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공 휘 강(文惠公 諱 康)

  

유사, 사적(遺事 史蹟) 고려사 본전(高麗史本傳)

<原文> 韓康淸州人高宗時等第累還監察御史出守金州(今金海府)前此田賦常不滿額守多坐罷康始至理屯田之廢者得穀二千餘石吏즙民安以最徵爲禮部郞中歷工部諫議大夫國子大司成翰林學司忠烈朝知密直司事轉判三司事時兩府議國事皆顧望莫有主者始直宰樞所司存以康爲之後以贊成事致仕又加中贊致仕王召康曰寡人在位己久今年還甲尤切愼兢卿宜條陳可行時事康請修宗廟備樂器以嚴時祀禁法司仰買市物掩격(骨+各: 뼈 격)埋자(此+肉:썩은고기 자)放生禁屠止遊田之樂絶肥甘之奉於祁寒盛暑置醬粥以賑渴卒諡文惠子謝奇官至諫議大夫子渥泳初謝奇以禿魯花(猶華語質子也)설(손에들)家入元泳幼長輩穀事仁宗皇帝官至河南摠管以泳貴贈謝奇翰林直學士高陽縣侯康僉太常禮儀院事高陽縣伯

  

<원문해설> 공(公)의 휘(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는 경(璟)이시다.고려 고종 15년(단기3561, 서기1228년) 무자(戊子)에 나시고 고종 30년 계유(癸卯)에 16세 소년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발탁되고곧 이어 과거에 등제 하셨다.관직이 여러 차례 승진하여 감찰어사(監찰御史)가 되시고외직(外職)으로 금주군수(지금의 金海)로 부임되셨는데 그 전부터 이 고을에는전지(田地)에 부과된 세금을 항상 충당하지 못하여 군수가 즉결 처분으로 파면 당한 예가 많았다.공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군용지(軍用地)로 두었다가 버린 토지를 잘 운용하여2천여석의 곡물을 수확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고도소정 세액을 충당(充當)하는데 항상 여유가 있어서 이속(吏屬)들도 일손을 거두게 되고백성들도 가사(家事)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이런 선정(善政)의 공적으로 예부랑중(禮部郞中)에 발탁(拔擢)되고 공부시랑(工部侍郞),간의대부(諫議大夫),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셨다.충열왕조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다시 판삼사(判三司事)사로 승진 전임하시었다.이 당시에 의정양부(議政兩府)에서 국사(國事)를 의정(議定)하는데 있어피차가 간망(看望)하는 태도로 서로 주재(主宰)하는 자가 없었다.이 까닭에 처음으로 재구소(宰樞所)를 설치하고 공에게 사존직(司存職)을 맡아보게 하였다.그 후 다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또다시 중찬(中贊)으로 승진하시고연로하시어 사임하시었다.충열왕 22년(단기3629, 서기1296년) 丙申(갑신)에 王(왕)이 公(공)에게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王位(왕위)에 오른지가 오래되어 이제 還甲(환갑)을 당하니송구한 심사가 더욱 간절하오.경(卿)은 내가 할 일을 일일이 밝혀 말씀하여 주오" 하시었다.公은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서 진언(進言)하셨는데  "종묘제사(宗廟祭祀)는 先王(선왕)을 받들어서 유덕(遺德)에 보답하는 일인 즉지금 묘사(廟舍)가 황폐하여 비가 새고 제사 때 쓰는 樂器(악기)가 산실(散失)되었으니有司(유사)에게 下命(하명)하여 廟舍(묘사)를 수리하고 樂器(악기)를 備置(비치)하여시사(時祀)를 엄수토록 하실 것이요. 工商(공상)은 器物(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재물을 풍요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인데지금 정부 각 기관에서 수용하는 물품을 모두 시정(市井)에서 구입하는데혹은 그 가격을 억지로 깎고 혹은 그 외상값을 보상하지 않아서 상공인들의 괴로움이많은 즉 이것을 금하시고 잡아온 생물을 놓아주시어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이것이 증수(增壽)하는 방법이니 청하옵건데 도살(屠殺)을 금하고 수렵(狩獵)을 행락(行樂)으로 하는 일을 막으시고 기름지고 맛 좋은 음식을 절약하여심한 추위와 더위에 토장죽이라도 장만하여 의탁할 곳도 없이 기갈(飢渴)이 심한 백성을구호하시고 有司(유사)에게 하명하여 임자없는 시체라도 잘 매장하여 줌으로서음덕(陰德)을 쌓게 하소서" 하였다.이 때의 왕이 혼암(昏暗)하기 때문에 公(공)께서 이같이 실랄하게 말씀하셨으나왕은 이대로 시행치 못하였다.충열왕 29년(단기 3636, 서기1303년) 계유년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76이요,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시다.公은 천성이 인자하시어 재상직(宰相職)에 있을 때도 온공(溫恭)하시고 근검하시어유학(儒學)의 교풍을 바탕으로 충열왕을 보좌하여 훈업을 세웠고사기(謝奇)와 보(譜; 일명 謝譜) 두 분의 아들을 두셨다. 사기(謝奇)의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악(渥)과 영(泳)의두 아들을 두시었다. 처음에 사기(謝奇)가 禿魯花(독로화; 質子)에 선발되어 가족을 인솔하고원(元)나라에 들어가니 영(泳)은 어려서부터 황도(皇都)인 장안(長安)에서 성장하였으며인종황제(仁宗皇帝)에게 사사(仕事)하여 벼슬이 하남로총관(河南路摠官)에 이르렀다.영(泳)이 이같이 영달(榮達)함으로 원조(元朝)에서 부친인 사기(謝奇)에게는한림직학사 고양현후(翰林直學士 高陽縣侯)를 증직(贈職)하고조부(祖父)인 강(康)에게는첨태상예의원사 고양현백(僉太常禮儀院事 高陽縣伯)을 증직하였다.

