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실기(箕子實記)

      지은이: 宣祖庚辰中夏後學德水後人栗谷李珥 謹志
                                           
(선조경진중하  후학 덕수후인  율곡  이이 근지)

箕子(기자)의 姓(성)은 子(자)요 名(명)은 胥餘(서여) 또는 須臾(수유)라 하니 商(중국 상)나라 宗室(종실)이시다. 天道(천도)에 투철한 學識(학식)과 聖道(성도)를 傳授(전수)하신 몸으로 畿內諸侯(기내제후)로서 太師(태사)가 되시었다. 帝乙(제을)의 嫡子(적자) 受(수=紂)가 口辯(구변)이 빠르고 輕薄(경박)하여 忠諫(충간)을 拒否(거부)하고 非理(비리)를 좋아하되 그의 庶(서)형 啓(계)는 조심성이 있고 孝道(효도)가 克盡(극진)하므로 箕子(기자)께서 紂(주)가 좋은 王材(왕재)가 되지 못함을 짐작하고 啓(계)는 長子(장자)이며 兼(겸)하여 賢良(현량)하므로 太子(태자)로 封(봉)하도록 帝乙(제을)에게 勸(권)하였으나 帝乙(제을)이 嫡子(적자)를 버릴 수 없다 하여 마침내 受(수)를 太子(태자)에 封하고 啓를 微子(미자)로 封하였다. 帝乙(제을)이 죽은 후 受(수)가 卽位(즉위)하니 王號(왕호)를 紂(주)라 稱(칭)하다.

王位(왕위)에 오르는 즉시 象牙(상아) 젓가락을 마련하는지라 箕子(기자) 탄식하며 이르기를 저 사람이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玉(옥)으로 술잔도 만들 것이요, 지방에서 나오는 珍貴(진귀)한 寶物(보물)들을 進上(진상)토록 할 것이니 宮室(궁실)과 여러 器具(기구)의 사치가 지금부터 차차로 甚(심)할 것이로다 하시었다. 紂(주)의 淫蕩(음탕)하고 暴惡(포악)함이 나날이 심해지는지라 微子(미자)가 나라가 亡(망)할까 염려하여 箕子(기자)와 少師 比干(소사 비간)와 더불어 모의하되 이제 殷(은)나라가 망하는 것는 大水(대수;큰물)가 터진 것과 같아서 막을 길이 없는지라 지금 우리가 如何(여하)한 指針(지침)도 없고 未久(미구)에 정복될 것이 짐작되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

箕子(기자)께서는 商(상)나라에 이제 큰 災難(재난)이 있으니 나는 紂(주)와 같이 敗亡(패망)할 것이요, 商(상)이 滅亡(멸망)하더라도 나는 倫理(윤리)를 지키며 王(왕)을 깨우쳐 타일러서 引導(인도)하고 왕을 해쳐서 떨어 버리면 나도 따라서 같이 죽을 것이니 計策(계책)을 모색하여 事物(사물)을 處理(처리)하면 國民(국민)들도 先王(선왕)께 몸 바쳐 따르리라, 나는 逃避(도피)하기를 願(원)치아니한다 하시었다.

微子(미자)는 이리하여 가 버리고 箕子(기자)는 紂(주)를 諫(간)하였으나 紂가 듣지 않고 箕子(기자)를 가두고 종을 삼으니 或(혹)은 버리고 가는 것이 可(가)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나 箕子께서는 臣下(신하)된 道理(도리)에 諫(간)하다가 듣지 아니한다고 가면 이것은 王의 惡行(악행)을 暴露(폭로)하고 자기만이 國民(국민)의 好意(호의)를 얻으려는 것이니 나는 못할 일이다 하시고 머리를 풀어 散髮(산발)하고 狂人(광인)으로 假裝(가장)하여 갖은 侮辱(모욕)을 다 받으면서 거문고와 노래로 悲哀(비애)를 自慰(자위)하였다. 比干(비간)은 계속하여 諫(간)하다가 紂에게 被殺(피살)되었다. 周武王(주무왕)이 商(상나라)을 討滅(토멸)하고 召公 奭(소공 석)에게 下命(하명)하여 箕子의 가둠을 풀어 놓은 후 왕이 親(친)히 箕子를 찾아보고 謙虛(겸허)한 마음으로 내가 紂(주)를 죽인 것이 可(가)한 일인가 不可(불가)한 일인가?

殷(은)나라의 亡(망)한 所以(소이)를 묻는데 箕子(기자)는 차마 답변하지 못하였다. 王은 다시 天道(천도)에 對(대)하여 물었다.

