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의 글과 유적(箕子遺蹟)

해설 역문

一. 箕子操(기자조)

原文:嗟嗟紂爲無道殺比干嗟重復嗟獨奈何漆身爲려被髮以佯狂今奈宗廟何天哉欲貧石自投河嗟復奈社稷何
해설 역문:
슬프도다!
슬프도다! 紂(주)가 무고하여 比干(비간)을 죽였도다.
슬프고 또 슬퍼라. 나 홀로 어이 할꼬 全身(전신)에 옻칠하여 문둥이로 변신하고 머리풀어 산발하여
광인으로 가장하니 지금의 이 宗廟(종묘)를 뉘라서 받들손가?
하느님도 야속하오 돌을 지고 깊은 물에 풍덩 빠져나 볼까나 슬프고 슬프도다. 이 사직을 어이 할꼬.


一. 麥秀歌(맥수가)

原文: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
해설 역문:
보리 이삭이 무성하구나.
벼도 기장도 기름지구나. 저 교활한 아이여 나와 사이가 좋지 못했음이라.

 

一. 箕子宮殿(기자궁전)
箕子宮殿(기자 궁전)은 正陽門下(정양문하)요. 旗子井(기자정) 北쪽에 있으니 英祖元年(을사년 영조 원년,단기 4058, 서기 1725 乙巳)에 監司 李廷濟(감사 이정재)가 朝廷(조정)에 狀啓(상계)하여 담을 쌓고 中央(중앙)에 九疇壇(구주단)을 신축하고 南으로 八敎門(팔교문)을 설치하였으며 단의 서쪽에 記蹟碑(기적비)를 건립하였다.

 

 一. 箕子井(기자정)
箕子井(기자정)은 箕子宮殿(기자궁전) 남쪽에 있으며 水味(수미)가 淸精(청정)하기로 유명하다. 宣祖 9년(병자년 선조 9년 단기 3909, 서기 1576 병자년)에 監司 朴來亮(감사 박래량)이 井閣(정각)을 세웠다.

 

 一. 箕子墓(기자묘)
箕子(기자)의 墓(묘)는 平壤 七星門外 王荇山(평양 칠성문 밖 왕행산(금토산;今兎山)의 子座(자좌)이니 壬辰倭亂(임진왜란) 때(단기 3925, 서기 1592)에 왜적이 비석을 粉碎 折斷(분쇄절단)하고 墓域(묘역) 일부를 犯掘(범굴)하였는데 왜란이 끝난 후에 墓域(묘역)을 改封(개봉)하고 新碑(신비)에 韓石峰 濩(한석봉이 글을 써서) 舊處(구처)에 건립하고 鐵索(철색)으로 穿孔(천공)하여 新碑(신비) 후면에 付著(부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