에서 이이첨을 대우하는 것이 임금을 대우하는 것보다 지나치다고 하겠으며, 이이첨은 그 권세가 임금을 기울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찌 권세가 임금을 기울게 함이 이와 같이 극하면서 국가가 위태롭지 않았던 때가 있겠습니까?

신의 걱정과 염려가 여기에 미치게 되자, 의분과 한탄과 근심과 두려움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한 자의 상소문을 가지고 대궐에 우러러 외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이첨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얻어 듣고, 그가 친하게 지내는 박안겸(朴安謙)을 시켜 신의 처 사촌 대부(妻四寸大父) 노직(盧稷)에게 말을 전하기를, ‘그대가 이형(李泂)의 상소를 멈추게 하지 못하겠는가? 실제로 중지시켜 보라.’ 하였으며, 또 한림 서국정(徐國禎)이 신의 처 오촌 숙모의 남편 이극양(李克讓)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그대가 이형의 상소를 멈추게 할 수 없는가? 이형이 만약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무거운 화를 당하리라.’ 하고, 또, ‘그대는 왜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 예조 판서에게 힘써 주리라.’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이미 삼사를 사주하여 말하는 자를 다스리고, 또 친한 사람을 시켜 말하는 자를 겁을 주어 멈추도록 하려 하니, 어찌 그가 언로를 막으려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우의정 한효순이 의논을 거두어들이라는 명령을 따라 언로의 중대함을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 씀씀이가 또한 매우 애처로운데도 삼사가 헐뜯고 물리쳐서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므로, 수상(首相)은 병을 핑계 삼아 감히 의논을 제출하지 않고 원임(原任)들은 문을 닫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이이첨의 권세가 어떠하옵니까? 이이첨의 무리는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고 과거 시험장에서 사사로움을 행사하는 일은 따져서 밝히지는 못하면서, 언제나 효성하고 우애 있으며, 청렴결백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역적을 토벌한다고 하니 신은 간절히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효(孝)란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서 비롯하여 임금을 섬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인데, 그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청렴이란 권세를 탐하지도 즐기지도 않는 것인데, 그가 천단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청렴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 가령 그에게 참으로 효행이 있다면 어찌 뒷날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몸이 죽기도 전에 먼저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벼슬자리는 종백(宗伯 예조 판서)에 있으면서 또 자기의 행장을 지어내니 효성 있는 자가 과연 이런 것입니까? 그의 네 아들은 문명(文名)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연이어 과거에 장원을 하였고, 집안이 대대로 본래부터 가난한데도 갑제(甲第)에 대마루가 연이었으니, 청렴한 자가 과연 이런 것입니까? 하물며 역적을 토벌한다는 것은 곧 천지의 떳떳한 법이요, 신하의 대의(大義)입니다. 신하된 자 누가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유영경(柳永慶) 이래의 여러 역적이 반역을 꾀한 죄는 사람마다 잡아서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요, 본래부터 그들만이 토벌할 것을 청한 일이 아닌데도 하늘의 공을 탐내어 자기의 힘으로 삼으려 합니다. 또 ‘역적을 옹호한다.[護逆]’고 하는 두 글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함몰시키려는 기회와 함정으로 여기니, 그가 겉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물리치는 것을 꾀하니 교묘하고도 참혹하다고 하겠습니다. 신경희(申景禧)가 반역을 하려고 음모한 죄상은 소명국(蘇鳴國)의 자백 속에 다 드러났고, 대변(對辯)할 때에 여러 차례 다하였으니, 그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것은 여러 역적과 다름이 없건마는 이이첨은 옹호하려 하고, 삼사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이첨과 신경희가 평소부터 매우 교제가 친밀하였고, 그의 아들이 또한 역적의 자백 속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역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입니까? 이이첨의 무리들은 또 이이첨에게 계책을 결정하여 사직을 호위한 공적이 있다고 해서 자랑합니다만, 예로부터 왕실에 큰 공이 있으면서 끝내는 왕실에 이롭지 못했던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까? 이는 깊이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 윤선도가 권세를 가진 간신을 비평한 이래로 간사한 무리들은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벌떼처럼 왱왱거리며 일어나서 꾸미어 모함하는 참혹함이 저와 같이 극심하였으나, 다행히도 성감(聖鑑)이 매우 밝은 덕분으로 아직 그들이 흉계를 멋대로 하지 못하니, 중외(中外)의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이미 이이첨의 죄를 아시고 계시다.’라고 생각하고, 온통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서로 고하기를, ‘우리나라도 바람직하다.’ 합니다. 그러나 신의 걱정과 두려움은 또한 지난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로부터 권세를 가진 간신은 만약 임금이 자기의 정상을 알고 계신 것을 알게 되면, 죽음 속에서 목숨을 꾀하게 되어 그 극단 한 수단을 쓰지 않는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임금께서 이미 그들의 말을 좇아서 윤선도를 죄주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걱정과 두려움이 지난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는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신은 본래부터 간사한 무리가 모함하여 몸이 반드시 윤선도와 같이 될 것을 알고는 있으나, 말씀을 드려 여기까지 이르고 꺼리는 것이 없는 것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스스로 멎지 않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또 임금께서 위에 계시다는 데에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어리석은 신하의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윤선도의 충성스러운 말을 통촉하시어, 급히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한 죄를 다스리시고, 또 삼사와 정원과 관학이 당을 이루어 나쁜 것을 같이 하고, 임금을 속인 죄를 다스리시어, 종묘와 사직이 억만년 끝이 없이 아름답게 하십시오. [소가 들어가자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가 무오년에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계해년 3월에 용서를 받았다.]