箕子(기자)여,
하나님이 은연중에 人民(인민)에게 禍福(화복)을 내려 주심으로 그 理氣(이기)에 感應(감응)하여 사는 것인데 나는 그 倫理(윤리)의 차례를 알지 못하겠노라. 箕子께서 이에 말씀하시되 옛날 곤(禹王의 父)이 견(地名)에 洪水(홍수)가 났을 때 五行法(오행법)을 함부로 늘어 놓았더니 上帝(상제) 크게 怒(노)하사 洪範九疇(홍범구주)를 주지 않으시니 倫理(윤리)가 頹廢(퇴폐)한 所致(소치)라 곤을 罪주어 죽게 하였고 禹王(우왕)이 代(대)를 이으니 上帝(상제) 이제서야 禹王(우왕)에게 洪範九疇(홍범구주)를 주시니 이는 倫理(윤리)의 定(정)한 바 질서이다. 이리하여 洪範(홍범)을 벌리게 되었으니 그 大目(대목)이

一曰五行(일일오행)이요,

二曰敬用五事(이일경용오사)요,

三曰農用八政(삼일농용팔정)이요,

四曰協用五紀(사일협용오기)요,

五曰建用皇極(오일건용황극)이요,

六曰乂用三德(육일예용삼덕)이요,

七曰明用稽疑(칠일명용계의)요,

八曰念用庶徵(팔일염용서징)이요,

九曰嚮用五福(구일향용오복)하고 威用六極(위용육극)이라.

그중에서 皇極(황극)이라는 것은 편벽되지 않고 막히는 데가 없이 王이 義理(의리)를 쫓아야 하고 좋은 일을 하여 王의 道里(도리)를 쫓아야 하며, 惡(악)한 일을 없이 하여 王의 갈 길을 쫓아야 하나니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으면 王道(왕도)가 평탄할 것이요, 反覆(반복)하거나 側傾(칙경)하는 일이 없으면 王道가 正直(정직)한 것이라 모든 事物(사물)은 그 運用(운용)하는데 있어 至極(지극)히 미묘한 것이 있는 法이라 하였다. 箕子가 武王(무왕)을 爲(위)하여 道(도)를 傳(전)하고 벼슬하시기를 不願(불원)하시니 武王 역시 强勸(강권)하지 못하였다. 箕子께서는 中國(중국)을 避(피)하여 朝鮮(조선)에 들어 오시니 中國人(중국인) 中 따르는 者가 五千(오천)이라 詩書禮樂 陰陽卜筮(시서예락음양복서)의 流(류)와 技術 藝術(기술, 예술)등 百工(백공)이 모두 따라왔다. 처음에는 言語(언어)가 不通(불통)하여 通譯(통역)으로 意思(의사)를 相通(상통)하고 民衆(민중)에게 禮義(예의)와 農事 養蠶 織造(농사, 양잠, 직조)를 가르치고 井田制度(정전제도)를 劃策(획책)하였다. 八條禁法(팔조금법)도 設定(설정)하시니 大略(대략) 殺人者(살인자)는 生命(생명)으로 報償(보상)하고 傷害罪(상해죄)는 穀物(곡물)로 報償(보상)하고 盜賊(도적)은 잡아서 종으로 賤役(천역)을 치르게 하였다. 自進(자진)하여 속죄하는 者가 五十萬이요, 혹은 容恕(용서)받은 사람이라도 이웃이 羞恥(수치)하여 시집 가고 장가 드는데 대릴감이 없게 되었고 도적이 없으니 문단속의 필요가 없게 되고 부인들은 모두 貞淑(정숙)해지고 田野(전야)와 都市(도시)를 開拓(개척)하고 음식에는 籩豆(콩)을 쓸 줄 알고 儒敎(유교)를 信仰(신앙)하여 中國(중국)의 風習(풍습)을 따르게 되었다. 戰爭(전쟁)을 숭상하지 않고 德化(덕화)로써 狂暴(광폭)한 者(자)를 悅福(탄복)케하니 이웃나라가 그 의로움에 感化(감화)되어 歸屬(귀속)하였으며 文物(문물)이 中國과 同一하게 되었다. 그 후에 箕子(기자)께서 周(주)나라에 가서 殷(은)나라 옛터를 지나다가 궁전이 없어지고 五穀(오곡)이 무성한 것을 보고 상심하여 麥秀歌(맥수가)를 지어 읊었다.

