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휘 란(始祖 諱 蘭)

 

太尉威襄公 諱 蘭 遺事(태위 위양공 휘 란 유사)

 

 

蘭谷理 遺事(난곡리 유사)

<原文>

竊惟(절유)韓氏는 東邦之閥族으로 三韓甲族이라 本自殷太師箕聖之後而歷 1131年하고 至馬韓末에 8世 元王이 有子三人하니 長은 友平이며 次는 友諒이요, 季는 友誠이라 馬韓이 爲百濟之所 掠奪하니 友諒이 歸于新羅脫解王朝하야 爲上黨韓氏러니 至二九世하야 有諱邦亨이 官은 新羅侍中이니 憲康王朝에 湖西之黃澗芝藏山下로 奠居하야 生諱光宗이 侍中이요, 生諱 智原이니 學行이 箸世하고 贈侍中이라 有子四人하니 長은 蔓 次는 簡, 蘭, 英이니 三子 諱 蘭이 卽 太尉公也라 公이 生于新羅眞聖女王年間也라 公이 胎生시 天地가 感應하고 松岳이 降精하야 附近 山野가 呈吐汗之而端故로 後人이 山與村名을 皆而土汗而開稱吐汗하고 又因公之諱蘭하야 洞號를 亦以吐蘭而又稱蘭谷이라 至今千有餘載에 爲國家行政便宣하야 區域變更及地名改易이 非再非三而次洞名도 雖亦隨時改稱이나 然必不越乎太尉公之因緣也로다. 蘭谷里之主脈은 必稱俗離山하니 玄山이 南走而西하야 其來也有埈而急者는 如熊奔虎走하고 秀而참者는 如鳳顧鵠立하야 墳墳叢叢如前者呼하고 後者應하야 완정百餘里而突然聳起하니 其名曰芝藏山이라 北分枝가 宛如兩腕抱兒之狀而闢一區하니 所謂 蘭谷里가 是也라 峽中에 有澗하니 其名도 蘭谷川이다. 北原이 出自芝藏山하야 貫黃澗邑하야 榮廻月留峰而合流錦江이라 山脈이 如是하고 水勢 亦然하니 豈無地靈乎아 此可謂別有天地也라. 生家右便 數百步許에 有淸淨之地하니 泉石이 窈窕하고 松篁이 蒼鬱하니 此公之講道故址也라. 講道之遠近士友가 送子請業則謬然不辭하고 訓誨不怠하니 鄕隣親友恃之若砥柱하고 仰之若山斗無己라 하고 生家與講堂 中間에 隔一小麓하야 繩懸鈴하야 有事之時에 必搖而鳴之하야 爲處事符號라하니 如是古說이 世世流傳하야 至于今不絶. 一日에 公이 就寢於堂이러니 忽然成夢에 有一老人이 來現曰 主人은 將來必有多孫成大業之望하니 卽離此洞云謂이어늘 蒼曰離父祖之鄕而之於何所리요. 老人曰 淸州蜈倉坪이 泉甘土肥하고 俗淳人厚하고 地運이 旺盛하니 大吉이라 夢覺에 老人은 己居無赤하고 默然覃思에 奇且怪哉라 半信半疑하야 對家人 說夢하니 家人이 曰 大人之夢은 必有不靈矣라 故로 應從老人之言하야 將欲離鄕爲計運般家具하니 鄕理人士가 信賴欽服이 久矣라 嗟惜善人之離하야 挽而留之者不少焉이라 太尉公 以後에 所居故宅은 鄕人이 仰慕公之德望而爲之修葺을 年年不廢焉이러라. 講堂之建物은 世久年深하야 自然朽하고 其基地는 變爲桑麻圃田하고 惟瓦礫이 堆積하고 遺墟餘存하다.

 

<역문해설> 

  청주 한씨는 삼한시대부터 동방의 세력이 있는 족속이라 원래 은나라 태사인 箕子이후 역사가 1311년이며, 마한 말 8세 원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으니 첫째 우평과 둘째 우량, 셋째 우성이라 마한이 백제에 멸망하고 흡수되니 우량은 신라로 귀화하여 탈해 왕조에 벼슬하면서 부터 상당(청주)한씨라 칭하게 되었으니 이후 이십구대가 지나 諱(휘) 邦亨(방형)이란 분이 있어 벼슬은 신라 시중이며 헌강왕 때에 황간 지장산 아래로 이주하시어 諱 光宗(광종)을 낳았으니 벼슬이 시중이요, 후대로 智原(지원)이란 자손을 두셨으니 학행이 뛰어나 벼슬은 시중을 받았으며 蔓(만), 簡(간), 蘭(란), 英(영)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셋째인 諱 蘭(란)이 즉 태위공이라. 공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 진성여왕 때 이다. 公이 태어날 때 천지가 감응하여 부근 산야가 땀을 흘렸다고 하여 후인들이 지명을 토한리로 불렀으며 행정편의대로 지명이 여러 번 바뀜에도 불구하고 천 여년이 지난 지금도 토란리 혹은 란곡리로 개칭되어 불리어 지고 있는 것은 모두 公께서 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란곡리의 지맥은 속리산에서 뻗어 내린 것이니 어떤 이는 곰과 범이 달려가는 형상이라 하고, 또는 봉황이 내려앉은 자리라 하나 어쨌든 부근 산하에서는 이보다 뛰어난 산세가 없으니 바로 지장산 이며 여기를 흐른는 맑은 물이 란곡천이라. 북쪽으로 뻗은 산맥이 맺힌 지장산 아래가 황간읍이며, 월류봉의 물이 흘러 난곡천을 통해 합치는 것이 바로 금강이니 과연 별천지라 일컬을 만하다. 생가 우측 수백보의 거리에 맑고 깨끗하며 수목이 울창한 곳이 있으니 公이 주위 잡인을 피하여 구도하고 공부하던 곳이라 학업중에 원근의 지우가 찾아도 태만하지 않았으며 종을 달고 끈을 연결하여 문중의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출입을 허용하고 상담하였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그 동리의 연로한 분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公의 꿈속에 한 노인이 현몽하여 주인은 장래에 필히 자손이 번성하고 가업이 성대해 지려면 즉시 이주하라고 명하매 대답하되 부조의 향리를 어찌 버리고 가리요 하니 노인이 가로대 청주 오창들이 물과 흙이 비옥하고 땅기운이 왕성하고 대길이라 깨어보니 노인은 흔적이 없고 괴이한 일이라 반신반의하여 주위 사람에게 꿈 얘기를 하니 틀림없이 고향을 떠나라는 하늘의 계시라 하니 식솔이 모두 이주하였다. 태위공 이후에 고택은 향인이 공의 덕망을 앙모하여 년년이 폐하지 아니 하였더라 강당건물은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히 낡고 그 터는 뽕과 삼밭으로 변하였으되 깨어진 기와조각이 남아 옛일을 전한다.

 

 

始祖 遺基 敍事 碑文(시조유기서사비문)

<原文>

惟我韓氏粤自高麗氏之興爲東國大姓肇麗朝降羅滅濟以成統合之積一時豪傑之士宣力聘智協策翊運者盖數十人於是有諱蘭以元功顯位太尉三重大匡名在壁上寔乃韓氏之鼻祖也太尉以不世出之材奮起草昧興王定覇勳名事業度越前古而又能積德種善世濟厥美子姓滿朝金紫相望國乘家牒班班可見試以其最顯者言之曰禮賓卿光胤曰都僉議中贊康曰寶文閣提學謝奇曰思肅公渥曰平簡公公義曰西原君方信曰文敬公脩皆以功勳將相道德文章父子兄弟繼繼繩繩以終麗氏之世入我  朝益大以昌而平簡西原兩家苗裔尤盛于  朝平簡之後若文烈公尙質若文簡公尙敬若忠成公明澮若文襄公繼美若文靖公繼禧若章成公效元西原之後若襄惠公伯倫若襄節公確若質景公致亨若恭安公致仁若莊簡公致禮咸能佑我  列聖作爲名臣或開國靖難或佐理致治圖形麟閣躋位巖廓無世無之而爲  國舅尙公主者踵相接也太尉之世距今七百餘禩而子之孫蕃衍門闌之貴顯愈久愈盛吁其休哉湖西之淸卽太尉所自出之鄕得號上黨盖以此也後孫之處玆土者版籍居多故家喬木猶有存者上年春吾伯氏百謙佩左符牧是州亦平簡之後也旣下車首訪宗人問太尉遺基何居咸曰噫聞諸故老矣諺傳太尉始居務農亭傍服田力穡積穀累巨萬麗朝之征甄萱也師出宅前太尉杖劍出迎以濟一日之餉遂從以驅馳云州之東南十里有方井之里適在務農亭傍而韓氏諸孫多家焉文敬公柳巷集中有吾家方井里之句厥後忠成公有首丘之志亦就是里爲營菟裘是知方井乃太尉之遺基乎伯氏更詢耆舊知其爲太尉之基無可疑然後遂闢草萊築壇場擇日以祭馳書祗告在朝宗丈今淸平府院君應寅曁我叔父判書公孝純曰近世大家如谷城之申安東之權皆能祭其始祖于鄕以盡報本之義況我太尉之功德後孫之昌遠不讓於二家而鄕閭蕪沒過者無所式豈不於顙有沘今得遺基買田一區贍以粢盛使宗人迭掌其事將以每歲春設位祭于壇上爲久遠規經紀粗完盍謀繫牲之石以永其傳諸公聞而韙之立爲文遍告于同姓各捐錢帛以助其役仍命浚謙記其事蹟敢不以文拙辭謹跪而言曰嘗聞水之源深者其流遠木之根厚者其枝茂人之有積德累仁者其子孫繁殖韓氏之奕世冠冕前後不替者顧非太尉積累之遺澤歟孟子曰君子之澤五世而斬小人之澤亦五世而斬言人善惡之澤皆不逾五世而絶其至于數十世而不絶卽孟子之所能期而況王伯之佐其生也有關一時之氣數故旺衰隆替未嘗不與國家同其終始昔人稱子文之爲善不過頌其有後於楚雖以晋之王謝唐之崔盧簪纓之盛僅能誇耀當世而止若吾韓氏之閥閱蟬聯歷數代而如一日者盖古今之所未聞也嵩嶽儲精沙麓擁祥篤生異人累誕  國母以配我朝鮮億萬年無强之命以此言之其欲嵩賁遺墟恢揚前躅豈但爲韓氏子孫之所私乎是宜列于有司載諸祀典歲降香幣以旌勳德而特未遑耳嗚呼自古名門右族莫不由祖先忠孝勤儉以成立之莫不由子孫頑率奢傲以覆墜之始太尉之未遇也隱德丘園躬服艱難發身興家以其忠孝之業若子曁孫咸以箕裘之行能自砥礪克守家法永享天祿是眞  朝廷之典型子孫之儀範然則表厥宅里爲後人之觀感其有補於民彛世敎亦不翅萬萬矣太尉公衣冠之藏舊稱在平安道嘉山郡世代寢遠眞膺難辨未免子孫之羞今我伯氏乃能追原本始創爲是擧益張大其美古人所謂天下之事必待人而後行者幸而近出於吾家尤可尙也繼自今太尉之後東西行過是州者必將於焉展謁以伸桑梓之敬鄕人子弟之昧於本始者必將於焉取法共盡豺獺之誠而太尉之遺風餘韻亦將於焉有徵益焜耀於無窮也必矣斯不可不識也故略具傳世系派幷載立石顚末以告來者

萬曆三十三年(宣祖38.檀紀3938年) 九月  日

 

後孫 吏曹叅判 浚謙 撰

 

<역문해설> 

※ 이 비문은 구암공(백겸)이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시조부군의 옛 생활터전을 찾은 후 이 터를 잊지 않기 위한 문중의 중의를 모아 구암공의 동생인 문익공 서평부원군 휘준겸이 비문을 새겨 세운 것이다

