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본문(本文)                          
      간행년대 1617년(광해군 9)
      古4650-74
      1책(71장) 판본 목판본 사이즈 35×28cm.

"淸州韓氏 집안의 事蹟과 系譜를 수록한 책. 표지서명은 “韓氏事蹟”으로 되어 있다. 책의 전반부는 <淸州韓氏前代事蹟>이라 하여 각종 기록에 나타나는 선조들의 사적을 수록하였으며 후반부는 <淸州韓氏世譜>라 하여 譜圖를 수록하였다. 前代事蹟에 수록된 인물은 시조인 韓蘭을 비롯하여 韓康, 韓謝奇, 韓渥, 韓方信, 韓脩, 韓尙質, 韓明澮, 韓忠 등이다. 이어서 韓浚謙이 지은 <淸州韓氏始祖遺基敍事碑>를 실었고, 다음에 <內外後誕王后世系>에서는 淸州韓氏의 內外孫으로서 王后가 된 사례를 모았다. 다음에 韓百謙이 淸州牧使로 있을 때 지은 <返始堂記>를 실었다. 世譜의 첫머리에는 韓赫과 韓孝仲의 跋文이 있는데 年紀는 萬曆 丁巳年(1617년, 광해군 9)이다. 발문의 내용을 보면 韓孝純이 소장하고 있던 草譜 2권과 韓孝仲이 수집한 1권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과 남자를 먼저 적고 여자는 나중에 적으며 外孫은 적지 않는다는 원칙을 밝혔다. 다만 그 원칙이 編帙과 考閱의 편이를 위한 것이지 外孫에게 薄한 것이 아님을 함께 밝혔다. 世譜의 구성은 7층도로 되어 있으며 20대까지 수록하였다. 이 중 8대인 韓謝奇까지는 單系로 내려오며 9대와 10대에서 계파가 나뉜다. 수록된 계파는 韓公義派, 韓公衍派, 韓方信派, 韓永派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말미에는 失源한 家系를 따로 수록하였다. 각 인물의 수록 내용은 字, 號, 生年, 과거급제, 최종관력, 封爵, 諡號, 묘소의 위치, 배우자의 인적사항 등이며, 女의 경우는 사위의 이름과 관직을 적었다. 마지막 장에는 萬曆 45년 丁巳에 西原(淸州)의 菩薩寺에서 開印하였다는 것과 승려 5인, 刻字, 色吏戶長, 有司 등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명기하였다. 이 부분은 2장에 반복되어 실려 있다. 17세기 초반에 작성된 족보로서 가치가 있다. 한편 같은 규장각도서인 ≪淸州韓氏族譜≫<古 4650-75>는 이 책을 바탕으로 편찬된 것으로서 본책의 발문에서 밝힌 원칙과는 다른 원칙에서 譜圖가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비교 자료로서 주목된다. (윤경진)

  [자료수집 : 규장각]

 ○ 황명만력정사보(皇明萬曆丁巳譜) 서문

(원문)

 初校 族譜 跋
歲乙巳孝仲爲成歡督郵適韓君百謙來牧本州首訪始祖太尉公遺基謀所以設壇立碑以爲後孫依慕之地孝仲亦參助而成之後十年孝仲又錦還于玆邑復修壇上床具以備前人之未遑者一日與宗人前參奉韓赫語及於此曰吾韓大姓世有名顯莫非太尉公積累之餘慶而爲子孫者曾不是念昧於世系有同忘本良由宗法旣壤家無譜牒而然也今日之務莫切於是豈徒瞻掃封壇仰想芳躅而己哉思與宗人旁搜博訪撰次昭穆使吾身知其一源之出凡我宗人合亦謀諸赫曰噫余亦有志於此嘗搜輯有年而只恨其無可與共事者地主之言及此此誠吾門之大幸也事非偶然時不可失卽抵洛遍求宗門之家牒韓相國孝純出其所藏初稿與之竝以手錄一本以資其參考孝仲又搜聚湖西子姓之家譜若于較其同異反覆詳證只錄子姓而不及外孫者要在編帙不繁考閱簡易豈厚於內而簿於外也刪其支煩裏爲一部於是捐捧鋟梓以圖不杇在滿宗人隨力出財以助其役者亦多焉第以倉卒裏集必有關略未盡之處姑俟後人之考證增刪云
有明萬歷丁巳孟春
後孫 通訓大夫行西原縣監 孝仲 謹跋

(역문)

