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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觀察使 韓孝純의 報告文의 평가와 原文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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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회 작성일11-01-20 19:50 조회2,835회 댓글0건

본문


용사잡록≪龍蛇雜錄≫ 개요(槪要)

成均館大 史學科敎授 李章熙
이 책은 藥圃 鄭琢先生의 親筆本으로 慶尙北道 醴泉郡 普門面 高坪里 旌忠祠에 보관되어 先生의 宗孫 鄭完鎭氏가 관리해오는 藥圃遺稿 및 文書 13種(寶物 第494號) 가운데 그 일부를 脫草하여 原本과 함께 간행한 것이다.
이 책에 앞서 이미 전년에 遺稿 가운데 壬辰記錄과 龍灣聞見錄을 合編하여 本 國史編纂委員會에서 韓國史料叢書 第36으로 출간한 바 있다. 書題上으로 보면 이번에 간행된 龍蛇雜錄이 작년에 간행된 壬辰記錄 및 龍灣聞見錄과 내용에서 중복되는 것이 있을 법도 하나, 전혀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書名이 말해주는 것과 같은 雜記類는 아니다. 「雜錄」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은 上疏文, 劄子, 王과의 問答, 書狀, 諭示文, 牌文, 報告書 등 다른 사람의 각종 文件을 모아 적은 데서 붙인 이름인 듯싶다. 각 文件들은 대체로 年月日順으로 配列되어 있으나 앞뒤가 바뀐 것도 있는데 그것은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文件들을 접하는 대로 기록하다보니 그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內容은 크게 朝·明 관련 文件, 朝·日 관련 文件, 明·日 관련 文件, 朝鮮만의 單獨 文件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朝·明 관련 文件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먼저 宣祖 26년(1593-癸巳年) 7월 明援軍이 돌아가기 이전의 明軍陣營과 朝鮮朝廷과의 問答을 들 수 있겠다. 明軍陣營에서는 敵中에 있는 朝鮮人으로 하여금 敵의 動情을 살피게 하여 그것을 그때 그때 明陣營에 보고해주도록 조선 조정이 都元帥나 諸將에게 지시할 것이며, 조선이 명군을 철수하지 말 것을 요청하자 명나라측은 자기들이 철수한다 해도 조선은 벼와 곡식을 추수하여 淸野策으로 적의 침입에 대처하되 全羅·慶尙道地方을 철저히 지키면 된다는 대처방안을 제시한 것과, 兵部主事 丁應泰가 經理 楊鎬, 提督 馬貴, 總兵 李如梅 등을 본국에 誣告하여 해치려는 데 대한 조선조정의 구제방안, 명나라 원군이 철수할 때 朝鮮婦女와 牛馬를 이끌고 鴨綠江을 건너지 말라는 兵部左侍郞 顧養謙의 지시내용, 丁酉再亂때 三路分送 明將 40명의 명단을 기록했다.
朝·日 관련 文件은 倭將 加藤淸正이 朝鮮國 總兵 高某(兵使 高彦伯을 지칭함인 듯)에게 보낸 答書인데, 그 要旨는 朝·日 兩國이 화합하면 天下가 太平해진다는 내용이다.
明·日 관계 文件은, 豊臣秀吉이 明皇帝에게 글을 보내 자신을 藩王에 册封해서 名號를 特賜해달라는 것, 加藤淸正이 보낸 文書에 대한 의견 및 이에 대한 諭示文, 都督이 재차 加藤淸正을 曉諭하는 등의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朝鮮에 관한 단독 文件으로는, 계속되는 旱魁과 洪水와 관련하여 왕은 至治에 힘쓰라는 承政院의 啓文과, 왕도 이에 대해 걱정하는 글, 領議政(柳成龍)의 여러 차례에 걸친 呈辭와 이에 대한 不允答書, 大臣 柳成龍이 失政했다고 공박한 儒生들의 上疏文, 鍊兵·運糧에 관한 대처방안과 鍊兵은 紀效新書에 입각해서 훈련시켜야 한다는 黃愼의 書狀封草, 義僧將 惟政이 왜란 중에 僧兵을 일으킨 내력과, 平安道에서의 활약상, 왜진에 들어가 敵情을 정탐한 사실, 軍需 마련책과 山城을 보존하기 위한 設險策 등이 담긴 疏文 및 그의 論賞을 지시한 備忘記, 柳成龍이 民心을 잃었다는 이유로 領議政을 사양한 劄子, 敵兵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敵情을 供述한 蔚山校生 蔣希春의 招辭, 倭陣을 왕래한 李謙受의 倭人과의 問答記 및 敵情을 탐지한 기록, 蔚山 倭陣을 왕래한 蔣希春·鄭希韶의 말, 日本에 끌려간 康玉湖가 보내온 被擄를 변명한 書札, 明將의 節制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都元帥 權慄이 高彦伯에게 지시한 글, 鄭仁弘에 대한 비난과 鄭仁弘의 上疏文, 그리고 備邊司에서 各道에 公文을 보내 倭亂中에 나타난 忠臣·孝子·烈女 등의 姓名과 實跡을 啓聞하라고 지시한 데 대한 全羅道와 慶尙道 地方의 조사보고문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全羅道는 당시 觀察使 李廷馣이 조사하여 癸巳년 12월 19일에 보고한 것인데, 조사지역은 全州·羅州·光州·南原·順天·長興·靈巖·綾城·鎭安·泰仁·玉果 등지였다. 慶尙道는 觀察使 韓孝純이 甲午년 1월 10일에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사지역은 慶州·大丘·義城·禮安·軍威·榮川·昌寧·新寧·安東·永川·龍宮 등지였다. 그러나 관찰사가 慶尙右道 地域은 二次 晋州城 싸움 때 晋州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고을도 적의 분탕질을 당하여 文案들이 없어져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 것을 보면 누락된 고을이 상당수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밝혀진 忠臣·孝子·烈女들에게는 응분의 특혜를 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龍蛇雜錄은 藥圃의 노력으로 收合된 資料集이다. 이 책은 壬辰記錄·龍灣聞見錄과 함께 壬辰倭亂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資料로 활용될 수 있으며, 특히 全羅道觀察使 李廷馣과 慶尙道觀察使 韓孝純의 報告文은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서 왜란 초기 兩南地方의 倡義起兵과 活躍相을 이해하는 데 크게 보탬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亂中社會相을 밝히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다. 단 일부 文件 가운데 손상된 句節이 있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움을 갖게 한다.