 

우리 韓氏는 고려 왕조가 신흥할 때부터 동방대성이었다. 처음 고려가 신라를 항복 받고 백제를 토벌하여 三韓을 통합하는 업적을 이룩할 때 당시의 호걸들이 용력을 다하고 지략을 짜서 협력한 사람이 수십인이었다.  그 중에 韓蘭이라 하는 어른이 있어 건국원훈으로서 벼슬이 태위(太尉)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고 이름이 壁上에 오르시니 이 어른이 바로 韓氏의 시조(始祖)이시다. 태위께서는 세상에 드문 재질(材質)로 초야에서 일어나 왕정의 대업을 일으켜 패권을 잡은 공훈 높은 업적은 자고로 드문 일이다.또 적덕(積德)하고 적선(積善)하여 대대로 이어가면서 그 미덕의 발휘로 자손들이 온 조정의 벼슬길에 올라 고관대작이 배출되었으니 국사나 가승(家乘)에서 차례로 줄 지어 볼수가 있다. 예를 들어 그 中에서 명성이 높으신 어른만 말씀드린다면 예빈경(禮賓卿) 광윤(光胤)과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강(康)과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사기(謝奇)와 사숙공(思肅公) 악(渥)과 평간공(平簡公) 공의(公義)와 서원군(西原君) 방신(方信), 문경공(文敬公)수(脩)가 모두 공훈이 높은 장군이요 정승이며 도덕군자요, 문장대가로서 부자형제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고려 오백년 왕정의 시종(始終)을 같이 하였고 조선에 와서는 더욱 번창하여 평간공, 서원군 양가 자손들이 더욱 많이 조정에 진출하였으니, 평간공의 후예로는 문열공(文烈公)상질(尙質), 문간공(文簡公) 상경(尙敬), 충성공(忠成公) 명회(明會), 문양공(文襄公)계미(繼美), 문정공(文靖公)계희(繼禧), 장성공(章成公)효원(效元)이요. 서원군 후예로는 양혜공(襄惠公)백륜(伯倫), 양절공(襄節公)확(確), 질경공(質景公)치형(致亨), 공안공(恭安公)치인(致仁), 장간공(莊簡公)치레(致禮)가 모두 역대 임금을 보필하여 명신이 되었다.개국(開國), 정난(靖難), 좌리(佐理),치치(致治) 등의 공신으로서 기린각(麒麟閣)에 입각하고 의정부(議政府)에 납신 분이 대대로 연속하였고 국구(國舅)와 부마(駙馬)가 잇닿아 배출되셨다. 태위공(太尉公) 시대에서 지금까지 700여년 되는데 자손의 번창한 것과 가문의 발전이 갈수록 더 융성하니 아! 기쁜 일이로다. 호서땅 청주는 太尉公의 출세(出世)하신 고향이니 일명 상당(上黨)이라고 호칭하게 된 것이 아마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이곳에 호적을 두고 사는 자손들이 많고 명가고택(名家故宅)의 후예들이 아직도 남아 살고 있는 터이다. 작년 봄에 내 형님(伯氏) 백겸(百謙)이 청주목사로 오시니 역시 평간공(平簡公=공의)의 후예이시다. 馬車에서 내리면서 우선 종인을 방문하고 太尉公의 유기(遺基)가 어디냐고 물어 보았더니 대답인즉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연로하여 돌아 가신지라 애석한 일입니다. 노인들의 말씀을 들은즉 전해오는 말에 太尉公께서 처음 무농정(務農亭)에 살면서 농사에 힘써서 수만석 거부가 되었더니 高麗 太祖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 행군이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太尉公께서 장검을 집고 이를 출영하여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그 길로 종군하시었다는 등을 운운(云云)하였다. 淸州 동남쪽 10리쯤에 방정리가 있으되 바로 무농정(務農亭)의 옆이요, 韓氏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문경공(文敬公) 류항집(柳巷集)에 내 집이 방정리라는 구절이 있고 그 後 충성공(한명회)이 고향을 찾는 뜻에서 이 동리에 와서 祖業을 이어 주거(住居)를 영위한 바 있으니 여기 방정리가 태위공의 옛터임을 알 게 되어 伯氏(구암공=백겸)는 다시한번 노인들에게 질문하여 태위공(太尉公)의 유기(遺基)임이 적실무의(的實無疑)함을 다진 후에 잡초를 베어 버리고 壇을 쌓고 날을 받아 제사를 드린 후에 조정에 재직중이신 종장(宗丈) 청평부원군(淸平府原君) 응인(應寅)과 내 숙부 판서공 효순(孝純)에게 서찰을 보내 고하되 "근대의 대가인 곡성 신씨(谷城 申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와 같은 門中은 모두 고향에서 자기 시조의 제사를 받들어서 보본(報本)하는 도리를 다하거늘 항차(況且) 우리는 太尉公의 공덕과 후손들의 창원(昌遠)함이 저 두 집만 못할 바 없건만 옛 고향이라고 찾을 길이 없어서 오고 가는 자들로 하여금 본 뜰 바가 없이 되었으니 어찌 이마에 땀이 날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遺基를 찾았으니 전일필(田一筆)을 매입하여 넉넉히 제수를 마련할 수 있게 하고 종인들이 서로 체번(替番)해서 장리(掌理)하도록 하되 매년봄에 위패를 모시고 단상(壇上)에서 행사(行祀)할 것을 영구한 종규로 하기 위하여 기율(紀律)을 대강 갗추었으니 비석을 세워서 영구히 傳할수 있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宗丈들이 이 말을 들으시고 可하다고 인정하고 즉시로 통문을 써서 각 종문에 널리 통고하니 각자 금품을 헌성(獻誠)하여 이 사업에 협조토록 하고 나 준겸(浚謙)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라고 하는지라 글 솜씨가 졸열하다고 감히 사피(辭避)할 수가 없어서 삼가 아뢰옵건데 내 일찍 들은 바에 따르면 원맥이 깊은 물은 그 유역이 장원(長遠)하고 뿌리가 견실한 나무는 그 가지와 잎이 무성하며 사람이 덕을 쌓고 仁을 베풀면 그 자손이 번창한다고 하니 우리 韓氏 가문이 여러 대를 이어 오면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배출됨은 太尉公께서 적덕시인(積德施仁)하신 여음(餘蔭)이 아니겠는가. 孟子의 말씀에 군자의 유택도 5世면 끊기고 小人의 여운(餘韻)도 5世면 없어진다고 하셨으니 선악간(善惡間)에 인간의 유택(流澤)이 5世 이상 傳하지 못한다는 말씀인데 數十世가 되도록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맹자께서도 예기치 못하였던 일이다. 況且 왕패(王覇)가 광무제(光武帝)를 사경에서 잘 보좌한 것도 일시적인 기수(氣數)와의 관련이 있는 까닭에 왕애(王哀)와 융체(隆替)를 國家와 더불어 처음부터 종말까지 그 운명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옛날 사람이 子文의 선함을 칭찬하는 것도 초(楚)나라의 후세까지 傳하여 오지 못하였고 진(晋)나라의 왕사(王謝)나 당(唐)나라의 최로(崔盧)가 높은 관직을 누린 것도 당대의 호사로서 끝나고 말았다. 우리 韓氏같이 빛나는 문벌이 여러 代를 하루같이 연속하는 가문은 자고급금(自古及今)에 그 예를 보지 못하였다. 숭악산(崇嶽山)에 정기가 쌓이고 사록(沙麓)에 서기(瑞氣)가 어리여 하늘이 주는 돈후(敦厚)한 성질을 받아 특이한 인물을 낳았으니 여러 차례 국모(왕비)를 탄육(誕育)하여 우리 조선 억만년의 운명을 개척하였다.이것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遺基를 잘 다듬어서 옛날 사적을 선양하는 것이 어찌 韓氏 자손만을 爲(위)하는 私的이겠는가? 마땅히 유사서례(有司序例)에 넣어 봉사하는 儀典에 따라 매년 향폐(香幣)를 내려주시어 그 훈덕을 정표(旌表)하여야 할 터인데 아직 이것을 서둘러 하지 못하였다. 한심한 일이로다. 자고로 명문거족이 선조의 충효와 근검으로 이루어진 것이요, 자손이 고루하고 오만함으로서 추패(墜敗)하는 것이다. 太尉公께서 아직 출세하시기 전에 초야에서 근근이 살다가 출신(出身)과 동시에 家門을 일으켰고 忠孝의 대업을 이루시니 그 \자손들이 조상전래의 유업을 힘써 닦고 가법(家法)의 전통을 잘 익혀 영구히 하늘이주는 복을 향수(享受)한다면 이것이 바로 조정의 전형(典型)이요. 자손의 의범(儀範)이 되는 것이다. 그 기거하시던 택리(宅里)를 표양(表揚)하여 후세 사람들이 보고 감흥(感興)토록 한다면 그것이 사회교화에 유효한 바 적지 않으리라. 太尉公의 묘소가 옛날부터 평안도 가산군에 있다고 하였으나 年代가 오래되어 진가(眞假)를 알 수가 없으므로 자손들의 일대 수치였는데 이제 내 伯氏(구암공)가 옛날 근본을 잘 찾아서 이런 일을 함으로서 그 미적(美蹟)을 드러내게 되었다. 옛말에 천하만사가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가까운 내 門中에서 나온 것이 더욱 가상(嘉尙)하도다. 今後로 太尉公의 후손된 者로서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반드시 배알(拜謁)하고 조상 전래의 향리에 대한 경건한 성의(誠意)를 갖게 하고 타인이라도 그 조상에 관한 관념이 박약(薄弱)한 사람들은 이 법전 (法典)을 본받아 선조에 봉사(奉祀)하는 성의를 다하도록 하게 된다면 太尉公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여기서 이루어져서 영원토록 빛나리라. 그러므로 글자로 새겨두지 않을 수가 없어서 전래의 계파(系派)와 아울러 입석(立石)한 시말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告하는 바이다   

 

선조38년(1605 乙巳) 9월  일

 

후손   이조참판    준겸 지음

 

※ 한준겸(韓浚謙):1557-1627 자 익지(益之) 호 유천(柳川) 시호 문익(文翼). 인열왕후의 아버지 서원부원군에 봉해짐

 

 

 碑壇立議序(비단립의 서)

<原文> 

後孫 通訓大夫 行淸州牧使兼 淸州鎭 兵馬節制史 百謙

 

余始至此州訪鼻祖遺基幸得之懼其久而還夫也與宗人謨所以衡守之者咸曰宜立祠宇以寓香火以會子姓世世不替其庶幾乎余旣應而復思之廢興成敗相尋於無窮當太尉肇基之初家業村閭亦甚盛而傳未幾世爲邱墟矣厥後六百年始尋忠成公慨然有堂搆之志因舊基而改築之廣殖田園多置藏獲其所以光前垂後之計無所不用其極至今百有餘年而又邱墟矣片瓦半磚己無可尋今乃以數椽之屋揭虔妥靈欲傳永久而不廢何其計之疎也且禮云去廟爲祧去祧爲壇去壇爲墠其久遠隆殺之節自不容己者今取旣毁之廟復科祠宇薦其常事其於禮家之意何如也不若斲石爲碑經久不刊幸而子孫能守其業則就碑壇歲一祭之以寓羹墻之感雖時移事變不幸復爲棒棘之場屹然一片直與地紀相終始不亦善乎宗人咸曰唯敢不奉以周旋遂設壇墠樹貞珉繚以短墻前開一門以禁芻蕘之往來雞犬之汚穢如斯而止耳其作事顚末具在判書公所撰之辭於是有曰韓屹忠成之後也願納奴一口以典灑掃之役又納壇傍田一區以居其奴其他子孫隨其貧富各出米布且以州居人爲有司遞掌其事存本取利多則買田以供粢盛每年仲春中丁日不速而會齊宿致祭因設酒食以講同宗之義古者冬至祭始祖立春祭先祖然冬至俗節立春近歲各有所事於家遠近宗人有難齊會故必以仲春爲期也噫子孫之身乃祖先之氣也子孫旣己聚會則祖先精靈卽此而在矣各自齊潔以承祭祀洋洋乎若鼻祖在座子孫環侍不知七百年之遠嗚呼尙哉且夫子孫雖多其初一人之身也一人之身分爲千萬人至有遇諸道而不相識者豈不傷哉繼自今凡爲太尉之孫自西自東咸會壇下磨肌戞骨永夕團圝使道路不相識之人復合爲同堂之親玆非幸歟韓之人聞我宗之風者爭自興起奮勵以不忘本不遺親爲法然則其萃合民志綿持國脈將此碑爲中流之砥柱也歟遂書以識之

 

<역문해설> 

후손 청주목사 백겸 지음

 내가 처음 이 읍에 와서 시조 유기를 탐문하여 다행히 찾았으나 연대가 오래되면 또다시 실전될까 염려되어서 종인들과  더불어 영구 수호할 방도를 상의하였더니 중론이 사우를 건립하고 제사를 받들어 자손들이 자주 회동토록 하여 대대로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 운운하거늘 나도 일단 응락하고 다시 생각하여 본즉 무궁한 세월 속에서 폐흥 성패가 오가는 법인지라.

