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학공 휘 사기(提學公 諱 謝奇)

 

寶文閣 提學公(諱 謝奇) 史蹟

<原文> 麗史略曰忠烈王元年乙亥六月甲子新定禿魯花(按禿魯花猶華言質子也)超三等職送之道校署令韓謝奇康之子樞密李汾禧之壻年末二十超拜八品ㅇ五年己卯三月丁巳遣帶方公澈率禿魯花入元金方慶子欣元傳子貞朴恒子元타許珙子評洪子藩子順韓康子謝奇薛公儉子之沖李尊庇子瑀全周鼎子深等衣冠子弟凡二十五人皆超三等授職送之ㅇ文惠公本傳略曰子謝奇官至諫議大夫子渥泳初謝奇以禿魯花설家入元泳幼長贊穀事仁宗皇帝官至河南路摠管以泳貴贈謝奇翰林直學士高陽縣侯ㅇ洪奎列傳略曰忠烈選良家女將獻帝奎女亦在選中謂韓謝奇曰吾欲剪女髮何如謝奇曰恐禍及公奎不聽

 

<원문해설> 보문각 제학공(휘 사기) 사적

고려사(高麗史)에 간략히 적기를충열왕 원년 乙亥(단기3608, 서기1274)년 6월 甲子에새로 禿魯花(독로화: 두루아치 즉 중국어로 인질을 뜻함)를 선정하는데3계급을 특진 발령한 관직을 주어서 내 보내기로 하였다.도교서령(都校署令)에 임명된 한사기(韓謝奇)는 강(康)의 아들이요,추밀 이분희(樞密 李汾禧)의 사위니 나이 20미만으로 품계(品階)를 초월(超越)해서8품에 배명(拜命)하게 되었다.同 5년 己卯 3월 丁巳에 대방공 철(帶方公 澈)을 파견하여 독로화를 인솔하고원(元)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欣)과 원전(元傳)의 아들 정(貞)과박항(朴恒)의 아들 원타(元타)와 허공(許珙)의 아들 평(評)과 홍자번(洪子藩)의 아들 순(順)과한강(韓康)의 아들 사기(謝奇)와 설공 검(薛公 儉)의 아들 지충(之沖)과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와 김주정(金周鼎)의 아들 심(深)등으로서문벌 좋은 집 자제(子弟)들 25인이라 모두 3등급을 월등(越等)한 관직을 주어서 보냈다.문혜공(文惠公) 본전(本傳)에 간략히 적었으되아들 사기(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아들 악(渥)과 영(泳)이 있다.처음에 사기(謝奇)가 독로화로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들어가니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게 되었고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管)에 이르렀다.영(泳)이 이렇게 영달(榮達)함으로서아버지 사기(謝奇)에게 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로 사직(賜直)하였다.홍규열전(洪奎列傳)에 간략히 적었으되 충열왕이 양가(良家)의 예쁜 여자를 선발하여원나라의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는데 추밀부사 홍규(樞密副使 洪奎)의 딸도 마침 선발되어대열 속에 있었다. 규(奎)가 한사기(韓謝奇)에게 이르되 "나는 내 딸의 머리를 깍아서 이번 선출을 면하도록 할까 하는데 어떨지요" 하니사기(謝奇)가 그러면 그 화(禍)가 귀공에게 미칠까 두려우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규가 듣지 아니하였다 한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이 찬(撰:쓰다)한 정혜공 영(正惠公 泳))의행상(行狀)에는 아버지 사기(謝奇)는 본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조정대부우사의대부지제고(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고 公(泳)의 영달로 인하여한림직학사아중대부경차도위(翰林直學士亞中大夫經車都尉)로 여러 차례 증직(贈職)을 받았고고양후(高陽侯)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어머니 채씨(蔡氏)와 정씨(鄭氏)는 모두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으로 추봉 되었으니 公은 정씨의 소생이다.처음에 본국에서 세도(勢道)집 자제들 중에서 질자(質子:인질)를 뽑아 보내는데 公의 부친이 역시 선출된 인질 중에 있었으므로 드디어 가족을 인솔하여 왔다고 한다.남양 홍씨(南陽 洪氏)족보에는삼사좌사주(三司左使澍)의 배 상당군 부인 한씨(配上黨郡夫人韓氏)의 조(祖)는선수한림직학사 아중대부경차도사(宣授翰林直學士 亞中大夫經車都尉)로고양현후에 추봉되시고 고려조(高麗朝)의 관직으로는은청광록대부 도첨의좌사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고(銀靑光祿大夫都僉議左司議大夫寶文閣提學知製誥)이신 사기(謝奇)라고 적혀있다.