 

문혜공 휘 강(文惠公 諱 康)

<原文> 高麗匡正大夫都僉議中贊判興理司事世子師諡文惠韓公神道碑銘

嗚呼此韓文惠公衣冠之藏也公諱康初諱璟韓氏本箕聖之后代序玄遠至諱蘭佐麗統合三韓諡威襄始居淸州始爲貫於公六代曰直長諱奕上將軍諱希愈禮賓卿韓光胤曾祖祖父禰妣通儀郡夫人羅州陳氏戶長懿女宋理宗戊子生公癸卯試國子監壯元旣登第官至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始出守金州理荒廢屯田름(곳집)庾盈牣吏즙(口+耳+戈:거둘 즙)民安以治最爲禮部郞中歷工部侍郞轉判三司時 忠烈王置宰樞所議國事公實主之以贊成事致仕王召公曰寡人在位己久尤切愼兢卿宜條陳可行事公敷進以修宗廟備樂器嚴時祀禁橫濫掩격(뼈)자(썩은고기)放生禁屠止游田絶肥甘施賑恤王皆嘉納大德癸卯二月二十二日卒諡 文惠追封高陽縣伯噫公之事行不應止此世遠蹟湮今據譜乘及麗史列傳祛其重複幷互抄節所傳僅僅然因此僅傳所不傳可槪也配牙善郡夫人咸從任氏主薄全佑女四子謝奇寶文提學譜典校今謝壽守延俱直史館四女趙瑞平壤君張碩奇延俱宰臣安전(멸할 전)郞將長房男渥右政丞上黨府院君諡思肅泳高陽侯諡正惠浚平章事二房男弘時扶安君三房男沃郞將潭潭季房男敬彦密直事曾玄以下至今數十代甚繁衍只記其顯著非百尺碑所能盡記而惟 國朝 神懿 昭惠 章順 恭惠 仁烈六后妃皆以公裔爲姙似聖述實贊邦祿此不可以不書也懿休哉公墓在靈光治東老人峰下向東原亂後失傳 純廟年間搜信蹟遷苾芬其亦冥蔭攸騰也盖大墓之有大碑準格所宜也後孫特進官肯鎬興其宗基興謁余銘甚固辭以事偉文纖而不獲遂敍而銘曰 翼益文惠間氣孕毓稟賦純正氣義卓락富有其具高第蚤擢邦國棟樑儒門規확入贊謨요出著治績歷事累朝位제宗秩年至致仕賜對前席爲問治要敷奏明晳救時之道經國之策盖公大本惟德之積德厚流光其理不특愈遠益昌雲伋不億道學勳庸克世綿絡신復鴻慶六誕沙麓關휴麟趾淑善其德福履之綏其惟與날窈窕玆邱堂斧有恤間嘗失護旋卽契절水益濚澈山益측력百世仰止豊碑穹屹我銘昭之載篆載勒石可륵兮宜光氣之靡終極 歲舍辛巳嘉排節 嘉善大夫內部協辦原任 圭章閣檢校直閣 楊州 趙重穆 撰

 

<원문해설> 문혜공 휘 강  고려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시문혜 한공 신도비명