 

태위공께서 이 터를 잡았을 당시는 가업이나 온 동내가 매우 풍성하였을 터인데 몇 대도 전하지 못하고 이제 빈터가 되었고 그 후 600년만에 충성공이 개연히 조업을 계승할 뜻으로 구기를 개축하고 전원을 넉넉히 마련하고 노비도 많이 두어서 유업을 선양하여 후손에게 전하여줄 계책이 조밀하였었으나 지금 100여년에 또다시 폐허가 되어 기와 한 장 주춧돌 반 토막도 찾을 길이 없는지라 지금 수 칸 사옥에 선령을 모시고 영구히 전하려하면 그 계책이 심히 소루한 것이다.

 

예기에 이르되 묘보다 도를 도보다 단을 단보다 선을 하는 것이 좋다 하였으니 그 영구히 지탱하여 가는 절목이 만만치 않은 것인데 이제 묘사가 있던 자리에 다시 사우를 건립하여 상사를 행한다면 예가로서의 의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비석을 세워서 오래가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 다행히 자손들이 세업을 잘 지킨다면 비단 앞에서 세일제를 행하여 선령을 추모하는 감회를 붙이게 할 것이요. 비록 시대가 바뀌고 사태가 변혁되어 다시 쑥대밭이 되더라도 우뚝 서있는 저 비석이 이 땅덩어리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니 이것이 좋지 않은가. 여러 종인들이 모두 찬동하여 계획대로 시행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단을 축조하고 비석을 건립하며 주위에 담을 쌓고 앞에 문을 두어서 나무꾼들의 왕래와 짐승들의 오물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의 전말이 판서공이 찬한 비문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있어서 한흘 이라는 분이 있으니 바로 충성공의 후손이시다. 이 어른이 자원해서 노복1가구를 보내어 사소를 담당케 하고 또 단 옆에 밭 한자리를 헌납하여 노복의 주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  외 자손들이 각자 가세대로 전곡을 헌납하고 또 그곳에 사는 종인 중에서 유사가 되어 일을 돌려가며 관장하되 본전은 세워두고 이식을 취하여 전토를 매입하며 제수를 마련토록 하였으며 매년 중춘 정일에 부르지 않아도 회동하여 제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동족간의 정의를 강론하도록 하였다.

 

옛날에는 동지 날 시조께 제사 드리고 입춘에 선조에게 제사한 예가 있으나 동지는 속된 절일이고 입춘에는 가사에 바쁜 시기가 되어서 가인들의 회합이 여의치 못한 까닭에 중춘으로 일정을 잡은 것이다.

 

아! 자손 된 이내몸은 선조의 기혈인지라 자손들이 벌써부터 이렇게 많이 회합하였으니 할아버지 영혼도 이곳에 와서 계시리라. 각자가 깨끗이 제결하고 정성 드려 제사를 받들지니 명명에도 시조께서 앉아계시고 그 주위에 자손들이 둘러앉은 듯 700년 전인 옛날 할아버지라는 감이 전연 없을 것이다.

 

아! 슬프도다. 자손이 비록 많아도 태초에는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분신이 천만인이 되어서 지금은 서로 만나도 동족인줄을 피차간에 모르게 되었으니 이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닌가. 지금부터 태위공의 후손된 사람은 사방에서 단하로 회집하여 무릎을 맡 대고 살을 서로 비비면서 밤을 세워가며 서정을 한다면 서로 초면이라도 친밀한 동족으로 화합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온 국민이 우리 가풍을 본받아 경조 목족하는 법도에 따를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민의가 통일 되여 국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니 장차 이 비석은 중류의 지주가 될지어다. 인하여 기록하여 둔다.

 

 ※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시조 하19세 문정공의 후손 동국지리지를 지은 실학의 선구자

 

 碑壇祭文(비단제문)  (設壇時 祭文)

 

後孫  淸州牧使  百謙(후손 청주목사 백겸)

 

 昔在麗初 混一三國 惟我先祖 克佐明辟      옛날고려 건국당시 삼한국을 통합할 때

                                                       우리선조 태위공은 명군만나 잘섬겼오

 

 輸糧濟師 以成厥功 壁上之勳 疇我大忠      군량풀어 호군하고 큰공적을 성취하여

                                                       벽상공신 되시었고 대를이어 충신나니

 

 王氏五百 我韓無彊 上黨之望 冠冕東方      고려왕조 오백년에 우리한씨 번창하여

                                                       동방의 망족으로 고관대작 배출하니

 

 曰將曰相 代不乏人 纘女嗣音 以毓聖神       대장소장 정승판서 대대로 끝침 없고

                                                        종사이을 왕비나셔 성자신손 탄육하니

 

 比如嘉穀 有種有收 孰豊其源 不羨其流       좋은씨앗 얻은후에 좋은곡식 거두는법

                                                        어느조상 덕일런가 내가무엇 부러우랴

 

 顧惟不肖 亦忝後嗣 上賴積慶 來莅州事       생각건대 이내몸도 후손으로 태어나서

                                                        내어주신 음덕으로 청주목사 래임하니

 

 石羊無表 松楸誰記 幸有遺墟 尙傳舊里       비갈하나 표없으니 산소인들 뉘알손가

                                                        다행이도 유허있어 옛이름을 전하옵기

 

 掃壇而祭 洩我遠誠 宗人咸聚 樽酌潔淸       단모으고 제사드려 영모지정 사룁니다

                                                        여러일가 다모여서 재계하고 잔드리며

 

 追惟前烈 慨然如昨 遠矣嗚呼 有淚橫臆       높은공덕 추모하니 어제인듯 비감하오

                                                        세대가 멀어짐을 더욱슬퍼 우나이다

 

 

高麗三重大匡太尉韓公夫人宋氏合葬墓誌 (고려 삼중대광 태위한공 부인송씨 합장묘지)

 

※ 이 지석문(誌石文)은 시조 태위부군(太尉府君)의 묘소가 오랫동안 실호되어 盧와 李 양성이 모장(冒葬)하였던 것을 숙종14년戊辰(1688)에 신적(信蹟)을 심득(尋得)하고 다음해인 己巳年에 장령 (掌令)형(濙),지평(持平)성우(聖佑)가 관에 제소하여 모장을 굴제(掘除)하고 영역을 개봉축할 때 후일을 위하여 봉장(奉藏)한 지석문으로 생원(生員)숙(塾)의 찬(撰)으로 되어있다.1980년(庚申)에 始祖 묘역 미화 사업으로 봉토를 개수할 때 발견된 것인데 시조 묘소의 지난 사실들이 명료하게 기록되였기에 이를 전재하여 둔다.(위의 관직은 제소 당시의 관직으로 다른곳에는 참판 성우, 군수 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후일의 관직임)

 

<原文> 

太尉諱蘭姓韓氏本上黨人上黨之韓出自箕子箕子氏世衰爲馬韓子孫居上黨稱韓氏魏志具載其事太尉佐麗朝統合三韓勳名事業照暎方策子孫昌大號爲甲族上黨淸州之號州東南務農亭有方井里卽太尉遺墟也又其南七八里有駕山卽太尉葬地也舊有表石三重大匡太尉韓七字州之耆老士大夫多見而言之者子孫不知也會有州人盧峰者 孝廟十年倫葬其父於太尉墓後峰死又葬於太尉墓前今 上十四年後孫掌今濚持平聖佑始聞而知之與諸宗人訟于懷德縣峰之隣族不敢隱其言古老傳說事甚悉峰之子再徵發其父祖兩世塚是歲十月節度使根等會祭太尉墓啓舊封改築之壙上築石三層甚整麗時石葬之制然也遂仍舊加封周三十二尺高九尺餘翌年秋奸孼再寬嗾執法者誣 上廳至于啓視壙中得三鍊石四鐵釘雖再寬以誣 上被罪詼郞以犯壙削職守臣以 上命封築嗚呼太尉泉壤之禍有不忍言者矣請啓視者京兆尹李宇鼎董視者叅軍閔光魯也太尉內外子孫其麗不億不可悉記只敍墳墓旣失復得之由揭之碑葬之誌裨後來有所攷徵

皇明崇禎後庚午八月 日 後孫 生員 塾 謹識

                                 後孫 生員 德欽 書

 

<역문해설> 

태위의 諱는 란(蘭)이요.성은 韓氏니 본관은 상당(上黨)이다.上黨 韓氏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한 바 기자의 세대가 쇠퇴하여 마한(馬韓)이 되었고 그 자손이 상당현(上黨縣)에 살면서 韓氏라고 칭하였으니 그 사실이 위지(魏誌)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太尉께서 고려조(麗祖)를 보우(輔佑)하여 三韓을 통합하시니 그 훈명(勳名)높은 사적(事蹟)이 사서에 찬란하게 빛나게 되고 자손이 번성하여 갑족(甲族)이라 칭하게 되었다.上黨은 淸州의 옛 이름이며 청주읍에서 동남쪽에 무농정(務農亭)이 있는 방정리(方井里)는 太尉公의 유허(遺噓)이고 또 거기서 남쪽으로 七,八里 여에 가산이 있으니 이 곳이 태위공 묘소(墓所)가 계신 곳이다.옛날에 삼중대광태위한(三重大匡太尉韓)이라는 일곱자가 새겨진 표석이 있는 것을 읍내에 사는 노인이나 사대부들이 보았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자손으로서는 아는 이가 없었다.마침 군민 중에 노봉(盧峰)이란 자가 있어 효종10년己亥(1659년)에 제 아비를 태위공 묘소 뒷 쪽에 매장하고 峰이 사망하니 또 太尉公의 묘 전면에다 몰래 묘를 썼다.숙종14년戊辰(1688)에 후손 장령(掌令)형(濙)과 지평(持平)성우(聖佑)가 처음으로 이 사실을 듣고 알게 되어서 제종(諸宗)과 더불어 회덕현감에게 제소하였더니 盧峰의 족속들이 감히 은피(隱避)하지 못하고 고로 (古老)들의 전설(傳說)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고 峰의 자식은 그 부조양대(父祖兩代)의 무덤을 발굴하여 갔다. 같은 해 10월에 節度使 근(根) 등이 太尉公 묘 앞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옛 봉분을 헐고 개봉축(改封築)하였는데 광중(壙中) 안에 3층석축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니 고려 시대의 석장제도(石葬制度) 였던 것이다.마침내 구제(舊制)대로 봉축(封築)하니 둘레가 32척이요,높이가 9척餘였다. 그 다음해 가을에 간악한 천민 재관(再寬)이란 자가 법관을 선동해서 임금의 총문(聰聞)을 속여 광중을 파보니 거기서 삼련석(三鍊石)과 사철정 (四鐵釘)을 보게 되었다.재관이는 임금 속인 죄로 벌을 받고 법관 회랑(詼郞)은 범광(犯壙)한 죄로 관직을 삭탈 당하였으며 왕이 군수에게 명하여 분묘를 개봉축하게 하였다. 아! 원통함이다. 太尉公의 지하에까지 미치는 禍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開壙 할 것을 요청한 자는 경조윤(京兆尹) 이우정(李宇鼎)이요, 일을 맡아 본 자는 참군(叅軍)민광로(閔光盧)였다. 太尉公의 내외 자손들이 그 수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다만 산소를 실전하였다가 다시 심득 (尋得)한 사유를 서술하여 비석에 새기고 지석(誌石)을 매장하여 후인들의 고증(考徵)이 되도록 하련다.