 초교 족보 발        
을사년에 내가 성환 독우로 있을 때 마침 한백겸이 청주목사로 와서 먼저 시조 태위공의 유기를 찾아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후손들의 의모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나도 참여하여 조력한바 있었다. 10년 후에 다시 내가 청주읍의 성주로 금의환향하게 되어 다시 단을 개수하고 상구를 장만하여 전인이 미처 못 한 것을 구비하여 놓았다. 하루는 참봉 한혁과 더불어 담화하던 중 "우리 한씨가  대성으로서 세세로 명성을 떨친 것은 태위공의 덕을 쌓은 음덕인데 자손된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런 생각조차도 없이 집안의 계통에 어둡고 조상의 근본까지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종중에 규율이 없고 가문에 족보가 없는 까닭인지라 오늘날 할 일이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없는데 다만 제단이나 꾸미고 선조 유업이나 추모하는 정도로 지나고 말 것인가.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자료를 찾아 모으고 계대의 상하 종지를 분명히 밝혀서 우리가 한 핏줄에 태어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알도록 하자고 생각하는데 여러 일가 어른들은 이 일을 같이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 하였더니 혁이 감탄하여 이르되 "나 역시 여기에 뜻한 바가 있어 자료를 수집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한이었는데 이제 성주의 말씀이 이렇게 간곡 하시니 진실로 우리 문중의 큰 행운인지라 막중한 이 일이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니고 시기도 또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하고 즉시 서울에 가서 각 종문에 순방하면서 가첩을 수집하였다. 정승 한효순은 소장하였던 초고를 내주고 또 수록한 참고자료 한권까지도 제공하여 주었으며 나는 또 호서의 일가집 가보를 수집하여서 그 다른점 같은 점을 대조하여 바르고 틀린점을 여러 차례 수정하였으며 자손들만 기록하고 외손까지 넣지 못한 것은 편찬이 평이하고 보기가 간명하도록 하고자 함이요 본손 만을 중히 여기고 외손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간명하게 일부를 편찬하여 영구히 전하려고 인쇄하게 되었는데 충청도 종인 중에 가세에 따라 비용을 마련해서 조력한 분이 많았다. 창졸간에 수집한 것이라 필연코 소루하고 미비한 것이 많을 것이다. 후인들이 잘 고증하여 증보하고 삭제하기 바란다.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단기3950년서기1617년 광해군9년)정월
후손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 효중 삼가 씀

(원문)

 初校 族譜 跋            
惟我淸州韓氏有聲於吾東方殆將八百年矣家乘之相傳譜牒之行世者盖亦有之而降及來雲散逸無徵雖或有一二存者不過各爲支宗譜其近派而己未有收宗族而統始祖者亦未有繡諸梓而傳於後者以故世系不明骨肉無統旣不知來處又焉知尊祖敬宗底道理哉赫嘗慨然於斯欲一謀於宗族者素矣乃者姓孫孝仲甫剖符貫縣牧民之暇念及於此乃進赫而言曰吾欲刊行世譜以壽其傳子合爲我成之赫曰此乃赫向來志願而今承隆委敢避當仁於是抵洛謁諸今右台相公孝純告以此意相公大悅出其所藏草譜二卷而與之又馳書于洛下諸宗人所使之書送各派其間雖或有不爲樂應者旣律相公所賜草譜而歸與孝仲所嘗裏集一帙較其同異俾歸於正合爲一卷凡所撰次皆就質於使君又與子姓士人韓韓潭韓純立韓岌等共其參考焉先男後女而不及外孫重宗緖也王后世系不論內外而載之別板尊君父也摘出碑銘地志等文字書諸上頭明事述也若其同姓之散居諸道者與夫後生之未及知名者雖或脫漏而旣書祖考名號則爲後昆者可因是而知其來派矣鳴呼是譜也宗支甚明昭穆不紊世之先後族之親疎井井昭昭一披在目親親睦族奚止一門他日朝廷必有所益云時
有明萬歷丁巳孟春上澣
後孫 前叅奉 赫 再拜 敬跋

(역문)

 초교 족보 발
우리 청주한씨가 동방에서 명성을 떨쳐온 것이 거의 800년이 된다. 가승(家乘)이나 보첩(譜牒)이 전하여 오는 것이 있었는데 후대에 와서는 흩어지고 없어져서 찾아 참고할 수가 없고 혹시 한둘이 있다 하더라도 각자 자기파의 종지(宗支)를 위한 파보일 뿐이요 시조 이하 전 종족(宗族)을 통합한 것이 없고 또 이것을 인쇄하여 전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世系)에도 어둡고 친족간에도 계통을 몰라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어찌 조상을 숭모하고 일족을 경애하는 도리를 알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것이 걱정되어서 종친들과 의론하려던 차인데 마침 효중씨가 목민관으로서 공무에도 바쁜 여가에 여기까지 생각을 하시고 나에게 하는 말이 "내가 족보를 만들어 후대에 전하여 주고자 하는데 그대가 함께하지 않겠는가"하기에 나는"이것이 바로 나의 소원인데 이런 좋은 소임을 감히 회피할 수 있겠는가"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가서 좌의정 효순을 뵙고 이런 의도를 고 하였더니 공께서 매우 좋은 생각이라 찬성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초보 2권을 내 주시고 서울의 여러 종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각파에 통문을 발송하도록 지시하여 주시었다. 그 중에는 혹 이행하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상공의 초보를 가지고 와서 효중씨가 수집한 일질 보첩과 대조 교정하여 합편으로 한권을 꾸몄다. 책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성주(현감 孝仲)님의 지도에 따르고 종인 중의 한율, 한담, 한순립, 한급 등이 협력하여 주었다. 기록에 있어 남자를 먼저 여자를 뒤에 하였으며 외손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본종(本宗)에 중점을 둔 것이요. 왕후 세계는 내외를 막론하고 별판(別板)에 기재한 것은 군부를 존경하는 뜻이요. 비명(碑銘) 지지(地誌)등 문자를 앞에 쓴 것은 사적(事蹟)을 밝힌 것이요 각 도에 흩어져 사는 일가나 후생으로서 알지 못하여 누락된 사람도 그 조고(祖考)의 명함과 호가 기재되어 있은즉 이것만으로도 그 래파(來派)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 이족보가 가문의 계통이 분명하고 소목(昭穆)이 효연(曉然)하며 세계(世系)의 선후 종족의 친소기 밝고 환하여 한눈에 볼 수 있으니 친친목족(親親睦族)이 우리 문중에 한한 문제일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유익하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단기3950년서기1617년 광해군9년)정월 상한
후손 전 참봉 혁 재배 경발

[자료수집]
[황명만력정사보(皇明萬曆丁巳譜)]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 상세편(上世篇) 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