○ 종실(宗室) 귀천군(龜川君) 수(晬) 과 금산군(錦山君) 성윤(成胤) 이 상소하기를, “아뢰옵나이다. 신등은 함께 종척(宗戚)의 신하로서 조정의 일에 관해서는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같아 백에 하나도 모릅니다. 혹 한두 가지 들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폐해가 종묘와 사직을 위태로움에 빠뜨리거나 멸망에 이르도록 하지 않는 것이라면 신등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시비와 득실이 종묘와 사직의 위망(危亡)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존망을 나라와 함께 해야 하는 신들이 어찌 종묘와 사직의 위망을 앉아서 보면서 화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살찌고 여윈 것을 보듯 할 수 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예조 판서 이이첨은 간사하고 표독하며, 괴퍅하고 교묘하게 말을 꾸며 널리 사사로운 당을 심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물리쳐 쫓아내며,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희롱하여 위엄과 권세가 날로 융성합니다.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는 비록 어리석고 무디어 염치가 없고 말과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자라도 반드시 이끌어 올라가게 하고,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는 비록 경전에 밝고 품행이 닦이어져서 세상이 중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드시 배척하고 물리칩니다. 그래서 권세의 불꽃은 하늘을 찌르고 길가는 사람은 눈을 흘기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은 혀를 묶어 두고 머리를 움츠리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구름처럼 몰려듭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조정의 신하들은 비록 혹은 그 세력에 아부하지 않았던 자라도 만약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문에 뵙지 않으면 능히 보전하는 자가 드뭅니다. 그러므로 밤이면 천정을 우러르고 길게 탄식하며, 낮이면 그 문밖에 종년처럼 무릎을 구부리어 마치 시장에 몰려드는 듯합니다. 악한 일을 같이 하는 자에 대해서도 혹 한둘의 일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마음에 어그러지면 온갖 계책으로 몰아 중상하여 반드시 물리친 후에라야 그칩니다. 사람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못하니, 누가 사생(死生)을 잊고 권세의 불꽃에 부딪쳐가면서 전하를 위하여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에 이이첨의 세력은 아래에서 날로 융성하지만, 전하의 세력은 위에서 날로 외로워져서, 위태롭고 멸망할 화는 급하기가 조석에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알 길이 없으니, 설사 충신과 의사들이 비분강개하여 이와 같은 정상을 아뢰려고 한다 해도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커다란 화가 곧 이르러 한갓 죽을 뿐 이익될 것이 없으므로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이 한 방안에서 이야기하다가 말이 이이첨에게 미치면 입을 가리고 손을 휘저어 멸족(滅族)이라는 말로 서로들 경계합니다. 아! 나라의 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크게 걱정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야(草野)의 신하 윤선도가 강개하여 글을 올려 감히 말한 일은 비록 송(宋) 나라의 호전(胡銓)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정원(政院)이 먼저 발의(發議)하고 삼사가 계속 일어나며, 사학(四學)과 반궁(泮宮)이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여, 하나는 역적과 당을 이룬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어진 사람을 모함한다고 하니, 이른바 반역이란 전하에게 반역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이첨에게 반역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른바 어진이란 과연 누굽니까? 만약 저를 공격하는 말을 가지고 지적하여 역적이라 한다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이에 이르러 뚜렷합니다.