1690(崇禎後庚午) 8월  일 후손 생원 숙 지음  후손 생원 덕흠 글

 

※ 숭정(崇禎)은 중국 명왕조 의종황제의 연호로 당시는 명왕조는 멸망하고 청왕조가 들어서 조정에서는 청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만주족을 야만인으로 취급 명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음.

※ 송월당 숙(塾:1646~1710) 夷襄公의 후손으로 시조하 23世 군수를 지냄

 

※ 장령 형(濙:1633~1689) 文襄公의 후손으로 시조하 21世

 

 

墓山改築時祝文(묘산개축 시 축문)

 

惟此駕山 寔公眞宅  務農亭傍 方井在北            이산줄기 가산이라 公의산소 여기있고 무농정이

                                                            이웃이요 방정리가 북에있오

 

世代旣遠 香火久絶  守護無人 耕犁遽及            세대가 멀어지며 오랜세월 궐사했오 수호인이

                                                             없는틈에 파고갈아 밭이되고

 

他人入葬 石羊無迹  巋然大塚 祗留半月            타인들이 도장하니 석물조차 간곳없소 우뚝솟은

                                                             큰봉분이 반달같이 남아있어

 

珉俗傳言 往事如昨  豊碑在口 奚待片石            동네사람 전설속에 지난일이 어제같소 공덕비가

                                                             예있으니 표석찾을 필요없고

 

事必待時 幸有今日  掃去汚穢 改築塋域            天時人事 때가있어 오늘에야 운이와서  더러운

                                                            것 쓸어내고 묘역개축 하옵나니

 

恐致震驚  冞增愴惕 玆陳厥由 敢薦泂酌            영령께서 놀라실까 황송하고 비통하여. 이사연

                                                             을 아뢰오며 삼가잔을 드립니다

 

後孫 忠淸道兵馬節度使 根(후손 충청도병마절도사 근)

 

※ 절도사  근(根 : 1633~1690) 夷襄公의 후손으로 시조하 21世

 

 

始祖墓所奉審記(시조묘소봉심기)

 

숙종14년(戊辰) 전명공지손(蠡溟公之孫) 성헌(聖憲)이 박고통금(博古通今)하야 강의유대지(剛毅有大志)하며 지약봉선지절(至若奉先之節)에 미불용극(靡不用極)이러니 기거(旣居) 비조지유기(鼻祖之遺基)하야는 상미득(尙未得) 비조지유택(鼻祖之遺宅)으로 위일대한(爲一大恨)하야 이묘재가산지문적(以墓在嘉山之文跡)으로 혹왕평안도가산(或往平安道嘉山)하고 혹왕회인가산(或往懷仁嘉山)하야 적년광수(積年廣搜)로대 종막지득의(終莫之得矣)러니 체우(逮于) 숙종무진(戊辰)하야 유일동자(有一童子)-조래청견왈(朝來請見曰)아역한성야(我亦韓姓也)니 유욕언래이(有欲言來耳)니다. 성헌(聖憲)이 문왈여유하언(問曰汝有何言)고 왈증문종장(曰曾聞宗丈)이 광구시조산소운의(廣求始祖山所云矣)러니 기과득부(其果得否)잇가 왈미야(曰未也)라 여(汝)-하문지(何問之)요 궐아왈묘재지척(厥兒曰墓在咫尺)하니 구득하난이(求得何難)이있고 성헌이 차경차희(且驚且喜)하고 인기아근접(引其兒近接)하야 상문기위절(상문기위절)하니 궐아왈아(厥兒曰我)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무처위탁(無處委託)하야 작고우가산정씨지가의(作雇于駕山鄭氏之家矣)러니 주인옹(主人翁)이 여동한노가(與同閈盧哥)로 일장쟁힐이귀(一場爭詰而歸)하야 야간(夜間)에 독어왈오(獨語曰吾)-고(告) 언우대촌한별좌댁(言于臺村韓別坐宅)이면 칙노가(則盧哥)가 장진유의(將盡劉矣)라 하거늘 오(吾) 잠문기고(暫問其故)한데 칙옹왈차동학(則翁曰此洞壑)은 소칭한태위산소동(素稱韓太尉山所洞)이러니 노가(盧哥)가 릉이기분묘(陵夷其墳墓)하고 절기비요(折其碑腰)하야 장치우정저운고(藏置于井底云故)로 이시급급래고이(以是急急來告耳)니다. 성헌이 문이경희(聞而警喜)하고 인사기산지언칭(因思其山之諺稱)하니 칙가산야가산지가(則駕山也駕山之駕)-와전위가산지(訛傳爲嘉山之)-가자(嘉字)를 황연대각(怳然大覺)하고 칙치견본주병사한근(則馳見本州兵使韓根-夷襄公7世孫)하고 상진기동자소언(詳陳其童子所言)하고 여지해왕가산(與之偕往駕山)하야 위선굴정(爲先掘井)하야 득기소장비석(得其所藏碑石)하니 과중절(果中折)이로데 문자상완연(文字尙宛然)하야 시지태위공분묘재차야(始知太尉公墳墓在此也)라 발문경향(發文京鄕)하야 여제종인(與諸宗人)으로 송우관(訟于官)하야 진굴노총(盡掘盧塚)하고 개축영역(改築塋域)하야 입표매지(立表埋誌)하고 매치묘전(買置墓田)하야 이봉세사(以奉歲祀)하고 공신시달지성(供伸豺獺之誠)하다. 그 때 각처종인(各處宗人)이 제회우묘소(齊會于墓所)하야 함이위(咸以爲)하되 최초에 산소지실호(山所之失護)는 개연자손지산재경향(盖緣子孫之散在京鄕)하야 부득종종성소지고야(不得種種省掃之故也)러니 금차추멱산소(今此推覔山所)하니 종인성헌(宗人聖憲)이 유대공언(有大功焉)하며 차방정종인(且方井宗人)이 거재(居在) 시조유기(始祖遺基)하야 거묘하심밀이(距墓下甚密邇)하니 차후수호지절(此後守護之節)을 편작주인(便作主人)하고 특허기동록(特許其東麓)하야 용기사산(用其私山)하야 비위갈성금호지도고(俾爲竭誠禁護之道故)로 己丑10월12일 이폄별좌부군(移窆別坐府君)하고 기후(其後)에 계장(繼葬) 증승지부군어황고묘서(贈承旨府君於皇考墓西)하다.

후손(後孫) 서원군수(西原郡守) 숙(塾) 근기(謹記)

 

 

淸州返始堂記(청주반시당기)

<原文> 

淸州本百謙先祖高麗太尉公開基之地後七百餘年而百謙分牧是邑鄕人父老徃徃傳說當時之事指某邱爲舊遊指某水爲舊釣令人感古悼昔有不能己者於是就其故里遺墟築壇竪碑以寓羹墻之感吾弟柳川公實記其事又於公衙東牆外開一小屋凡四架五楣以其左半爲溫房前開後壁盖嚮晦宴息取便起居也以其右半爲凉軒四達八牕盖待朝聽民恐有壅蔽也合而扁之曰返始堂其取義也有二焉在百謙則返於始生之鄕以其地而言也在他人則返於始禀之性以其德而言也顧名思義唯其當而己不施繪事昭其儉也不敢茅茨圖其久也周繚垣牆籬植花卉出入之際由內達外無煩徒卒開門則爲公堂闔門則爲私室一開一闔動靜循環公與私不相妨心與身俱得宜此作堂之梗槩也且不斯堂之所貯雖無異趣奇觀夏聽南川冬看雪山秋月春花皆足以怡神樂志以永今夕但受人之牧不敢自逸春省耕秋省歛冬催科皆有程限日不暇給無一時等閒遨遊耳惟長夏數月稍得無事民歸農畝簿牒無多綠陰滿庭盡日偷閒與二三學徒携經執書講明道理使一州之人皆知返始之義庶幾移孝爲忠自家國不下堂而成敎矣然則斯堂之作亦不能無少補於癡話而鹵莽不敏盖有志而未遑焉噫榮歸故鄕古人比之晝錦豈非其人之德之業族以享有富歸而非濫叨乎其向人誇矜亦宜矣如百謙簿劣戶素日夕惴惴常以負 國恩忝所生爲憂又奚暇以榮耀自多哉此則事同而心異不敢效嚬也旣以此求詠於諸公而因記其顚末以告繼珥坐斯堂者

 

萬曆三十五年(1607)正月上澣 後孫 牧使 百謙 謹記

 

<역문해설> 

청주는 원래 백겸의 선조 고려 태위공께서 개기(開基)하신 땅이다. 7백여 년이나 후세가 되어서 백겸이 이 읍의 목사(牧使)가 되었는데 고을 부로들이 당시의 일을 이야기로 전하며 어느 언덕을 가리키며 옛날 낚시하시던 곳이라고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옛 일을 느끼고 슬퍼함을 마지않게 하는 것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 옛 마을 유허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조상님을 숭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것이다. 나의 아우 유천공이 그 일에 대하여 실기를 썼다. 또 공아의 동쪽 울타리 밖에 작은 집 하나를 지으니 모두 네 칸에 중방이 다섯 개이다.

 

그 왼쪽 반으로 따듯한 방을 만드니 앞은 트이고 뒤는 벽이다. 대개 해가 진 다음에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기거하기 편하게 하자는 것이고 그 오른쪽 반은 시원한 마루를 만드니 사방팔방으로 내다보이는 창을 내었다. 대개 아침을 기다려 백성의 소리를 듣는데 있어서 막히고 가려짐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합쳐서 편액을 반시당이라고 하였다. 뜻을 취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백겸에게 있어서는 시조께서 태어나신 고향으로 돌아와 그 처지를 말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처음 타고난 성품으로 돌아가는 그 덕을 말하는 것인데 이름을 돌아보아 옳은 뜻을 생각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모양새를 꾸미거나 칠을 하지 않은 것은 검소함을 밝히려는 것이고 감히 떼나 풀로 지붕을 덮지 않은 것은 집이 오래 가기를 도모한 것이며 둘레에 담장을 만들지 않고 드문드문 꽃나무를 심은 것은 출입할 때 도졸(徒卒)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문을 열면 공당이 되고 문을 닫으면 개인의 공간이 된다. 한번 열고 한번 닫으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순환하고 공과 사가 서로 거리낄 것이 없으며 마음과 몸이 함께 편안하다.

 

이것이 당을 만든 개략이다.

 

또한 이 집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비록 특별한 아취나 경관은 없으나 여름이면 남천의 물소리를 듣고 겨울이면 눈 덮인 산을 보며 가을 달, 봄꽃이 모두 정신을 편안히 하고 뜻을 즐기기에 충분하여 시로 읊조릴 만한 것이 많다.