오호(嗚呼)라 여기가 한문혜공(韓文惠公)의 산소라. 공의 휘(諱)는 강(康)이요. 초휘(初諱)는 경(璟)이다. 한씨는 본래 기성(箕聖)의 후예로 현원(玄遠)한 수 대(代)를 전하여 오다가휘(諱) 란(蘭)에 이르러서 려조(麗朝)를 보좌하여 삼한을 통합하였으니 시호(諡號)를위양(威襄)이라하여 처음에 청주에 살았으므로 여기가 본관(本貫)이 되었다.公으로부터 6대가 되신다.직장 휘 혁(直長 諱 奕)과 상장군 휘 희유(上將軍 諱 希愈)와예빈경 휘 광윤(禮賓卿 諱 光胤)은 증조(曾祖), 조(祖), 부(父)가 되고妃(비)는 통의군 부인 나주진씨 호장의(通儀郡 夫人 羅州陳氏 戶長懿)의 딸이니송리종(宋理宗) 戊子(고려 고종15년)에 公을 生하니 계묘(癸卯)에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壯元)으로 등제(等第)함으로 시작하여 벼슬이광정대부군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君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判典理司事 世子師)까지 역임(歷任)하였다.일찍이 금주수령(金州守令)으로 도임하였을 때 荒廢한 둔전(屯田)을 운영하여 창고가 가득하니 관리(官吏)들의 부정이 멈추어지고 백성들도 태평하게 되어최상의 치적(治績)을 쌓으셨다. 이로 인하여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발탁되었다가공부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고 삼사판사(三司判事)로 전임되었을 때忠烈王(충렬왕)이 國事(국사)를 論議(논의)하는 기관으로 재추부(宰樞府)를 설치하고公(공)에게 그 實務(실무)를 주간(主幹)토록 하였다. 찬성사(贊成事)로서 退任(퇴임)할 때 王이 公에게 묻되 과인이 왕위에 있음이 오래되었으므로더욱 더 정사(政事)에 그릇됨이 없을까 염려가 되니 경(卿)은 내가 꼭 하여야 할 사항을조목조목 진언(進言) 하여 달라하거늘 公이 "종묘(宗廟)를 수리하고 樂器(악기)를 비치하여 시사(時祀)를 엄숙하게 봉행(奉行)할 것이며관리의 권력 도용을 禁(금)하고 주인없는 시체를 묻어주고 生物(생물)을 놓아 줄 것이며도살을 금지하고 수렵을 중지시키며 미미(美味)의 음식을 끊고 기아(飢餓)의 백성을구휼(救恤)하시라" 고 진언하였더니 王은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大德 癸卯(충열왕 29년) 2월 22일에 卒하시니 시(諡)는 문혜(文惠)요고양현백(高陽縣伯)에 추봉(追封)되었다. 슬프도다 公의 行蹟(행적)이 이것뿐이 아닐 터인데世代가 현원(玄遠)하여 모든 사적(事蹟)이 인몰(湮沒)하였으므로이제 족보와 역사례전(歷史例傳)에 의거하여 중복되는 것은 除去(제거)하고여기저기서 필요한 節目(절목)만을 가려서 겨우 이런 정도만 전하게 되었으나 이것만 보더라도전하지 못한 事蹟(사적)이 얼마나 많을까를 가히 추측할 수가 있으리라.配(부인)에 아선군 부인 함종임씨(牙善郡 夫人 咸從任氏)는 주박전우(主薄全佑)의 女요.4아들이 있었으니 사기(謝奇)는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이요. 보(譜)는 전교령(典校令)이요,사수(謝壽) 수정(守廷)은 모두 직사관(直史館)이오, 4녀가 있으니 조서(趙瑞)는 평양군(平壤君)이요.장석(長碩)과 기정(奇廷)은 재신(宰臣)이요, 안전(安전)은 랑장(郞將)이다.장남 사기(謝奇)의 아들 악(渥)은 우정승 상당부원군 시 사숙(右正丞 上黨府院君 諡 思肅)이요,영(泳)은 고양후 시 정혜(高陽侯 諡 正惠)요, 준(浚)은 평장사(平章事)요,2남 보(譜)의 아들 홍시(弘時)는 부안군(扶安君)이요,3남 사수(謝壽)의 아들 옥(沃)은 랑장(郞將)이요.담(潭)과 담(潭)이 있으며 경언(敬彦)은 밀직사사(密直司事)니 증현이하(曾玄以下)는지금 數十世에 번연(繁衍)한 子孫 중에 현달(顯達)한 이만 기록하더라도백척대비(百尺大碑)가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國朝죽의 신의(神懿), 소혜(昭惠), 공혜(恭惠), 안순(安順), 인열(仁烈) 6后妃는모두 公의 후예로서 태임태사(太姙太사(동서)) 같은 聖德을 繼述하여 국가의 복록(福祿)을실찬(實贊)하시니 이 어찌 아니 쓸 수 있으랴.진실로 아름답도다. 公의 묘소가 영광읍(靈光邑) 동편 노인봉 아래 東向菊內인데 혼란통에실전(失傳)되었다가 순조(純祖)년간에 신적(信蹟)을 얻어 다시 香火(향화)를 받들게 되었으니이것 또한 蔭德이 유구(悠久)하게 뻗친 소치(所致)인지라 대체로 큰 산소에 큰 碑(비)가 있는 것은 당연한 準格(준격)인 것이다.後孫(후손)되는 특진관 긍호(特進官 肯鎬)가 그 族人 기흥(其興)이와 같이 와서내게 비명(碑銘)을 쓰라고 부탁하니 일인즉 크고 文章(문장)은 졸렬(猝劣)하여사피(辭避)하다 못해 이 명(銘)을 서술(敍述)한다.