아!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것은 신하의 극악한 대죄(大罪)입니다. 이런 이름이 한 번 자기에게 붙여졌으니 이이첨은 마땅히 자리를 깔고 물을 마시며 부월(鈇鉞)을 기다릴 겨를마저 없을 것인데도 태연히 집안에 있어 더욱 그 표독함을 멋대로 하고, 삼사를 불러 모으고 관학(館學)을 지휘하여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고, 스스로 자기의 몸을 칭찬하여 심지어는 배도(裵度)와 한기(韓琦)에까지 견주고 있습니다. 아! 이이첨은 그만두고라도 삼사라는 것은 전하의 눈과 귀요, 관학이라는 것은 공론(公論)이 있는 곳인데도 악한 짓을 같이 하여 서로 도우며 이이첨을 칭찬하고 기리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오늘날의 삼사가 전하의 삼사이온지 아니면 이이첨의 삼사이온지 모르겠습니다. 나라의 권력이 이미 이이첨에게 돌아간 것을 이에 의거하면 알 수 있겠습니다. 옛날 왕망(王莽)이 태아(太阿)를 거꾸로 잡았을 때 장우(張禹)ㆍ공광(孔光)ㆍ두흠(杜歆)ㆍ곡영(谷永)의 무리가 서로 더불어 찬성하였고, 글을 올려 왕망을 칭송하는 자가 48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간사한 신하가 나라를 천단하면 위엄과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고, 아첨이 풍속을 이루는 것은 옛과 지금이 꼭 같은 것이므로 찬성과 칭찬이 많이 이른다고 해서 그것을 다 공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삼사와 관학이 도리어 직언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이이첨을 칭송하는 것이 이렇게 극심한 정도에까지 이른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만약 이러한 일이 멎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를 헤아리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십시오.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는 말하는 것이 쓸 만하면 쓰시고, 쓸 만하지 못하면 그대로 두셔야 합니다. 만약 말하는 자의 의논한 것이 그때의 의논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곧 배척하고 깊이 다스린다면 간사한 자가 나라를 맡게 되어 아뢰는 말은 반드시 모두 아첨하는 말일 것이며, 충성스럽고 곧은 의논은 이를 길이 없게 될 것이옵니다. 옛말에, ‘크게 간사한 것은 충성스러운 듯하고, 크게 속이는 말은 미더운 듯하다.’ 하였으니, 전하께옵서 이이첨을 돌보고 의지함은 총명에 가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이이첨을 구제하는 자는 반드시 그를 역적을 토벌한 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한다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며 고금의 상경(常經)이니, 전하의 조정의 신하로 누가 역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겠으며, 누가 역적을 토벌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아침에 기록할 만한 공적이 있는데 저녁에 용서하기 어려운 죄를 범했다면, 그를 공적이 있다고 해서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겠습니까? 이이첨은 간사하기가 이와 같으며, 위엄과 권세가 이와 같으며,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희롱하기가 이와 같으며, 국가가 위급하기가 이와 같으며, 사람의 마음이 울분하기가 이와 같은데도 종묘와 사직에 해로움이 없다는 것은 신은 여지껏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이첨이 없는 말을 지어내어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하여 쫓아내며, 과거와 아름다운 벼슬로 사람의 마음을 거두어 들이어 세력을 좇고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요로에 가득차 있으니,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아!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데에 이르고, 잃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은 반드시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앞서서 매사에 경계하심이 엄하고도 또한 절실합니다.