 

그러나 사람(주상)의 목사로서의 맡은 임무가 있으니 감히 마음대로 안일하게 지낼 수는 없다. 봄에는 밭갈이를 돌보고 가을에는 가을걷이를 돌보며 겨울에는 학문의 과정을 재촉해야 되는데 모두 기일을 정한 일정이 있으니 한시도 등한하게 놀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직 긴 여름 몇 달 동안은 조금 한가하여 백성들은 농사일로 논밭으로 돌아가고 장부와 보고 등 공무의 일이 많지 않다. 녹음이 마당에 가득차고 종일 한가로운 시간이 나면 두세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경서를 손에 잡고 밝은 이치를 강도하여 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반시의 뜻을 알게 하며 효를 옮겨 충성을 하고 집으로부터 조정에 이르기까지 당을 내려가지 않고도 교화가 이루어 질 것이니 그렇다면 이 당을 짓는 것이 또한 조금은 정치와 교화에 보탬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여 대개 뜻은 있으나 겨를이 없었다고 하겠다.

 

아! 영광스럽게 고향에 돌아옴을 옛 사람은 화금(畵錦)에 비유하였다.

 

어찌 그 사람의 덕과 업적이 부귀를 누리기에 족하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은 사람에게 자랑을 하여도 괜찮을 것이나 백겸과 같이 박덕하고 못난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힘겹게 나라의 은혜로 황송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또한 어느 겨를에 영광과 빛남이 스스로 많다고 하겠는가. 이는 일은 같지만 마음은 다른 것이니 감히 남의 흉내를 내지 못하는 것인데 이미 이와 같이 여러분들에게 시를 짓기를 요청하였으니 인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여 이 당에 앉은 분들에게 계이를 고하는 바이다.

 

1607년(선조40 丁未) 정월 상한  후손 목사 백겸 근기

 

 

太尉公 神道碑銘(태위공 신도비명)

<原文> 

自有生民以來便有父子有父子生生相承千萬年皆可世也年代玄遠書契無徵則不得不以所聞見記其世亦自然之勢也吾東方大姓必稱韓氏殷師東來後孫得姓者三韓氏居一焉自是厥後千數百年至我太尉府君始家湖西之淸州爲諸韓鼻祖盖所聞見者然也府君諱蘭佐麗朝策元功位太尉三重大匡名在壁上世傳府君家務農亭服田力穡積穀屢巨萬麗朝征甄萱道西原三軍缺餉府君杖劍出迎指一囷以犒之遂從以驅馳以基五百年麗祚亦偉矣哉府君積德累仁始自拔於當世託契眞主又能餘慶後人大啓我子孫勝國以來名公巨卿碩德嵬勳代有其人自餘砥礪名行標準一世者又磊落相望入我  朝尤有大焉六誕  聖女嬪于  王家乃是崔盧族望復作塗莘門戶有若臣景敏公卿篤生  神懿王妃有若臣襄節公確篤生  昭惠王妃有若臣忠成公明澮篤生  章順恭惠兩王妃有若臣襄惠公伯倫篤生 安順王妃有若臣文翼公浚謙篤生  仁烈王妃吾東方萬億年  聖子神孫實皆出於府君嗚呼植根固者其枝茂發源深者其流長今去府君近千載盛德偉烈雖不可考觀于此庶可以徵信其萬一於休盛哉州治東南走十里有方井里卽府君當日所卜之居也自方井里又南距六七里有駕山山之南麓負坎之原實府君衣履之藏而中間失護爲他人冒占堂斧失形塋域莫尋萬曆乙巳後孫叅議百謙牧本州建議築壇於方井里遺墟而歲一祭後孫忠靖公應寅實贊成之事在浚謙所爲碑文嗚呼人爲雖巧天道至公顧時有屈伸暫容人詐僞君子幽宅終亦無湮沒不傳之理某山幾崗自發於故老聞見之語遺碑舊刻尙驗於幾年剖碎之餘里中婦孺亦多有指點者  仁祖戊子後孫淸寧君德及又牧本州始搜訪之及  肅廟己巳後孫叅判聖佑掌令濙郡守塾相率卞之官  朝廷至遣京兆郞開視土中得下埋物訟者首服於是前之冒葬者始得移諸子孫就加封築而掃除焉此府君墓兆顯晦之終始也夫人宋氏宋盖東方大姓姓貫未有考嗚呼天地交而品彙遂府君之委祉子孫歷千年而彌昌者亦豈無所資哉歲甲申諸子孫相與謀曰以我祖之德之烈尙闕墓道之顯刻此實諸宗之羞千萬年之後高崖爲谷深谷爲陵尤不可無識況己事不遠有足可徵者盍思所以傳示久遠之圖皆曰諾於是諸宗相與鳩財伐石樹之墓左謹復記之如右非敢曰揄揚先懿盖將以永告來許凡爲我府君後孫者其監于玆常自奮勵上而先祖積累之勤下以念後昆繼述之道惟忠孝德禮以善其行惟勤謹恭儉以業其家胥訓胥告克類克肖旣以自勖其身又以敎詔其後人早夜孜孜母敢荒怠則報本之誠裕後之道兩無所憾而吾先祖積德之報決知其未艾詩曰夙興夜寐無忝爾所生又曰敎誨爾子式穀似之嗚呼後之人尙亦勖之哉銘曰

 

 箕枝有三 韓居其一 白馬東來 我罔爲僕  歛時疇福 歸之子孫 綿二千載 至于府君   

相厥攸居 莫如淸上 川澤訏訏 原野膴膴 務農之亭 方井之里 我稼我穡 維糜維苞   

八域雲擾 時則衰季 晦迹草萊 藏器以俟 麗祖龍興 師出南服 轅門一謁 其契灑落   

軍母呼庚 我有積囷 飢者宿飽 旌麾一新 遂許驅馳 用贊大勳 書名壁上 功莫與京   

在子在孫 屢公累卿 麗籙五百 與之終始 逮于熙代 益昌而熾 沙麗儲祥 仍世荐膺   

一姓六后 在古何曾 鴻儒碩軒 宗功茂德 歷數後前 錯落今昔 良由善積 慶流仍雲   

如水疏遠 如木培根 本之則一 至于千億 受祿宜稼 孰非遺澤 凡我同祖 緬懷先烈  

夙夜匪懈 庶幾似續 遺墓若堂 尙闕麗牲 一人是倡 衆宗齊聲 卽山伐石 其崇八尺   

于以刻之 永詔无極

 

崇禎紀元後三戊子 月 日 後孫 左議政 翼謨 撰

英祖44年戊子(1768)   후손 좌의정 익모 지음

 

刑曹判書 光會 書             (형조판서 광회 글)

 

左尹 德弼 篆                       (좌윤 덕필 전서)

 

<역문해설>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부자(父子)가 있게 되였고 父子가 있어 낳고 또 낳아 연속하여 감으로 천만년이라도 세대를 이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대(年代)가 아득히 멀어지고 글로서 기록된 증거가 없으면 하는수 없이 들은대로 본대로 그세대의 일을 기술(記述)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러운 사세(事勢)이다. 우리나라 大姓에는 반듯이 韓씨를 지칭하게 된다. 箕子의 後孫으로 姓을 얻은자가 3인인데 韓씨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후 천수백년을 지나 태위공때에 이르러 비로서 청주에 정착하엿으니 이 어른이 청주한씨의 시조이시니 옛부터 전하여오는 이야기와 고적(古跡)을 보아서 확실히 알 수가 있는 바이다. 부군의 휘는 란(蘭)이시니 고려태조를 보좌한 공훈으로 벼슬이 태위삼중대광(太尉三重大匡)에 오르시고 이름이 벽상공신에 기록 되였다. 윗대로부터 전하여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부군께서 무농정에 起居하시면서 농사에 힘써 수 만석의 富를 이루었더니 고려태조가 청주를 지나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 중에 군량이 떨어져 곤란을 겪게 되였더니 부군께서 장검을 집고 태조를 맞이하여 창고를 열어 3군을 배불리 먹여 사기를 돋운 후 함께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워 고려500년 왕조의 터전을 다졌으니 참으로 위대한 일이라. 부군께서 德을 쌓고 仁을 베풀어 당세에 특출하신 인품으로 참다운 군주를 만나 의지가 상통하였고 나아가 그 음덕이 후세에까지 끼쳐서 자손들의 앞길을 크게 열어주시니 개국한 이후 명성 높은 공경대부와 덕망과 공훈이 큰 위인이 대대로 나오고 이름과 행실이 일세의 사표가 될 뛰어난 인재가 많았다. 조선에서는 더욱 창대 하였다. 6위의 성녀를 탄육하여 왕비가 되시니 명망거족의 문호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경민공 경은 신의왕비를 탄육하셨고 양절공 확은 소혜왕비, 충성공 명회는 장순,공혜 두  왕비를, 양혜공 백륜은 안순왕비를 탄육하셨으며, 문익공 준겸은 인열왕비를 탄육하셨으니 우리나라 왕자, 왕손이 부군의 후예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뿌리거 튼튼한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흐름이 긴 법이다. 부군께서 가신지 근 1000년에 위대한 덕행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으나 위의 사실만 보더라도 신빙할 수 있으니 참 거룩하도다. 청주 동남쪽 10리지점에 방정리가 있으니 부군께서 당시 복거하시던 옛터요. 방정리 남쪽 6~7리에 가산이 있고 가산남쪽 건좌에 부군의 묘소가 있다. 중간에 실전 되여 타인들이 모점하여 봉분의 형태가 없어지고 묘역을 찾을 길이 없었다. 萬歷乙巳(선조38년 1605)에 후손 백겸이 청주목사로 와서 방정유허에 단을 쌓고 세일제를 봉행할 것을 건의하니 충정공 응인이 크게 찬성하였다는 사실이 문익공 준겸이 쓴 비문에 기재  되였다. 슬프다!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요사하더라도 天道는 지공무사(至公無邪)하다. 때에 따라 굴신(屈伸)이 있어 잠시의 사기행위가 용납된다고 하더라도 군자의 유택이 끝내 사라지고 마는 이치가 없는 법이다. 아무 산 어느봉에 누구의 묘라는 것이 노인들의 지난날 듣고 본 고담속에 자연히 흘러나오게 마련이고 버린碑돌 옛날 刻字라도 여러 해 깍기고 부서지다 남은 파편에서 살펴 볼 수가 있으며 동네 부인들 중에서도 여기가 누구의 묘라든가 저것이 뉘집 산소라든가 지목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인조26년 戊子(1648)에 후손 청령군(淸寧君) 덕급(德及)이 청주목사로 와서 처음으로 찾아보았고 숙종15년 己巳(1689)에 참판(叅判)성우(聖佑), 掌令(장령) 濙(형), 군수(郡守) 숙(塾)이 같이 나와서 관청에 제소하니 조정에서 경조랑(京兆郞)을 보내여 토중을 파본즉 부장품등 확실한 증거물이 나오므로 범인은 사실대로 자백하였다. 이제야 모장한 것들을 파서 옳겨 버리고 여러 자손들이 나가서 봉분을 쌓고 묘역을 깨끗이 정돈하였다. 이것이 부군묘소를 잃었다 찾은 내력이다. 부인은 宋氏이시니 宋氏는 우리나라의 대성인데 본관을 알  길이 없다. 오호라! 천지가 감응하는 이치에 따라 모든 사물의 品類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부군께서 복을 쌓으신 은덕으로 천년이 지나도록 자손이 더욱 창성하는 것이니 어찌 유래한 뒷받침이 없다고 하랴. 甲申年(영조40년 1764)에 여러 자손들이 상의하기를 우리 시조의 높으신 덕행으로도 아직까지 묘비가 없으니 이는 곳 종중의 큰 수치가 아닌가. 천만년 후에 높은 언덕이 골이 되고 깊은 골이 언덕으로 변할 경우를 상상한다면 더구나 표식을 하니 할 수 없고 또한 이미 겪은 일이 오래되지 않아서 단단히 경계하여야 될 일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데 어찌 영원히 傳示할 계책을 강구치 않으려는가 하니 모두 크게 찬성하고 서로 서둘러서 자금을 거두고 돌을 다듬어서 묘 옆에 세우고 이런 사실을 기록하니 감히 선조의 위덕을 선양하였다고 말할수는 없으나 장차 다음 세대의 자손에게 길이길이 알리는 바이니 부군의 후손되는 사람들은 이것을 거울삼아서 항상 분발하고 면려(勉勵)할지며 위로는 선조의 德을 쌓고 仁을 베푸신 공을 추모하며 아래로는 후손이 계승하여 지켜나갈 길을 염원하라. 오직 충효와 덕례로써 그 행동을 착하게 하고 또 근근(勤謹)하고 공검(恭儉)함으로써 가업을 삼을 것이며 서로 서로 훈계하고 충고하며 진실로 착하고 현명하여 우선 제몸부터 닦고 나아가서는 후인들을 교도하라. 항상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이하면 선조에 대한 보답과 자손에 대한 도리가 모두 遺憾이 없을 것이요. 우리 선조께서 德을 쌓으신 응보가 결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잠들 때까지 네 부모에게 욕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식을 잘 가르쳐서 좋은길로 인도하라 하였다. 아! 후손들이여 더욱 더 힘쓸지어다 銘하여 曰