 

朝請大夫寶文閣提學公高陽縣候韓公 諱 謝奇 神道碑銘

 

<원문해설> 조정대부 보문각 제학공 고양현후 한공 휘 사기 신도비명

전남 광주읍 서편 30여리 지점인 樓鳳洞(누봉동) 魚登山(어등산) 아래 丑艮龍(축간용)에子坐午向巳版局(자좌오향사판국)인 자리가 바로朝請大夫寶文閣提學高陽縣候韓公謝奇(조정대부 보문각 제학 고양현후 한공 사기)의 묘소이다.임진왜란 후에 실전(失傳) 되었으나, 전하여 오는 말에 의하면여기가 한정승묘(韓政丞墓)라 하므로 정조15년(단기 4123, 서기 1791년)에후손인 大臣 用龜(대신 용구)가 여러 종인들을 현지에 파견하고 나주, 광주 두 군수에게군민 장정들을 징발하여 信蹟(신적)을 찾아 보도록 위촉하였더니 묘 아래 쪽에서파손된 碑(비)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姓(성)자인 韓字는 분명하고 몇몇 글자는 깨어졌으나공의 비석이 틀림 없는지라 봉분만응 즉시 수리하였으나 미처 수호 대책은 마련하지 못하였다.다행히도 수 년전(계사년 단기4286, 서기1953년)에 각 종중의 의론이 통일되어묘역을 미화하고 표석을 건립하며 제각을 세우고 산지기를 두며 위토를 마련하여歲一祀(세일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이제야 冥冥之中(명명지중)에 계신 英靈(영령)께서후손들의 永慕之情(영모지정)에 다소나마 마음 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묘역을 완비코자 하면마땅히 격에 맞는 神道大碑(신도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해서후손 基興(기흥)이 高麗史列傳(고려사열전)과 家藏(가장)인 乘牒(승첩)을 제시하면서무능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는데, 이번 일은 후손 在根(재근)이  전체비용을 부담한 것이라 한다.삼가 그 산소가 실전되었다가 다시 어렵게 찾게 된 전말을 기록하고이어서 世系(세계) 내력의 槪況(개황)을 요점만 따서 銘(명)으로 한다.