전하께서 윤선도의 일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한 것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어떠한가를 아시려고 한 것이온데,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은 흉악한 불꽃이 두려워 병을 핑계하여 의논하지 않았으며, 우의정 한효순(韓孝純)도 역시 그의 권세가 두려워 기운은 모자라고 말은 더듬거리며 대략 언로(言路)의 몇 글자를 아뢰었으나, 삼사의 공격은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니, 임금을 잊고 당을 옹호함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여항의 어리석은 지아비나 어리석은 지어미도 팔뚝을 불끈 쥐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 없는데, 다만 전하만이 궁궐 속에 깊이 계시어 아직도 듣지도 아시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이제 윤선도의 상소가 한번 전하께 아뢰어졌으니, 이이첨이 마음대로 희롱한 죄를 임금께서도 반드시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다만 용단으로써 내치지 못하신다면 뒷날의 우환은 오늘보다도 더 심함이 있을 것이 두렵습니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임금이 신하에 대한 걱정은 그들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는 데에 있으나, 간사한 줄을 알면서도 용서하여 주면 알지 못한 것보다 못하다. 무어 때문에 이런가 하면 저들이 혹 간사한 일을 하였는데 임금이 모르면 오히려 겁내는 바가 있지만 알면서도 능히 물리치지 못하면 저들이 족히 겁낼 것이 없는 줄 알고 방종하여 꺼리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선한 줄 알고도 쓰지 못하고, 악한 줄 알고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임금으로서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등의 생각으로는 사마광의 이 말은 바로 오늘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등과 이이첨은 본래 원수진 일이 없고 또한 권력을 다투어 모함한 일도 없으므로, 그가 비록 뜻을 얻는다고 해도 신등에게 무슨 해가 되며, 그가 비록 뜻을 잃는다고 해도 신등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다만 신등은 모두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야 할 신하로서 종묘와 사직의 위태로움과 멸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생각한 바를 펴지 않는다면 ‘종자(宗子)는 성(城)이로다.’라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등은 아침에 이 소를 올리면 저녁에 삼사가 죄를 청함이 윤선도보다도 더할 것을 잘 알고는 있으나, 충성스러운 의분이 격하게 되었는 바 말을 제재할 줄을 모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한 사람의 권세를 가진 간신을 내치시어 종묘와 사직을 편안히 하시고 삼사가 악한 것에 당을 이룬 죄를 다스리신다면, 종묘와 사직에 심히 다행이겠으며 백성에도 심히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

소를 바치자 멀리 귀양을 갔다. 금산군(錦山君)은 남해(南海)에 있다가 신유년 봄에 병으로 졸하니, 임금은 가엾게 여겨 사도(四道)의 감사(監司)에 명하여 호상(護喪)하고 예장(禮葬)케 하였다. 귀천군(龜川君)은 순천(順天)에 있다가 신유년에 용서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으며, 아울러 옛 벼슬에 복직되었다.

○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서로 한 곳에 모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화해를 하였다. 이이첨이 먼저 읊기를

봄을 찾는 즐거운 놀이가 아니라 / 不是尋春樂事忙
다만 서로 모여 마음속을 말하기 위함이다 / 只要相會話心腸
매화 꽃도 역시 우리의 뜻 이해하고 / 梅花亦解吾人意
먼저 온화한 날씨를 차지하고 그윽한 향기 보내누나 / 先占天和送暗香
하니, 박승종(朴承宗)이 차운하기를

9일 동안 바빴다가 10일만에 찾으니 / 十日相尋九日忙
이제껏 품은 회포 몇 번이나 애태웠는고 / 向來懷抱幾回腸
매화는 차고 대나무는 야위어 맑은 운치 같이 하니 / 梅寒竹瘦同淸標
꽃다운 술항아리 내온(궁중의 술) 향기에 모두 취하는구나 / 盡醉芳樽內醞香
하니, 유희분(柳希奮)이 차운하기를

그대는 한가함과 바쁨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 憑君休道異門忙
다만 철석같은 심장이 더욱 굳기만 원할 뿐 / 但願彌堅鐵石腸
오얏은 희고 복사는 붉은 것 전혀 관여할 게 못 되나니 / 李白桃紅都未管
추운 겨울 송백같이 성명의 향기를 보전하기 기약하세 / 歲寒期保姓名香
하니, 이창후(李昌後)가 이어서