 

기자후예  삼파인데  그중일파  韓씨로다  東方으로  오신뜻은  周의臣業  꺼림이라         

 

五福을    거두어서  자손에게  전해주니  二千年을  연이어서  府君世代  이르렀네

 

좋은터를  골라보니  청주땅이  第一이라  水利도    풍요하고  넓은들이  기름지내

 

 務農亭이  내집이요  方井里가  내터인데  몸소내가  농사지니  五穀百穀  쌓이누나

 

팔도강산  소란하여  때는마침  末世인데  草野에    묻혀살며  때오기를  기다렸네

 

麗太祖의  南伐軍師  청주땅을  지날적에  군문찾아  상봉하니  그연분이  두텁구나

 

군량없다  걱정마소  내창고에  쌓였노라  주린군사  포식하니  군기가    일신하다

 

드디어    종군하여  대훈업을  이루어서  벽상공신  되셨으니  보다큰공  없으리라

 

아들손자  연이어서  공수대부  배출하니  고려왕조  오백년에  시종을    같이했네

 

조선시대  이르러서  더욱창대  하였으니  사려성에  서기어려  왕운이    연이어서

 

일가문에  육왕후가  고금에    또있던가  높은선비  어진재상  일등공신  유덕군자  

 

전후고금  연이어서  한정없이  배출하니  적선하신  그음덕이  자손에게  미침이라

 

줄기깊은  물과같이  뿌리굳은  나무같이  한사람의  심은덕이  천만자손  복이되어

 

사농간에  하는일이  모두모두  유택일세  피가같은  일가들아  조상의덕  잊지말고

 

아침저녁  부지런히  유업계승  바라노라  산소에는  아직까지  비석을    못세웠네  

 

한사람이  제안하자  여러일가  찬동하여  돌을깍아  다듬으니  그높이가  팔척이라

 

이에글을  새기어서  영원토록  밝히노라

 

 영조44년 戊子(1768)     후손 좌의정 익모 지음

 형조판서 광회 글

   좌윤    덕필 전서

 

 

務農亭 碑文(무농정 비문)

<原文> 

後孫 生員 益著 識

 

務農亭古我始祖太尉公之所創也太尉方其未遇也隱德邱園臨郊作亭庀勑田功命名曰務農坪之得號者亦以此也伊後八百餘禩後孫韓公根節度湖西錦還本州首就方井舊里遂與宗人遡太尉之遺跡卽所謂務農亭祗傳其號未見其存者於是謀所以依式寫其遺址築土而封焉樹石而表之以爲後人之徵信噫公之來也旣新乎返始之堂又標乎務農之亭譬之如室旣鎭其甍嗚呼休哉

 

崇禎 後戊辰(1688) 夏立

 

<역문해설> 

후손 생원 益著(익저) 지음

 무농정은 우리 시조이신 태위공께서 창건하시었다. 태위께서 아직 출세하시기 전에 임원(林園)에 은거(隱居)하시면서 들판을 향하여 정자를 세우시고 여기서 농경(農耕)의 정책(政策)을 강구 (講究)하셔서 정자의 이름을 務農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 800여년 후에 후손 根이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고향인 청주에 오게 되어 방정리 종인들과 더불어 태위공의 유적을 찾아본 즉 무농정은 겨우 그 이름만 전하여 올 뿐이고 실물은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후세에 조상 숭배의 본뜰 바를 강구하고자 그 유지(遺址)를 찾아 토대(土臺)를 축조하고 그 위에 표석을 세워 후손들의 고증(考徵)할 신표(信標)가 되게 하였다. 아! 公이 여기 오신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미 반시당(返始堂)도 새롭게 해 놓았고 또 무농정의 표석까지 세워 놓았다. 큰일을 완전하게 필력(畢力)하였으니 진실로 훌륭한 일이로다.

 

숙종14년 무진(1688) 여름에 세움.

 

 

 高麗太尉威襄韓公諱蘭遺墟碑銘(태위공 유허비명)

<原文> 

 湖西之 永同 黃澗은 淸州韓氏 始祖 高麗 太尉 諡 威襄公의 誕降之鄕也라. 小白山脈下 俗離山이 南走而西하야 突起聳立하니 其名曰 芝庄山이요. 北分岐가 宛如兩腕抱兒狀而 中脊이 小西爲削壁하니 曰吐汗山이요 直下에 有 吐蘭里하고 峽中有澗하니 卽 蘭谷川이라 出自芝庄하야 貫于 舊黃澗邑而 注入於 月留峰下하야 直流錦江이라.自黃澗 從尙州之路하야 北向二里타가 復望 芝庄하고 沂其源이 東向三里則 洞口에 數株松槐가 自爲亭壇이라.自此左便 數百步 相望之地에 有威襄公 肇降之基하고 右便 數百步 深邃之處에 亦有講道之所라. 公이 誕生時에 近處 土與山이 出汗故로 仍稱 土汗이라타가 後에 改稱 吐蘭里하니 今 永同郡 黃澗面 蘭谷里라. 舊 黃澗邑誌에 本邑同面 吐蘭里는 太尉公 韓蘭의 誕生地니 至于今 正寢基地는 該邑에서 每年 蓋草而傳 千秋云이러라. 公이 中年에 夢得淸州 蜈倉坪하야 移居淸州하니 以後子孫이 世尊于此하야 傳至40餘世하고 歷一千百有餘祀에 其子姓之蕃衍은 不可勝言이라. 麗代에 名公賢卿이 連綿不絶하고 文章德行과 勳功名節이 昭載史乘하고 簪纓圭組가 燀爀承襲하야 遂爲東方 甲乙望族하니 殷太師 箕聖之後로 歷千數百年이라. 有諱智原하니 官은 侍中이요 有四子하니 諱 蔓,簡,蘭,英이라.諱 蘭이 序於三하니 其子孫이 仍以淸州로 爲貫하니라. 公이 高麗開國에 叅劃하야 同二年 十月에 與裵武烈公으로 上書奏 平壤築城之利하니 上이 嘉納而 命公與 廉湘하야 督勵行之러니 廉湘은 中途病하야 未能幹事하니 復命 康允珩 替行하야 終是畢役焉하다. 太祖가 征甄萱之時에 師出宅前하니 公이 以杖劍 出迎하야 犒饋十萬大軍하고 且躬編入於 行伍之問하야 振旅行進하야 凱樂旋師하고 佐太祖하야 定國礎하니 是故로 特蒙 開國壁上功臣 三重大匡 門下太尉 諡威烈 改諡威襄하니라. 於戱라 世遠歲久하야 公之積德懿行을 不可詳悉이나 其子姓之 振振이 如是하고 富貴之盛이 如是하니 非種德之 蔭이면 其赫赫 餘慶이 烏能如是哉아 源深流遠하고 根固枝茂之理는 固不可誣也로다. 至於朝鮮하야 尤爲隆盛하니 金紫銀靑은 奕世嬋聯하고 腏享祠院은 八域星布하고 忠節棹楔은 閭里相望하고 孝行旌閭는 各處稱頌하고 學行文章과 鴻儒碩學은 國內士林이 無不瞻誦하여 且崇嶽之隆은 非百非千이요. 沙麓之慶은 數五加一하고 駙馬之尉가 聯四하니 貴莫盛焉이요 榮莫無窮이라 此-公의 積累之功이 不爽이요 點佑之功이 有裕也로다. 噫라. 公之 崇德偉光을 不泯而 欲詳之나 世代浸遠하고 文獻散佚하야 或有 疏漏之端하니 爲其後裔者 無不嗟惜焉이러라. 今其後孫等이 齎其先世記載史乘하야 訪余而 請顯刻表墟之文일새 威襄公之 盛德高節은 己有前後諸賢之 贊述하니 拙陋가 安敢重複描寫리요 辭不獲而 依來籍而叙之나 然이나 恐傷公之實德也라 系之以銘曰

 

豁達大度요        弘毅堅志라        著龜之鑑이요    棟樑之材라    

時期尙早하야     隱居草野하고     耕田鑿井하야    務農稼穡이라    

豪邁英發하야    不惜財貨하고      勇敢壯烈하야   自願師隊라    

降羅伐濟하야    佐麗開國하고      出將入相하야   右翼左弼하니   

沛公之子房이요 劉備之諸葛이라      愛君勤忠은      日月爀爀이요   

輔國殊勳은       太山嵂嵂이라      澤被生民하고   名垂麟閣이라    

神明護佑하야    遺墟保有라         撮其烈績하야   勒石表竪하고    

篆以烏跡하야    戴以螭首라         穹然特立하니   想公之志氣요    

重厚完固하니    仰公之德望이라   一片貞珉이      與俱天壤하리라                     

 

 檀紀四千三百十九年(1986) 丙寅 菊秋

 

            成均館理事長 慶州金氏大宗會長 前忠淸北道知事 國會議員 慶州后人 金宗鎬 謹撰

 

            서울大學校敎授 文學博士               後孫    相甲 謹書

 

 

기타 여러 문헌에 남겨진 遺事(유사)

 

太尉公의 胎生地 (태위공의 태생지)

우리 한씨의 족보가 5~6회 판을 거듭하여 간행되었고 선조의 유사에 관련된 서술이 역시 다양한 바 있으되 태위공께서 시거 청주라 하여 처음 청주에 거주하신 이후의 사적으로부터 기록이 있을 뿐이고 그 이전의 탄생과 성장과정의 기사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大人의 행적은 일시적으로 감추어질 수 있으나 영원히 인몰(湮沒)되지 않는 것이 대자연의 법칙인지라 府君의 태생지가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라는 사실이 천년후인 지금에도 국가기관에 비치된 공문서와 현지의 지명과 부로(父老) 및 부녀들 사이에 어제오늘 일같이 구전되어 생생히 입증되므로 이번 족보에 비로서 등재하면서 고신(考信)에 필요한 자료를 병기하여 둔다.