위대하신 문혜공은 영기(靈氣) 타고 탄생하니天品(천품)이 純正(순정)하고  氣宇(기우)가 卓越(탁월)토다.才能(재능)이 卓越(탁월)하여 高等科擧 壯元(고등과거 장원)하니國家(국가)의 棟樑(동량)이요 儒林(유림)의 師表(사표)로다.內職(내직)에서 議政(의정)이요 外職(외직)에도 善政(선정)일세.累代 王朝(누대 왕조) 섬기면서 높은 자리 歷典(역전)하다.勞年(노년)으로 辭職(사직)하고 임금 앞에 마주 앉아治國大要(치국대요) 물을 적에 明晳(명철)하게 奏達(주달)하니 時務(시무)를 닦는 法(법)과 國家經理(국가경리) 大策(대책)이라.公(공)의 가진 높은 信條 積德累仁 根本(신조 덕적누인 근본)이니厚(후)한 끝에 慶事(경사) 남는 그 이치가 틀림없네.道學君子(도학군자) 勳功名相(공훈명상) 代(대)를 이어 綿綿(면면)하고더욱 더 큰 경사는 6王妃(왕비)를 誕育(탄육)하니금슬 좋고 善化(선화)함은 貞淑(정숙)한 德(덕) 있음이라.福祿(복록)의 安定(안정)됨이 그 뉘라서 따를 수 있으랴.窈窕(요조)한 이 山嶝(산등)에 山所(산소)가 있었는데中年(중년)에 失護(실호)되었다 도로 찾아 奉甚(봉심)하니물도 더욱 맑아지고 산도 더욱 높아졌네.百世(백세)를 慕仰(모앙)하여 우뚝 서있는 저 豊碑(풍비)에銘(명)을 지어 밝히고자 이 글을 새기노니이 돌이 부서져도 靈氣(영기)만은 永遠(영원)하리.

辛巳年(신사년 단기4274, 서기1941) 8월중순

가선대부내부협판원임규장각검교직각 양주 조중목

 

문혜공 호적(文惠公 戶籍)

戶籍

至順二年辛未正月 日東部上奉香二里甲午年戶口準戶匡靖大夫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致仕韓康古名璟年六十七淸州父追封金紫光祿大夫守司空左僕射朝請大夫禮賓卿光胤故祖檢校神虎衛上將軍行儀仗府別將希愈故曾祖尙衣直長贈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奕故母通儀郡夫人陳氏故羅州外祖戶長陳懿古名世長故妻牙善郡夫人任氏故咸從縣父內侍登仕郞禮賓主薄同正任全祐一男宣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朝靖大夫右司議大夫知製誥謝奇故典儀府上奉香二里甲午年戶口良中匡靖大夫僉議中贊致仕韓康乙准爲內敎

 

<원문해설> 이 戶口(호구)는文惠公(문혜공)이 16세 되시던 甲午年(갑오년) 당시 지금의 호적부와 같은공부(公簿)로서 주소 성함, 생신, 관직이 소상할 뿐 아니라父 禮賓卿 光胤(부친 예빈경 광윤),祖 神虎衛上將軍 儀仗府別將 希愈(조 신호위상장군 의장부별장 희유),曾祖 尙衣直長 贈金紫光祿大夫 尙書左僕射 奕(증조 상의직장 증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사 혁),母 通議郡夫人 羅州陳氏(모 통의군부인 나주진씨),配 牙善郡夫人 咸從任氏(배 아선군부인 함종임씨),長男 朝靖大夫 右司議大夫 知製誥 謝奇(장남 조정대부 우사의대부 지제고 사기)까지등재되어 있으며 특히 부,조, 증조까지 역급하여 존위와 관직을 명백히 신망할 수 있는사적공부이므로 여기에 첨록하고 시조 이하 직장공 이전까지의 계대가 소명될사적 기록이 발견되기를 빌면서 이 호구원문을 갈재한다.