주연의 예가 끝나자 문 나서기 바쁘구나 / 冑筵禮罷出門忙
신선의 차를 얻어 뱃속을 적시기 바라네 / 請得仙茶潤肺腸
이 모임 우연이 아님을 응당 알 것이니 / 此會應知非偶爾
만난 이 장소에서의 작은 매화 향기를 모름지기 기억하소서 / 果場須記小梅香

하였다.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은 대북의 거두요,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과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은 소북의 우두머리이니, 세상에서 일컫는 바, ‘삼창(三昌)의 권문(權門)’이다. 이창후는 대북 사람이었다. 두 북파가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보다도 심하였다. 이경전(李慶全)이 두 당파 사이를 조정하여 서로 화해시키려고 하여 이렇게까지 했다고 하나, 그후에 더욱 화합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또 이이첨의 말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에게 시집가서 지금은 세자빈(世子嬪)의 부모가 되었는데도 피차 눈을 흘기고 서로 원수로 여겨 이에 이르렀으니 당시의 일을 알 수가 있다. 그때 서인과 남인은 침체해 있었고 두 북파만이 서로 이와 같았다. 이이첨 등의 권세가 날로 융성해지자 서인과 남인으로 아부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 역적 허균은 광해가 일에 낭패하여 나라를 기울게 하려고 몰래 그의 당인 유생과 여러 관원들을 꼬여 흉악한 의논을 제일 먼저 제기하였다. 그러자 유학 이지호(李志浩)ㆍ한보길(韓輔吉)ㆍ윤유겸(尹惟謙), 생원 김우성(金宇成) 등은 잇달아 상소하여 대비를 폐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서 관학ㆍ삼사가 연일 정청(庭請)하니, 임금은 신료들에게 의논을 모으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기자헌은 차자로 불가함을 논하고 서강(西江)으로 나가 명을 기다렸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여러 상소가 묘당에 내린 일을 계하(啓下)하라 하셨는데, 신은 본래 학식이 없는데다 재주는 용렬하고 인망은 박하나, 마침 사람이 모자라는 때를 만나 정부(政府)에 인원수를 채우고 있습니다. 신이 만약 주장하여 곧 대비를 폐하게 되면, 국사(國史)에, ‘아무개가 마음대로 대비를 폐했다.’ 하여 기록될 것이니, 비단 만세의 공의(公議)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전하의 수치가 될 것이고, 임금께서도 역시 반드시 신 등이 마음대로 폐한 일을 죄주시어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달 대간(臺諫)이 전하와 대비는 따로따로 거처해야 한다고 논의했을 뿐인데도 또한 삭직(削職)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만약 이러한 폐비(廢妃)의 일이 있게 되면 일후에 혹 신등을 죄주기를 청하는 자가 있을 때, 임금의 자비하심으로도 반드시 용서하시지 못할 것이옵니다. 하물며 지금 영부사(領府事) 이항복(李恒福)과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은 밖에 있고, 전 우상 정창연(鄭昌衍)은 두문불출하고, 지금 우상 한효순(韓孝純)은 병중이라고 여쭌 지가 여러 날이어서, 대신들 중에 홀로 신만이 서울에 있어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데에 힘을 쓰고 있으나, 이와 같이 막중한 일을 어찌 홀로 스스로 잘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또 계축 연간에 여러 대신들이 계사(啓辭)를 올렸을 때 신도 또한 그 속에 끼어 있었는데 ‘비록 인자하지 못하더라도’란 등의 말이 있었으니 전과 후에 의논을 달리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에 이원익이 귀양을 갈 때 삼사에서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본래 대비를 박해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이원익이 늙고 패려하여 망령된 말을 하여 성상에게 나쁜 이름이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원익이 비록 경자 연간에 전하께 충성을 다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또 죄를 얻어 떠나는 것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중외(中外)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우순(虞舜)의 품행이 있으시어 위대한 성인의 성덕을 삼가 우러르지 않음이 없으시다.’ 하옵니다. 