 

 

黃澗邑의 沿革(황간읍의 연혁)

신라시대에는 소라현(召羅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때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더니 고려 현종(顯宗)때 경산부(京山府)로 성주(星州)에 속하였고 조선 태종때 청산(靑山)과 병합하여 황청현(黃靑縣)이 되었다. 이후 수차 변경되어 조선 말 고종때 황간군으로 승격 일제 시 영동군에 병합 황간면이 되었다

 

 

太尉公(태위공)의誕生(탄생)과 吐蘭里(토란리)  

토란리(吐蘭里)는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란곡리의 옛 이름이다. 마한 원왕의 아들 우량(友諒)이 나라를 백제에 빼앗기고 신라에 망명하였으므로 그 거주지가 신라의 영역이며 망국의 한에 깊이 멍든 왕손으로서 명리(名利)를 외면하고 안온(安穩)한 삶을 취하기 위해서는 번잡한 국도 경주와 거리가 멀고 고국 땅을 버리고 가는 아쉬움에 접경지대인 황간에 거지(居地)를 정하게 된 것이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으며 여기서 세거 (世居)하던 가문에서 府君께서 탄생하신 사실이 황간읍지에 明記되어 전래되어 왔음을 후예(後裔)들로서 뒤늦게나마 알 게 된 것이 한 편으로 무상의 다행이요. 또 지극히 죄송한 일이다. 경부선 영동역과 추풍령 사이에 황간역이 있으니 이 역 소재지가 황간읍이요, 읍에서 동북방 2리여에 란곡리가 있으니 난곡입구에서 좌측으로 수백보 지점에 府君의 탄생지가 보이는데 이곳을 洞里 사람들은 한정승 태지(韓政丞 胎地)라고 부른다. 府君께서 탄생하실 때 부근 산야일대(山野一帶)의 지면에서 땀(汗)이 흠씬 흘렀다 하여 이 동리를 토한리(土汗里)로 부르게 되었더니 후일에 토란리(吐蘭里)로 개칭하였다가 현재는 란곡리(蘭谷里)로 부른다. 洞里 옆 산등을 넘어서 방화동(訪花洞)이라 칭하는 층층 산봉이 둘러쌓은 山谷間에 한정승 초당(草堂)터가 있으니 府君께서 구도(構道)하시던 옛 초당 터(草堂遺基)로서 부근 土砂중에는 천년전의 기와 조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이 초당과 본집과의 중간에 산록이 가로막혀 있음으로 줄을 연결하여 양쪽 끝에 방울(鈴)을 달아 손님이 있거나 식사 등의 용무가 있을 때는 줄을 흔들어 신호를 했다는 것도 온 동리가 다 아는 有名한 이야기 이다. 신화도 전설도 아닌 역사적 실증 (實證)이 있는 이 유적을 앞으로도 영원히 인몰되지 않도록 뜻있는 후손들의 보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黃澗邑誌抄(황간읍지 초)

韓太尉諱蘭胎生地在本邑東面吐蘭里至于今正寢基地自該邑每年盖草以傳千秋

한태위 휘란의 태생지가 본읍 동면 토란리에 있으니 지금까지 그 집은 읍으로 부터 매년 벌초하여 천추에 전하도록 한다.

 

 

嶺東郡誌抄(영동군지 초)

"토란리(吐蘭里)는 황간면(黃澗面)에 있고 고려태위(高麗太尉) 한란(韓蘭)의 태지(胎地)이기에 이렇게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遺基 方井里(유기 방정리)   

시조(始祖) 태위공(太尉公)의 유기(遺基)가 지금의 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정리 방정부락이니 속명 대머리로 호칭한다. 府君께서 당초에 이 길지를 택점(擇占)하시고 마을 앞의 암석을 쪼아  방정(方井)을 파서 용수에 이바지하고 후록(後麓) 고원(高原)에 무농정(務農亭)을 건립하시어 여기서 기거하시면서 미덕을 수양(修養)하시고 몸소 농사에 힘을 써서 누만석(累萬石)거부가 되시었다. 운회시래(運回時來)하여 고려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행군하는 로정이 청주를 통과하게 되어 문전에 당도커늘 公께서 긴칼을 집고 맞이하니 이는 우연한 해후(邂逅)가 아니었다. 영웅을 찾은 意志와 영웅을 맞이하는 의지가 융연상합(融然相合)한지라 주린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충전 시킨 후 드디어 종군하여 삼한을 통합한 개국 원훈(開國 元勳)이 되시었다. 이곳 방정리는 公의 품성을 선양(善養)하고 지략(智略)을 연마하시던 곳이요. 고려 창업에 협찬하는 제일보를 결행하시던 곳이며 그 뜻을 바탕으로 천지만엽(千枝萬葉)으로 번창한 불억자손(不億子孫)의 뿌리가 심고(深固)하게 박힌 영지로서 우리 韓氏의 발상지지이다. 公의 유향(遺香)이 영원히 깃들인 이 옛터를 후손들이 몇 代나 연면전습(連綿傳襲)하여 왔던가. 또 언제부터 主人없는 폐허로 몇 백년이나 되었던가. 문경공(文敬公) 류항집(柳巷集)중에 내 집이 방정리에 있다는 문구가 있으되 몇 대 또는 몇 년간 거주하였다는 고증이 없으며 세조 때에 충성공(忠成公=한명회)이 고향을 그리는 뜻에서 이 동리에 찾아와서 세업을 이어 설단치제(設壇致祭=제단을 차리고 제사를 올림)하였다고 전문(傳聞)한바 있으나 구원(久遠)을 期치 못하고 또다시 폐허가 되어 이제 방정의 소재도 아는 자손이 없이 되었다. 그 후 선조38년 乙巳(1605년)에 구암(久菴) 백겸(百謙)이 청주목사로 부임 즉시 여러 종인들과 진력탐색(盡力探索)하여 축단수비(築壇竪碑;제단을 짓고 비를 세움)하고 제전을 매입하여 매년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할 기틀을 수립한 바 있었는데 그 후 12년이 되는 丁巳년에 석탄공(石灘公) 효중(孝仲)이 서원현감으로 래임하게 되어 단을 수축(修築)하고 상구(床具)를 마련하여 세일제 봉행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장소가 방정리의 인접부락인 월오리(月午里)로서 지금도 이 비석은 월오동 뒷산에 우뚝 서있다. 려명공(蠡溟公) 진영(震英)은 충간공 理의 후예로서 전판서 이시발(李時發)의 조카사위가 된다. 광해군戊午年(1618)에 이판서가 장차 은퇴(隱退)할 택지를 구하려고 청주 동남 쪽 지대를 돌아 보다가 한 지점에 당도하여 주위를 관망하던 중 일폐의 한사(一弊衣寒士)가 나타나서 이르되 여기는 韓太尉의 유허(遺墟) 방정리인즉 韓氏가 아니면 점거할 수 없다 하거늘 이판서 이 사실을 侄壻인 려명공에게 전하니 려명공은 이 말을 듣고 문중의 숙원이 이제야 성취됨을 환희불금(歡喜不禁)이라 즉시로 방정리에 찾아가서 황량한 옛 터를 다듬어서 가옥을 세우고 方井을 준설(浚渫)하여 솔권반이(率眷搬移=반성하고 바로잡아 옮김)하니 이것이 흥폐(興廢)가 무상한 세월속에 千年옛터 方井里가 다시 옛 주인을 찾은 전말(顚末)이다.

 

 

淸州邑誌抄(청주읍지 초)  

方井里在淸州治南六里許務農坪東卽韓太尉所居之地太尉方其未遇也隱德邱園服田力穡積穀累巨萬麗太祖征甄萱之時師出宅前太尉杖劍出迎以濟十萬兵一日之餉遂從而宣力聘智滅濟降羅以成統合之績

<역문해설> 

  방정리는 청주읍 남방 육리쯤 務農坪(무농평) 동쪽에 있으니 한태위가 살던 곳이다. 태위가 아직 출세할 기회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에 은거하면서 몸소 농사에 힘써 누만석 거부가 되었더니 麗太祖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그 행군이 문전에 이르거늘 태위공이 장검을 집고 영접하여 십만대병을 배불리 먹이고 드디어 종군하여 용력을 떨치며 지모를 짜서 백제를 토벌하고 신라를 항복받아 통합하는 훈업을 성취하였다.

 

 

 方井(방정: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84호)  

방정은 무농정(務農亭) 아래 동리 앞에 위치하고 있다. 太尉公께서 처음 여기 거주(居住)하시면서 식수와 用水로 쓰시던 샘이니 정방형(正方型)으로 축조하여 方井이라 칭하니 자연히 마을명도 方井里로 부르게 되었다. 수질이 청신(淸新)하고 풍미(風味)가 감미로워 양생(養生)에 최적이며 수원이 심장(深長)하여 큰 가뭄에도 용출량이 감소되지 않고 항상 풍요한 것도 좋거니와 그보다도 애음(愛飮)하던 분이 희세(稀世)의 위인인 太尉公이시기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이다. 청주읍지 고적조(古蹟條)에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 행군이 마침 이 문앞을 지나가게 되자 太尉公이 이를 맞이하여 십만대병을 호궤( 犒饋)하는데 이 물을 급용(汲用)한 바 조금도 수량이 부족함이 없었다 하여 "방정(方井)"이라는 井號를 받았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務農亭(무농정: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 85호)  

무농정은 동북방에 웅좌(雄座)한 上黨山을 등에 지고 남서편으로 전개되어 있는 30여리의 무농평(務農坪)을 향하여 금반옥안형(金盤玉案形)으로 유명한 승지(勝地) 방정리 후록(後麓)에 자리잡고 있다. 太尉公께서 이 정자를 창건하시고 여기서 기거하시면서 농업을 권장하시고 제세경륜 (濟世經綸)을 연마하시던 도장(道場)이니 方井과 아울러 公의 여향(餘香)이 맥맥히 흐르고 있는 유적이다. 이후 천여년에 사물의 소장성쇄(消長盛衰)가 무상 한지라 방정리가 일시 폐허로 황량한 처지에 있게 되니  務農井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숙종14년戊辰(1688)에 후손 근(根)이 병마절도사(秉馬節度使)로 청주에 금의환향하자 우선 方井里에 찾아와서 무농정의 옛터를 찾아 비석을 세워 표식(表識)을 해 두었고 광복 후 己丑年(1949)에 방정리 宗中의 발기(發起)로 전국 종문의 성의를 모아 정자를 重建하였다. 그러나 그 후 6,25동란으로 인한 관리소홀로 원형보전이 어렵게 되어 지난 戊辰年(1988년)에 중앙 종친회가 주관하고, 청주시가 고려 건축 양식에 따라 원형대로 설계하여 정부보조금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재 중건하였다.

 

 

 太尉公의 墓所 (태위공의 묘소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제 72호)   

태위공의 묘소는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淸原郡 南一面 駕山里)에 있으니 작도산(鵲道山)으로부터 국사봉(國師峰)이 좌편으로 돌면서 경태방(庚兌方)으로 뻗어 내려온 행룡(行龍)이 분토동(分土洞) 애전동(艾田洞)을 지나서 해방(亥方)에 입도(入道)한 건좌손향판국(乾坐巽向版局)이요, 물은 곤신방(坤申方)에서 진방(辰方)으로 들어간다.

대체로 山은 속리산의 래맥(來脈)이요, 물은 저자산(楮子山)에서 발원하여 무심천(無心川)으로 흐르다가 다시 작천(鵲川)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들어간다.옥녀봉(玉女峰)과 필봉(筆峰)이 갑방(甲方)에 시립(侍立)하였는데 속리산이 역시 甲方이라 지가서(地家書)에 이르기를 회룡고조 (回龍顧祖)라 하여 길지라고 세칭(世稱)하게 된 것이다. 앞쪽에 전개한 30리 들판은 무농정(務農亭) 앞까지 연정(連廷)하였고 상당산성은 방정리 배후 낙가산(洛迦山) 옆에 자리잡고 있다.

청주시를 기점으로 한 대로가 방정리를 경유하여 고은(古隱) 삼거리에 와서 갈라지니 왼쪽길은 미원을 경유하여 보은, 속리에 이르고 오른쪽길은 문의로 통하는데 대교를 건너서 약 백여보 지점에서 다시 갈라지니 왼쪽길이 문의로 가는 큰길이요 오른쪽 길이 가산 묘소로 가는 길이다.

이와같이 명당에 모신 산소가 언제부터인가 부지중(不知中) 실호(失護)되어 이를 애석하게 추모하는 후손들이 단(壇)을 모으고 비(碑)를 세워 매년 세일제(歲一祭)를 받들며 묘재가산(墓在駕山)이라는 문헌을 참고로 평안도 가산(嘉山),회인 가산(嘉山)등의 음이 서로 비슷한 지명을 가진 곳은 두루 살펴 보았으나 도로(徒勞)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큰 인물의 유택(幽宅)은 인멸(湮滅)하는 일이 없는 법이다.인물의 탁월한 명성과 묘의 웅장한 규모가 서인(庶人)의 무덤과는 달라서 동리 부로(父老)들이나 부녀들의 전설(傳說)로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언젠가는 발로(發露)되는 법이다.