"보리가 잘 자랐네 기장도 무성하구나.
저 교활한 아이 紂(주)여 나와 더불어 좋지 못한 사이였네"

殷(은)나라 國民(국민)들이 이 노래를 듣고 모두 울었다 한다. 朝鮮(조선)이 仁賢(인현)의 德化(덕화)를 받아서 詩書(시서)와 禮樂(예악)의 國家(국가)가 되어 朝野(조야)가 無事(무사)하고 人民(인민)이 僖悅(희열)에 넘쳐서 大同江(대동강)을 黃河(황하)에 비유하여 頌德歌(송덕가)를 지어 불렀다. 그후 箕子(기자)께서 薨(훙:돌아가시니) 子孫(자손)이 代(대)를 이어 君王(군왕)이 되었다. 周(주)나라 末葉(말엽)에 燕伯(연백)이 自稱(자칭) 王이 되어 朝鮮(조선)을 侵攻(침공)하려고 하므로 王이 燕(연)나라를 討伐(토벌)하고 周(주)나라를 도우려 한 즉 大夫禮(대부례)가 諫(간)하여 中止(중지)하고 禮(예)를 燕나라에 보내 說得(설득)시켜서 侵略(침략)을 中止(중지)케 하였다. 朝鮮(조선)의 子孫(자손)들이 점차로 교만하고 暴惡(포악)하여지니 燕(연)나라가 西方一千餘里(서방 일천여리)를 略奪(약탈)하고 滿(만), 潘(반), 汗(한)까지 들어와서 國界(국계)를 삼으니 우리 國勢(국세)가 점점 약해졌다. 秦(진)나라가 天下(천하)를 統一(통일)하고 遼東(요동)에 이르기까지 萬里長城(만리장성)을 構築(구축)하니 朝鮮의 王(조선의 왕)이 秦(진)의 威力(위력)에 눌려서 腹屬(복속)하고 말았다.

否王(부왕)이 薨(훙)하고 아들 準(준)이 王位(왕위)에 오른지 十年에 秦(진나라)이 燕(연나라), 濟(제나라),趙(조나라)를 討滅(토멸)하니 亡命(망명)하여 入國(입국)하는 者가 많음으로 朝鮮(조선)은 燕(연)나라와 浿水(패수)로써 國界(국계)를 삼았다. 燕王(연왕) 盧琯(노관)이 叛(반)하여 凶奴(흉노)에 들어가므로 그 臣下(신하)였던 衛滿(위만)이 千餘 軍卒(천여 군졸)을 거느리고 浿水(패수)를 건너와서 西部(서부)에 接住(접주)하면서 潘(반)의 侵入(칩입)을 防備(방비)하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請(청)하므로 王 準(왕 준)이 이것을 믿고 博士(박사)의 職位(직위)와 玉(옥)으로 만든 忽(홀)을 下賜(하사)하고 百里(백리) 땅을 封(봉)하여 주면서 西部邊方(서부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滿(만)이 亡命軍卒(망명군졸)을 誘致(유치)하여 形勢(형세)가 旺盛(왕성)해지니 王 準(왕 준)에게 "漢兵(한나라 군사)이 大擧 侵來(대거 침래)하니 自己(자기)가 近衛隊(근위대)로서 王宮(왕궁)을 守護(수호)하겠다"고 詐稱(사칭)하고 王 準(왕 준)을 反擊(반격)하였다. 王 準이 戰敗(전패)하여 海路(해로)를 利用(이용)하여 南(남)쪽으로 달아나고 朝鮮(조선)은 衛滿(위만)의 領有(영유)가 되고 말았으니 箕子以後(기자이후) 41대 928년만에 나라를 잃었다. 箕準(기준;준왕)은 쫓겨날 때 左右宮人(좌우궁인)을 引率(인솔)하고 韓나라땅 金馬郡(금마군)에 와서 馬韓王(마한의 왕)이 되고 50여 大小國(대소국)을 統合(통합)하여 여러 代를 繼承(계승)하여 王位(왕위)를 傳하였다. 그 후 新羅(신라), 高句麗(고구려), 百濟(백제) 三國이 점점 커지면서 馬韓(마한)이 衰退(쇠퇴)하니 百濟 始朝 溫祚王(백제 시조 온조왕)26年에 馬韓을 습격하여 合倂(합병)하니 箕子가 馬韓(마한)의 王統(왕통)을 가진 것이 200년으로 前後 王統(전후 왕통)이 1220餘年이었다.