여러 상소의 뜻을 가지고 살펴보면, 신은 이미 일찍이 계축 연간의 대신들의 계사에 참여하였으니 신은 바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외람되게 재상의 관직에 참여한 지가 이제 4년이 되어 지극히 편안치 못하고, 또 언제나 해조(該曹)의 전관(傳關) 및 하리(下吏)들의 청고(請告)를 보면, 대비께 문안을 드리는 일은 예를 좇아 행한다 하오니 신의 죄 크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대학연의》를 보니, 장구령(張九齡)이 황후를 바꾸어 세울 때에, ‘신은 감히 조칙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한 말이 있는 것은 바로 죽어도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이며, 진덕수가 이를 칭찬하였습니다. 제가 망령된 마음으로 장구령을 본받으려고 하여 일찍이 ‘백관들이 신(臣) 자를 대비에게 쓰고 숙배(肅拜)하는 것을 만약 바꾼다면 이는 사람에게 반역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내 이 일이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요량하고 혹 난(亂)을 부릴까 두려워하며 스스로 죄에 저촉될 줄을 몰랐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여러 상소는 내용이 너무 길어서 비록 상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나, 대비를 폐하는 일은 실로 전에 없던 일로서 놀라고 당황스러울 뿐, 어떻게 처리해야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강씨(姜氏)와 무후(武后)의 일은 그것이 과연 하나하나가 다 이와 같은지 모르겠으나, 진(晉) 나라 혜제(惠帝) 때의 양태후(楊太后)의 일은 망령되이 말한 듯하니 어찌 전하의 세상에 그것을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때 장화(張華)는 의당 별궁(別宮)에 거처하여 처음과 끝을 보전해야 한다 했는데, 이는 다만 지난날 대비께서 각기 거처해야 한다는 의논과 같을 뿐이고, 왕황(王晃) 등은 폐할 것을 오로지 주장하였습니다. 주희(朱熹)는 《강목(綱目)》을 편수할 때 동양(董養)의 말을 취하여 기록했으되 다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뒤에 과연 오호(五胡)가 중화를 어지럽게 한 일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에 대략 쓰기를, ‘동양이 태학에서 공부할 때 당(堂)에 올라 조정에서 이 당을 세워서 장차 무엇을 하려 하는가? 하늘과 사람의 의리가 이미 없어졌으니 대란(大亂)이 장차 이를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하였는데, 진덕수는 논하기를, ‘심지어 모후까지도 또한 폐욕(廢辱)에 걸렸으니 너무 심하지 않겠는가?’ 하고, ‘하늘과 사람의 의리가 이에 싹 없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식자(識者)들이 커다란 난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이를 끌어당겨 예로 삼을 수 없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장후(張后 당 나라 숙종의 왕후)에 대해서 주희는 이보국(李輔國)이 죽였다고 《강목(綱目)》에 특서하였고, 안진경(顔眞卿)으로 말하면 숙종(肅宗) 때에 봉주 장사(蓬州長史)로 좌천되었다가 대종(代宗) 초년에 이주 자사(利州刺史)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니, 그때에는 조정에 돌아와서 찬성(贊成)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찬성 양관(楊綰)도 또한 장후의 일을 언급한 적이 없으니, 이 말이 어느 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염후(閻后)는 처음에는 임금의 어머니를 죽였고, 중간에는 임금을 폐하고 북향후(北鄕侯)를 세웠으며, 나중에는 북향후가 죽자 또 다른 사람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흉악하고 참혹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주거(周擧)가 이합(李郃)에게 한 말을 취하여 쓰기를, ‘옛날 고수(瞽瞍)는 늘 순임금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순임금은 그를 모시기를 더욱 삼갔으며, 정(鄭) 나라 무강(武姜)이 장공(莊公)을 죽이려고 꾀하니 장공은 황천(黃泉)을 두고 맹세하였고, 진시황은 그의 어머니가 행실을 잃은 것을 원망하여 오랫동안 격절(隔絶)되었었으나, 나중에는 영고숙(穎考叔)ㆍ모초(茅蕉)의 말에 감동하여 다시 아들의 도리를 닦았으므로 《서전(書傳)》에는 그것을 찬미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염(閻)씨들이 새로이 죽음을 당하고, 태후는 이궁(離宮)에 유폐되었으니, 만약 슬픔과 시름에 겨워 병이라도 생겨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주상께서는 무엇으로 천하에 영을 내리시겠습니까? 의당 은밀히 조정에 표(表)하여 태후를 모시게 하도록 하시고, 군신들을 거느려 옛날과 같이 조근(朝覲)하시어 천심을 진정시키시고 사람들의 바람에 보답하십시오.’ 하였습니다. 이합이 즉시 상소를 올려 이것을 아뢰니, 이듬해에 순제(順帝)는 염후를 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주거(周擧)의 말에 대하여 죄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 말을 따라 하였으니 또한 가상한 일이겠습니다.