숙종14년戊辰(1688년)에 묘하(墓下) 민가에서 고용(顧傭)하던 韓某가 있어 그 동리에 사는 노가(盧哥)가 태위공의 산소 봉분을 파양(破壤)하고 묘갈(墓碣)은 가운데를 절단하여 우물 바닥에 묻어 치운 후에 산소 전후면에 윤장(倫葬)하였다는 정보를 듣자 즉시 방정리에 찾아와서 성헌(聖憲)에게 소상하게 고하였다. 성헌이 이 말을 듣고 생각하여 본즉 가산(嘉山)의 가(嘉)와 가산(駕山)의 가(駕)는 음이 서로 같고 가산과 방정리는 지척간이라 십분의심(十分疑心)할 바 없으므로 때마침 청주병사로 재임 중인 후손 근(根)에게 제보하고 그와 더불어 駕山에 달려가 조사한 즉 비석은 비록 중절(中絶)되었으나 자획이 완연하여 太尉公의 묘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익년(翌年)己巳에 후손 참판(叅判)성우(聖佑), 장령(掌令)형(濙), 군수 숙(塾)등이 연서로 관가에 제소하니 마침내 상감께서도 알게 되어 조정에서 경조랑(京兆郞)을 파견하여 간악한 범행을 적발하고 광중(壙中)을 열어보니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윤총을 파내어 제거하고 묘역(墓域)을 개봉축(改封築)한 후에 표석(表石)을 세우고 지석(誌石)을 매장하였으며 제전(祭田)과 묘직(墓直), 재실 등을 차례로 설치하였으며 그 후 영조44년戊子(1768)에 신도비를 세웠다.

 

 

太尉公 諱蘭에 關한 高麗記錄 (태위공 휘란에 관한 고려기록)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원년(918) 8월 辛亥일에 공(功)을 표시(表示)하며 조(詔)에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좌시(佐時)의 기략(奇略)을 움직여 개세(蓋世)의 높은 공훈(功勳)을 세우는 자는 분모(分茅)와 조토(昨土)를 포상으로 주고 준질(峻秩)과 숭반(崇班)으로 높이는 것은 이것이 백대(百代)의 상전(常典)이요,천고(千古)의 굉규(宏規)이다.나는 측미(測微)한 지위(地位)로 나와서 재식(才識)도 용화한데 진실로 군망(群望)을 취하여 극히 홍기(弘基)를 이행하였으니 그 폭주(暴主)를 폐할 때를 당하여 충신의 절(節)을 극진히 하는 자는 마땅히 상뢰를 행하여훈노(勳勞)를 추장(推裝)하여야 되는 것이니,

 

홍유(洪儒,賜名 殷悅;은열이란 이름을 내림.남양 홍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의 중시조)

신숭겸(申崇謙 ; 평산 신씨 시조),복지겸(卜知謙 ; 면천 복씨 시조)으로

제1등 공신에 지정하고

 

견권(堅權),능식(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낙(金樂 ; 당악 김씨 시조) 연주(連珠),마난(麻煖),최응(崔疑 ; 개성 최씨의 원조),유금필(庾금弼 ; 무송 유씨 시조),김선평(金宣平 ; 안동 김씨 시조),장길(張吉 ; 賜名 貞弼 ; 정필이란 이름을 하사; 안동 장씨 시조),류차달(柳車達 ; 문화 류씨 시조),이도(李棹 ; 전의 이씨 시조),함규(威規 ; 양근 함씨 시조),김선궁(金宣弓 ; 선산 김씨 시조),왕희순(王希順),김훤술(金萱述 ; 해평 김씨 시조)윤신달(尹辛達 ; 파평 윤씨 시조),박윤웅(朴允雄 ; 울산 박씨 시조),진평(陳評),박희술(朴希術),김홍술(金洪述; 의성 김씨 시조),박수경(朴守聊),홍규(洪規 : 홍주 홍씨 시조),총일(聰逸),강궁진(姜弓珍 ; 금천 강씨 중시조),이총언(李총言 : 벽진 이씨 시조),이능희(李能希 : 청주 이씨 시조),이견웅(李堅雄 ; 수안 이씨 시조), 지중익(池重翼, 賜姓 魚重翼 ; 어씨라는 성을 하사함, 충주 어씨 시조),예언(倪言),제궁(제弓), 사도귀(思道貴),최준옹(崔俊邕; 동주 최씨 시조),왕식렴(王式廉), 한란(韓蘭 ; 청주 한씨 시조),전종회(田宗會),관준(寬駿),만세(萬歲),조암(趙岩 ; 改名 孟 ; 풍양 조씨 시조),경함필(卿含弼),영준(英俊),김길(金吉 ; 광산 김씨 선조),김철(金哲),금강(금剛),곡긍회(曲矜會),배운태(裵運泰),국현(國鉉),적철(狄鐵),열평(烈評),황보선장(皇甫善長),송회(宋會),석담(昔淡),조창(曺昌),유지방(柳志防),황승(黃勝),홍관(洪琯),석광(昔光),임정(林程),장개(蔣凱),염뢰(廉쾨) 등을

 

제2등으로 지정하고,각각 금은기(金銀器)와 금수기(金繡綺), 피욕(被褥)과 능라(綾羅)와 포백(布帛)과 곡미(殺米)를 차별있게 하사하였다.

 

  태조2년(919) 겨울 10월에 배현경이 글을 올려 평양(平壞)에 축성(築城)하는 이점을 의논하니 왕(태조)이 기뻐하며 그의 말대로 염상(廉湘)과 한란(韓蘭)에게 영을 내리고 현지로 가서 독려토록 했는데, 때 마침 염상은 중도에서 병이 생겼기에 강윤형(康允珩)을 그 대신으로 보냈다.

 

  태조11년(928)에는 태조가 후백제 견훤(顆萱)을 정벌하려 남행할때 한란(韓蘭)이 방정리(方井里)에서 왕건태조를 영접하고 10만 군사에게 하루동안 휴식하는데 필요한 모든 주육급식(酒肉給食)을 베풀었으며 후삼국 통합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태조13년(930) 12월 겨울에는 신흥사(新興孝)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巨堂)을 설치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동서벽에 도화하였는데(壁上公臣) 그 수는 29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유금필(庾금弼)

 

   김선궁(金宣弓),이총언(李悤言),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 ; 안동 권씨 시조),윤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문다성(文多省 ; 남평 문씨 시조),이능희(李能希),이도(李棹),

 

   허선문(許宣文 ; 양천 허씨 시조),구존유(具存裕 ; 능성 구씨 시조),원극유(元克猷 ; 원주 원씨     시조),

 

   금용식(琴容式 ; 봉화 금씨 시조),김훤술(金萱術),강여청(姜餘淸 ; 금천 강씨 시조),

 

   한란(韓蘭),

 

   손긍훈(孫兢訓 ; 밀양 손씨 시조),방계홍(房係弘 ; 남양 방씨 시조),

 

   나총례(羅聰禮 ; 금천 나씨 시조),이희목(李希穆 ; 부평 이씨 시조),

 

   염나명(廉那明 ; 서원 염씨 시조),최필달(崔必達 ; 강릉 최씨 시조),김홍술(金弘述) 등이다.

 

 

太尉公의 관한 유사(참조)

諡號 威襄(위양) 太尉公(태위공) 9세기말~10세기전반 ○공의 탄생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읍 란곡리(구토한리 또는 토란리)이며(公誕生于忠北永同郡黃澗邑蘭谷舊土汗里又土蘭里), 옛터에는 학문을 익히던 집터 등이 남아 이 사실이 영동군지에 기록되어 있고(遺基餘講堂遺址尙今有傳事載永同郡誌.), 후에 청주동쪽 방정리로 이주하시어 농업에 종사하시여 수 만석의 부를 축적하시고(移居于淸州治東方井里服田力檣積穀累萬), 서기928년 고려태조께서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길에 장검을 차고 출영 종군하시여 공을 이루시고 좌고려통합삼한 개국벽상공신삼중대광문하태위에 오르셨으며(高麗太祖11年戊子(928)高麗太祖征甄萱路出宅前公杖劍出迎以濟一日之餉遂從以驅馳贊成統合之勳 高麗統合三韓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門下太尉.), 여지승람에 청주인으로 기록되었다(輿地勝覽錄公于淸州人物).

※ 위의 내용은 "시조유기서사비문에 청주지방의 구전설화를 문익공 서평부원군 휘 준겸께서 인용하여 기술한 것으로"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태조원년(918)에 시조께서는 개국2등공신에 서훈되시고 이듬해(919) 평양성을 축성하셨으며 동11년(928)에 견훤정벌에 종군하시고 동13년(930)에는 벽상공신에 봉해지셨으니 공께서는 위의 내용과 같이 단순히 청주에서 견훤정벌 길에 나선 태조를 만나신 것이 아니라 고려개국 이전부터 조정에 참여 고려개국공신에 서훈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운영자-

○묘소는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배위 송씨와 합장되었다(淸州治男十五里許南一面駕山里乾坐坤申得水辰破合兆遺基遺宅俱爲). 여러 대에 걸쳐 실호 되였으며 청주가산과 평안도 가산의 음이 같아 묘소가 평안도 가산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는 고려조 장열공 휘희유 묘소가 평안도 가산에 소재한 때문이다.(屢世失護誤傳墓在平安道嘉山蓋嘉駕同音而麗相希愈墓在嘉山故也) 충성공 명회가 한때 시조부군의 옛터를 찾아 단을 설치하고 제를 올려 왔으나 임란이후 실호 되였고(忠成公明會一時尊得遺基設壇致祭.) 선조38년을사(1605)에 후손 백겸이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옛터를 찾아 단을 세우고 준겸이 유기비문을 써 비를 세웠다(百有餘年後于失傳宣祖38年乙巳(1605)後孫百謙爲淸州牧使亦尊遺基設壇立碑其弟西平府院君浚謙撰遺基碑築壇行歲一祭) 광해10년(1618)에는 후손震英이 지금의 운동리의 옛터에 있는 비를 찾았으며(方井里東便現雲東里後麓 尙存光海十年戊午(1618)後孫震英尊得遺基.)숙종14년(1688) 후손 근이 충청병사로 있을 때 후손 성헌이 탐문하여 노,이 양성이 모장한 것을 밝히고 후손 형, 성우, 숙등이 관에 제소하여 실호 되였던 묘소를 찾아 개봉축 입비하였고(後孫根爲淸州兵使時後孫叅判聖憲探門卽山所盧李兩姓倒碣爲井甃而冒葬矣與兵使掘井尊得古碣字劃宛然後孫叅判聖佑掌令濙卞于官朝家至遺京兆郞開壙搜誌得信蹟掘去偸塚諸孫開封築立碣埋誌置祭田)후손 영상 익모가 신도 비문을 찬하였으며 승지 구는 묘표를 찬하였고 생원 익저는 무농정 비문을 지어 건립하였다.(墓直後孫領相翼暮撰神道碑銘後孫承旨構撰墓表生員益著撰務農亭碑陰記.) 정조년간(1794-1800)에는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제전을 늘리고(正祖18年~庚申 後孫合力增置祭田) 순조10년(1810)에 제각을짓고(純祖10年庚午(1810)重建齊閣.) 1950년에는 무농정과 신도비각을 중건하였으며(檀紀4283年庚寅重建務農亭及神道碑閣), 1988년에 무농정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檀紀4321年戊辰再衆建務農亭). 세일제는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봉행한다.

 ○배위는 송씨로 본관은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