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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獻公 自述 墓石碑文 解說(장헌공 자술 묘석비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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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범구 작성일26-04-18 13:49 조회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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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獻公 自述 墓石碑文 解說(장헌공 자술 묘석비문 해설)

 

올바른 일이면 피하거나 숨지 말고 굳건히 나아가라

碑文을 생전에 스스로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아마도 후손들이 억지로 美化 시키는 사례를 익히 보았기에 이에 따른 논란을 막고 후대에 깊은 유훈을 남기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이것만으로도 莊獻公의 청정한 심정과 혜안을 엿볼 수 있다.

碑文은 대체로 家系와 생애를 적고 고인의 관직과 성품을 최고의 단어를 동원해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나 자술비문 면을 보면 벼슬이 정승에 올랐음에도 淸州後人이라는 네 글자로 요약하였다.

이는 國初의 功臣과 많은 왕비를 배출하며 三韓甲族으로 불리던 名門家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담고 있으며亂世(난세)에 원치 않는 자리를 맡아 멍에를 진 것에 대한 회한의 뜻도 있다고 보여 진다.

또한 자신의 품성을 性素簡黙無華 不喜交遊曹遇이라고 적어 스스로 자신과 연관된 사람이 없음과 자신이 부귀영화를 목표로 하지 않았음을 표현하였다.

簡默은 말이 적다는 말로 깐깐하거나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간결하게 일을 처리하는것을 말한다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자는 당시 儒學의 새로운 풍조도 이와 같았다.

이 左議政으로 계실 때 獨相(독상)이셨다獨相이란 정승이 원래 세 분인데 두 분은 없고 혼자 議政府를 책임졌다는 말이다이때 문제의 廢母論(폐모론)이 대두되어 회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獨相으로 혼탁한 정국을 수습할 방도는 없었다.

莊獻公은 혼자 온 몸으로 이를 받아들였다後日(후일)의 비난을 모르거나 이로 인해 바뀔 세상을 인지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그 일들이 끝난 뒤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 함으로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길이 최선이었다.

오로지 바라는 것은 후손들이 똑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을 것이다이에 스스로 비문을 지어 경계한 것으로 당시 대문장가인 莊獻公이 단어 하나에 혼신의 마음을 기울여 碑文을 지었을 것이다.

이런 심정이 바로 世事可無歉矣然逍遙山水魚魡爲樂斯平生之至願也 世亂事乖志竟不就 悠悠九泉目何日暝昢昢乎長吁에 含蓄(함축되어있다.

世事可無歉矣에서 ()은 모자란다는 뜻의 글자인데 주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 의문의 뜻으로 쓴다같은 의미의 많은 다른 글자를 제쳐두고 이 글자를 굳이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이유이다.

게다가 ()는 反語法으로 문장을 마무리 짓는 결어 조사이다따라서 세상일에 어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없겠는가?’로 해석하여야 한다.

然逍遙山水魚魡爲樂斯平生之至願也에서 은 그러나의 의미로 앞의 단어나 문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되어야 앞뒤가 맞게 됩니다山水魚釣가 평생의 이란 말은 自嘲(자조)하는 뜻과 함께 후손에게 경계하라는 말이 분명하다.

세상 어느 비문에 생애를 표현하면서 魚釣라는 말을 쓰겠는가이것은 올바른 일이면 피하거나 숨지 말고 굳건히 나아가라는 반어법적 수사이며비문에 숨겨진 핵심적인 내용으로 후손에게 남기는 유훈이며 경고일 것이다.

莊獻公도 뒤에 이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때늦은 후회임을 안 것이다이는 世亂事乖志竟不就에서 그 뜻을 엿볼 수 있다不得이 아니고 不就라 표현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는 이루다는 뜻과 함께 나아간다는 뜻인데 政局(정국)을 바로잡는 일이 難望(난망)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군량 조달과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국가안위를 위해 묵묵히 政事(정사)에 임했던 기개와 품성이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老衰(노쇠)한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회한에 젖었으리라.

이제 남은 일은 후손의 책임이었다이는 目何日暝昢昢乎에 잘 표현되어 있다()은 어둠이고 ()은 새벽이다한문을 쓸 때 같은 자를 반복하여 그 뜻의 진의를 숨기거나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새벽을 나타내는 글자가 여럿 있지만 ()은 태양이 겨우 머리를 빠끔히 내민 것을 표현한 것이다의 겸손함이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이 자신에게 내려질 억울한 심판이라면 은 이를 벗어나는 상황일 것이다.

()는 반어법적 의문조사이다따라서 언제 구천에서 감은 눈이 새벽을 볼 수 있으랴로 해석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 그토록 ()한 밝은 새벽()은 거의 300年 뒤인 1908年 대한제국 隆熙(융희황제에 이르러서 伸冤(신원되었으니 비문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야말로 길게 탄식한 결과가 되었다.

光海君은 당시에 大北派(대북파)의 일원들이 莊獻公의 형식적인 행위를 비난하며 죄를 줘야 한다는 공론 들을 단호히 묵살하였다또한 이후 조선 후기까지 莊獻公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당시에 억울한 處事(처사)를 받았다는 傍證(방증이기도 하다.

莊獻公은 文官이었으나 文武를 겸비하였고 군사행정 전문가로 兵法에도 능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兵法書인 神器祕訣과 陣設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들은 오늘날의 군사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은 주변국의 정세변화에 따른 외교적 판단에도 탁월하여 헛된 명분론에 빠진 대신들을 설득하여 나라와 신흥국 後金(후금사이에서 중립을 원칙으로 한 광해군의 實利(실리)적인 외교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仁祖反正 이후 그러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다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외교로 回歸(회귀)하면서 강한 제국으로 부상한 나라에 의해서 결국 三田渡의 치욕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고의 외교적 굴욕을 당하게 된다.

광해군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西人(서인세력으로부터 폭군으로 평가 되었으나 오늘날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국가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광해군이 펼쳤던 신중하고 유연하며 실리적인 외교정책 등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미 재평가된 지 오래이다.

이렇게 볼 때 滅私奉公(멸사봉공)의 신념으로 파당의 이익을 떠나 오로지 나라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한 莊獻公의 업적과 노력에 대해서도 마땅히 함께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간결한 비문 몇 글자에 담은 숨은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만은 어렴풋이 짐작한 의 遺訓(유훈)이나마 잊지 말아야 하는 것 또한 후손들의 책무가 아닐까 自省(자성)해 본다.

의 자술비문은 그야말로 문장가답게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또 後世(후세)에 노골적으로 당부하지 않아 논쟁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도 아주 간결하게 적어 行間(행간)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였다.


갑진년 在野儒士 李 宇 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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