청주한씨 문벌로는 三韓國(삼한국)의 甲族(갑족)이요箕聖(기성)에서 出系(출계)되니 淵源(연원)이 綿遠(면원)토다歷年(역년)이 二千餘(이천여)에 文獻(문헌)조차 逸失(일실)하여杞宋歷史(기송역사) 다 보아도 오히려 부족하리世系(세계)가 昭詳(소상)하신 그의 鼻祖(비조) 韓蘭(한란)부터勳名(훈명) 높은 壁上功臣(벽상공신) 諡號(시호)가 威襄(위양)이라. 公에게는 七世祖(칠세조)라 그 遺澤(유택)이 멀리 흘러公卿大夫(공경대부) 계승하니 온 세상이 羨望(선망)하네諱 奕(휘 혁)하는 어른께서 尙衣院(상의원)의 直長(직장)이요奕(혁)의 아들 希愈(희유)께선 神虎衛(신호위)의 上將(상장)이라希愈(희유)의 子 光胤(광윤)께선 金紫光祿(금자광록) 守司空(수사공)을光胤(광윤)의 子 康(강)하는 분 諡號(시호)는 文惠(문혜)인데 三代王朝(삼대왕조) 歷事(역사)하니 그 勳業(훈업)이 崇大(숭대)하여 儒學界(유학계)의 祖宗(조종)이요 輿地勝覽(여지승람) 이름 났네이 분들이 公에게는 高祖 曾祖 祖父 父親왕성하게 뻗친 蔭德(음덕) 끊임없이 이어 오네어머님은 咸從任氏(함종임씨) 全佑氏(전우씨)의 따님이라君夫人(군부인)의 品階(품계) 받아 영예가 극진한데提學公(제학공)을 誕育(탄육)하신 그 恩德(은덕)이 더욱 크네科擧(과거)에 壯元(장원)하여 前途(전도)를 개척하니寶文閣 提學(보문각제학)이요 知制誥(지제고)에 오르셨네이때 마침 元(원)나라에 보낼 볼모를 뽑을 적에命을 받을 사람 極(극)히 精選(정선) 하였도다재능 있고 賢良(현량)하신 公도 역시 참여되어만리 타국 가는 使者(사자) 二十五人 同行(동행)일세元나라 朝廷(조정)에서 가상하게 받아들여中書員(중서원)의 관직으로 특별하게 宣授(선수: 배울 수 있도록)했네高陽候(고양후)와 亞中大夫(아중대부) 높은 벼슬 追封(추봉)됨은 元나라의 고위관료 아들 泳(영)의 特待(특대)로다公의 配位(배위: 부인) 세 분인데 初配(초배: 첫부인)는 延安李氏(연안이씨)密直事(밀직사)를 역임하신 汾禧(분희)씨의 따님이요繼配(계배: 둘째부인)인 平康蔡氏(평강채씨)는 良靖公 仁揆(인규)의 딸三配(삼배)인 鄭氏夫人(정씨부인) 貫籍(관적)이 無傳(무전)하나그의 부친 仁貴(인귀)씨는 官職이 宰臣(재신)이라蔡夫人(채부인)과 鄭夫人(정부인)은 郡夫人(군부인)의 品階(품계)로다長男(장남)에 渥(악)하는 분 蔡夫人(채부인)의 所生(소생)이니冊封(책봉) 上黨 府院君(상당부원군)에 諡號(시호)는 思肅(사숙)이요次男(차남)에 泳(영)하는 분 鄭夫人(정부인)의 소생이니集賢殿 直學士(집현전 직학사)요 諡號(시호)는 正惠(정혜)로다끝에 아들 浚(준)하는 분 벼슬이 平章事(평횥)는뜠세 따님을 가리 가려 차례대로 출가시키니長 金之謙(김지겸), 次 宋金剛(송금강) 次 盧承緖(노승서) 三人이라靈芝(영지)는 뿌리 굳고 醴泉(예천)은 水源(수원) 길어直孫外孫(직손외손) 後裔(후예)들이 더욱더욱 昌盛(창성)하다이어의 配本支孫(본지손)이 그 수가 천억이오功勳(분(공훈 따) 道德君子(도덕군자) 代代로 喬木(교목)일세太妊(태임)과 太사(女+以: 동서 사) 같은 여섯 왕비를 탄육하니 이 나라와 더불어서 운명을 같이하네支莊山(지장산)과 樓鳳洞(누봉동)이 인근 洞에 접했으니양대 산소 先後(선후)따라 香火(향화)를 받들도다陵園(릉원)과 다름없다 元陵(원릉)의 비자있어조상이나 후손이나 모두모두 영광일세평범하게 보아 넘길 산 언덕이 아닌 것이位土(위토)는 深谷(심곡)이나 陵園(릉원)같은 큰 산소라

경자(단기 4291 서기1960년)오월 상순 덕은 송재성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