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 사숙공묘소 중심 수호지(先祖 思肅公墓所 重尋 守護志)       

                   (원문)

(역문)

 선조 사숙공묘소 중심 수호지 

 公이 元順帝至正二年壬午(원나라순황제 2년 임오) 즉, 우리나라의 고려 충혜왕 3년(단기3675 서기1342년) 4월 13일에 서거하시니 동년 8월 21일 장단부 북방 십오리 지점의 東道面 細谷山 酉坐巽得丑破局(동도면 세곡산 유좌손득축파국)에 예장하였다.그 후 얼마지 않아 고려에서 조선으로 혁명되는 와중에 묘소의 관리가 소홀하여 묘비까지도 유실되게 되었다.

 장례 후 113년이 되는 이조 단종 2년(갑술 단기3787 서기1454년) 2월에 현손 五代孫 右議政 確(우의정 확), 府使 瑞龍(부사 서룡), 縣事 黎(현사 려), 泰敎 瑞鳳(봉교 서봉), 丞 瑞龜(승 서구), 六代孫 少尹 明澮(6대손 소윤 명회), 敎理 繼禧(교리 계희), 錄事 明진(녹사 명진), 司直 繼善 (사직 계선), 大護軍 終孫 (대호군 종손) 등이 새로 墓碣(묘갈)을 고쳐 세웠으나 그 후 또다시 임진왜란의 7년 병화로 경기 일대가 휩쓸려 산소를 잃어버리고 석물까지도 전부 유실되었다.  묘갈을 세운 甲戌年(갑술년)부터 155년 후인 萬曆(만력) 36년(戊申(무신) 선조 41년 단기3941 서기1608년) 여름에 후손 孝純(효순)이 松都留守(송도유수)로 있었는데 孫熙祖(손희조)라는 선비가 부친 되는 順良(순량)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근처 長湍(장단) 땅에서 우연히 옛 비석이 발견 되었는데 부셔져서 그 형태가 완전하지는 못하나 高麗侍中韓渥之墓(고려시중한악지묘)라는 刻字(각자)가 있고 후면에도 기록된 陰記(음기)가 있다 하므로 孝純(효순)이 그 장소에 달려가 자세히 살펴본 즉 이 비석이 민가의 柱礎(주초)와 섬돌 사이에 매몰되어 있는데 과연 壬午(임오)年에 처음 세운 비석임에 틀림이 없었다.그리하여 다음해 己酉年(기유년) 봄에 다시 묘 앞에 세우되 甲戌年(갑술년)에 세웠던 비석과 이 故碣(고갈)을 나란히 함께 세우고 양 편에 이 사실을 새겨 두었다. 그러나 그 때는 光海亂政時(광해군의 어지러운 때)가 되어서 國事(국사)가 혼란에 빠져 私家(사가)의 일을 돌 볼 여가가 없음으로 인하여 또 다시 실전되었다.

 그러나 42년 후인 孝宗 3년(효종 3년 壬辰 단기3985 서기1652년)에 후손 碩中(석중)이 묘 자리를 구하려고 산을 둘러보다가 묘갈을 발견하게 되어 이 산소를 찾았고 그 후 152년 되던 純祖 4년(순조 4년 甲子 단기4137 서기1804년) 가을에 후손 光燮(광섭),大裕(대유), 興裕(흥유), 用龜(용구), 用鐸(용탁) 등이 여러 종인과 합력하여 새로운 묘갈과 床石(상석), 望柱石(망주석) 등을 갖추고 산소도 개봉축하였으며 이와 같이 여러 차례 실전하였다가 찾은 사실을 譜冊(보책)에 등재하여 이후 천만대라도 명백한 고증이 되게 하려 함이다.
16대손 光燮(광섭) 謹識(근식)

 [자료수집]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 상세편(上世篇)180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