贊(찬)하여 曰(왈)
아아, 殷太師(은태사)여, 暗君時代(암군시대) 태어나서 內外卦(내외괘)의 運氣(운기)따라 行事(행사)마다 義(의)로웠네 거문고를 타는 뜻을 하나님은 알리로다 내 나라가 亡(망)했거늘 내 갈 곳은 어디인가 蒼姬(창희)에게 法(법)을주고 靑璣(푸른 구슬)에 몸을 담아 새 나라를 創建(창건)하고 樂浪(낙랑)땅에 都邑(도읍)했네 아침나라 긴긴밤에 햇님 별님 밝게 비쳐 八條禁法(팔조금법) 設定(설정)하고 禮義敎化(예의교화) 밝혔도다. 大同江 太白山(대동강 태백산)에 瑞氣(서기)마저 영롱하니 子子孫孫(자자손손) 繼承(계승)하여 千歲萬歲(천세만세) 萬萬歲(만만세)라 끊임없이 이어오니 우리聖祖(성조) 創德(창덕)일세 어진 님을 받드는 뜻 영원토록 전하소서 내 짐짓 살펴 보건대 하늘이人牲(인성)을 創調(창조) 할 때에 반드시 聖人(성인)을 보내서 이를 主導(주도)케하여 바른 길로 돕고 길러서 社會文化(사회문화)를 밝혀 그 生活(생활)을 순행케 하고 그 교본을 세우는 것이다. 伏義氏(복의씨)로부터 三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聖人으로서 天義(천의)를 대신하여 社會文物(사회문물)의 길을 열어 놓았다. 太古的(태고적) 우리나라에 民生(민생)이 생긴 것이 中國(중국)보다 뒤늦지 않으리라고 상상되는데 슬기로운 哲人(철인)이 나와서 君師(군사)의 責務(책무)를 다한 바 있다고 들은 일도 없고 檀君(단군)께서 처음 납신 聖祖(성조)라고 稱(칭)하니 정확한 문헌이 없으므로 참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오직 箕子(기자)께서 朝鮮에 君臨(군림)하사 이 百姓(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따뜻하게 養育(양육)하고 勤實(근실)하게 敎導(계도)해서 中國 文明에 뒤지지 않는 國家로 成長케하셨으니 우리가 오늘날까지 그 은혜를 받아서 禮樂(예락)의 風習(풍습)이 끊임이 없는지라 孔子(공자)께서 바다를 건너서 朝鮮(조선)땅에 살고 싶다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니 聖君을 만나지 못한 恨(한)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된다.

아, 위대하시다. 箕子이시여,
武王(무왕)에게 洪範(홍범)을 傳授(전수)하여 道敎(도교)를 中國에 밝히고 그 여세를 몰아 朝鮮을 敎化(교화)하니 그 遺澤(유택)이 子子孫孫(자자손손) 千餘年間(천여년간)을 後代君王(후대군왕)들이 日月같이 敬慕(경모)하며 弘德(홍덕)을 崇仰(숭앙)하고 功勳(공훈)에 報答(보답)하려는 그 法式(방식)이 갈수록 더욱 굳건하니 진실로 大聖(대성)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아, 거룩하시다. 齊(제)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 名宰相(명재상) 管中(관중)이나 晏瓔(안영) 만을 알 뿐이니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는 格(격)이다. 孔子(공자)의 第子(제자)들은 孔子(공자)의 말씀이나 되풀이하고 程朱學徒(정주학도)들은 程子(정자)나 朱子(주자)의 遺敎(유교)만을 偏傳(편전)하는 것도 事理(사리)에 當然(당여)한 바이다. 우리나라가 箕子(기자)의 罔極(망극)한 恩惠(은혜)를 받았으니 집집마다 사람마다 익히 알아야 당연하거늘 지금 士友(사우)들이 倉卒間(창졸간)에 箕子(기자)의 事跡(사적)을 물으면 能熟(능숙)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것은 기록된 文獻(문헌)이 어수선하게 흩어져서 일일이 익히지 못한 까닭이다. 尹公斗壽(윤공두수)가 지난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유림들 중 箕子(기자)의 사적을 請問(청문)하는 자가 다수였는데 能熟(능숙)하게 답변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귀국한 후에 廣範圍(광범위)하게 經典(경전)과 史書(사서) 等 書籍(서적)을 探究(탐구)하여 사실과 논지를 수집하고 詩人(시인)들의 歌辭(가사)나 傳說(전설)등을 모아서 編輯(편집)하니 이것이 箕子志(기자지)이다. 그 功(공)이 크고 後學(후학)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고 본다. 그러나 散漫(산만)하게 각 經典(경전)과 傳記(전기)에서 雜編(잡편)된 바 系統(계통)을 따져 보기에는 不便(불편)한 점이 많아서 내가 분수에 넘친 일 임을 불구하고 志中(지중)의 기록에서 拔萃(발췌)하여 日篇(일편)을 엮고 箕子(기자)의 建國(건국)하신 始終(시종)과 世系 歷年(세계, 역연)등을 略述(약술)하여 箕子實記(기자실기)라 이름하였으니 後人(후인)들의 觀覽(관람)에 便益(편익)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