진관(陳瓘)의 너무 극심하다는 말도 또한 옳지 못한 것입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일은 죽은 뒤에 빈말만으로 처리한 일로 지금은 해마다 한식(寒食)에는 그를 제사지내니, 또한 오늘날 비길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여러 상소의 결론은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대비를 처분하라는 데 있습니다. 임진년 이후에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을 중국 조정에서 간섭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상서(尙書) 정응태(丁應泰)ㆍ조즙(趙楫)ㆍ이성량(李成樑) 등의 족당(族黨)이 또한 반드시 아직도 살아 있는 자가 있어, 만약 그들이 우리 나라에 일이 있다고 듣는다면 뜻밖의 환난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상소 중에 힐문하는 일이 있을까 두렵다고 한 한 조목은 대략 신이 우려하는 바와 거의 같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욕심이 끝이 없는데, 만약 이 기회를 탄다면 수만 냥이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만약 혹 동양(董養)ㆍ진덕수(眞德秀)가 말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근년에 반역에 관계된 역관(譯官)을 중국에 보내지 않은 것은 앞을 내다보고 먼 앞일을 헤아린 것입니다.

또 상소 중에 군현(郡縣)의 요청이란 것은 말하자니 기가 막히는 것이요, 진강(鎭江)의 유격(遊擊)이 두렵다는 말은 소견이 없는 바는 아닙니다. 거기에서,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낸다.’느니, ‘천자에게 고한다.’느니 한 것은, 바로 잠든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격으로 일이 없는 곳에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일에 임하시어 두려워하시고, 깊이 생각하고 익히 헤아리십시오. 신은 비록 불초하나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만은 소원한 사람보다 아주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신의 뜻과 견식은 어둡고 막히어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에 드시도록 하고 싶어도 스스로 의논을 세우지 못하고, 사마광ㆍ주희ㆍ진덕수 등 여러 사람의 말을 삼가 주워서 감히 이에 먼저 의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고 극히 처리하기 어려운 일인데, 상소를 올린 자들은 남에게 미룬다고 신을 비난하니, 전하께서도 역시 인정(人情)을 아실 것입니다. 요즈음 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남에게 미루는 자가 홀로 신에만 그치지는 않을까 합니다. 만약 신의 의논이 헛되고 망령된다면 비록 내쫓음과 죽임을 가한다고 해도 또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감히 ‘집에 있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하겠습니까? 이항복(李恒福)ㆍ정인홍(鄭仁弘)ㆍ정창연(鄭昌衍)ㆍ한효순(韓孝純) 등에게 물으십시오. 또 널리 정의(廷議)를 거두시어 처리하신다면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좋은 계책을 바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주D-001]배도(裵度)와 한기(韓琦) : 배도는 당 나라 대신이요, 한기는 송 나라 대신인데 다 어진 사람이다.
[주D-002]왕망(王莽)이 …… 때 : 권세를 남에게 빌려주어 자신이 그 해를 입는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매복전(梅福傳)에 태아를 거꾸로 잡고 자루를 초(楚) 나라에 주었다고 하였다. 태아는 칼 이름이다.
[주D-003]공급(孔伋) : 공자의 손자, 자는 자사(子思). 《예기(禮記)》에 급(伋)의 처는 백(白)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였다. 백은 급의 아들이다.
[주D-004]영위(令威) : 정령위(丁令威)란 사람이 도술을 배워 학(鶴)이 되어 갔다가 천년만에 요동에 돌아와 공중에 배회하면서 말하기를, “성곽(城郭)은 예 같은데 사람은 아니구나.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고 무덤만 유류(纍纍)한가.” 하고, 다시 날아갔다. 《수신기(搜神記)》
[주D-005]목(木)과 결(結) : 목은 무명배, 결은 결복인데 옛날에 토지세를 결복이라고 한다.

 [자료수집]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번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