 

한시랑동기적비문(韓侍郞洞紀蹟碑文)

 

<원문해설> 程夫子(정부자)가 顔樂亭(안락정)을 銘(명)하여

"물도 차마 버릴 수 없고 터도 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 것은 顔子(안자)의 즐겨 살던 곳에 옛날에는 亭子(정자)가 없었는데 後賢(후현)들이 그 장소의 유서마저 湮沒(인몰) 될까 염려하여 정자를 세우고 銘(명)을 撰述(찬술)하여 영원토록 慕仰(모앙)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니, 하물며 조상이 기거하시던 장소에 자손들의 추모하는 심정이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여기 영광군 九峀山(구수산) 아래의 韓侍郞洞(한시랑동)은  上黨韓氏(상당한씨)  先祖(선조)의 遺墟(유허)이다. 지난 700여년에 늪(沼)도 대(臺)도 空地(공지)가 되고 잡초만 무성하여 樵夫牧童(초부목동)들이 다닐 뿐이어서 오가는 행인들까지도 탄식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의 통한이야 어찌하였으리. 그리하여 이 비석을 세우고 그 사적을 기록하는 바이다. 조용히 생각하여 본 즉 영광에 한시랑이라는 동리가 3개소인데 陳良面(진량면) 支莊山(지장산) 아래 禮賓卿 諱 光胤(예빈경 휘 광윤)의 묘소와 畝長面(무장면) 老人峰(노인봉) 아래의 文惠公 諱 康(문혜공 휘 강)의 묘소와  이 동리가 아울러 동일한 명칭을 쓰게 되었다는데, 생각해 본 즉 南塘 文純公(남당 문순공)께서 撰(찬)한 禮賓卿 碑文(예빈경 비문)에는 公께서 이곳에 謫居(적거; 귀양살이)하시다가 別世(별세)하시니 여기에 장례를 모셨다는 부근 주민들의 전설이 있다는 구절이 있고문혜공의 族譜傍註(족보방주)에는 法聖浦 南方(법성포 남방)에韓侍郞遺址(한시랑유지)가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는 우리 한씨 중에서 侍郞職(시랑직)을 역임한 분이 없고 오직 公께서만 工部侍郞(공부시랑)을 역임한 바 있으며,다시 慕遠齋(모원재)에 소장된 古蹟條(고적조)를 살펴보면 후손 希孟(희맹), 粹德(수덕)이 우연히 이 곳을 지나다가 한시랑동이라는 洞名(동명)에 想及(상급; 생각이 미치다)하자 갑자기 심정이 감동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兩代(양대)의 산소가 시랑동에 있음을 알 게 되었다 하니 이는 祖考(조고)의 英靈(영령)이 후손의 감정을 유발케 한 자연스러운 事理(사리)라 하겠다.앞서 예빈경공께서 遠隔(원격)한 지방에 계시니 문혜공께서 시종한 것은 효도의 의당 있음직한 일이요그리고 동명을 예빈이라 칭하지 않고 시랑이라 한 것은 예빈경공이 일찍이 별세 하신 후에도 문혜공께서 장기간 거류하신 까닭이 아니었겠는가.전에 崇禎四癸未(순조 23년 단기 4156, 서기1823년)에 후손 弼祚(필조), 慶裕(경유)가短小(단소)한 表石(표석)을 세웠으나 사실을 기재한 것이 없고土沙(토사) 중에 깊이 매몰되었는지라書頭(서두)에 말한 顔樂亭(안락정)의 廢荒(폐황)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는가.지금 新碑(신비)로 바꾸어 정결한 장소에 옮겨 세우고 전면에는 한시랑동기적비라 새기고 후면에는 이 글을 새긴다.

이제야 바다와 산이 빛나고 초목도 곱게 채색을 발휘하여 천년전의 일이 오늘 일같이새롭게 되었으니 선조의 영령께서 山光(산광)과 水色(수색)이 영롱함 속에陷降(함강)하시면서"나에게도 후손이 있어 이 基地(기지)를 버리지 않도다" 하시며 기뻐하시는 듯 하다.

文純公(문순공)은 즉 예빈경공의 17대손인 諱 光震(휘 광진)이요. 이 역사는 宗中(종중)이 합의하여 花樹契(화수계) 자금으로 소요경비가 마련된 것이다.

癸未(단기 4267, 서기 1943년) 3월 竪(수: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