先生은 中宗 21년(1526) 慶北 醴泉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淸州이다. 字는 子精, 號는 藥圃이다. 李滉의 門人으로 明宗 13년(1558) 式年文科에 급제하여 正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宣祖 원년(1568) 明宗實錄 편찬에 참여 하였다. 그후 都承旨·大司成·江原道觀察使·大司憲·吏曹參判, 同王 15년 進賀使로 明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재차 大司憲이 되었다. 이어 禮曹·刑曹·吏曹判書를 역임한 후, 다시 謝恩使로 明에 다녀왔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左賛成으로 왕을 義州까지 호종하였으며, 明의 經略으로부터 遊擊에 이르기까지 명나라 원군의 주요 지휘관을 餞慰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전투에 차질이 없도록 열성을 다했다. 학문의 幅이 넓어 經史는 말할 것도 없고, 天文·地理·象數·兵書에 이르기까지 精通하였다. 왜란 중에 郭再祐·金德齡 같은 人材를 천거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선조 28년에 右議政에 올랐다. 丁酉再亂이 발발하자 72세의 노령으로 싸움터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자 하였으나 宣祖가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이해 3월에는 獄에 갇힌 李舜臣을 극력 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水陸併進挾攻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33년 左議政에 승진되고 判中樞府事를 거쳐, 領中樞府事에 오르고 扈從功臣 三等에 錄勳되었으며 西原府院君에 封하여졌다. 宣祖 38년(1605)에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貞簡이란 諡號가 붙여졌으며 醴泉 道正書院에 配享되었다. 

   ≪간행사≫
   본 위원회에서는 韓國史硏究를 위해 귀중한 史料들을 發掘·蒐集하여 ≪韓國史料叢書≫로 간행하여 왔다. 1955년 ≪梅泉野錄≫을 출간한 이래 현재 37種 71册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번에 第37輯으로 간행되는 책은 藥圃 鄭琢이 기록한 ≪龍蛇雜錄≫을 선정하였다. 鄭琢은 宣祖 25년(1592)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左贊成으로서 國王을 義州까지 扈從하였으며, 明軍을 餞慰하는 職責을 완수하였다. ≪龍蛇雜錄≫은 藥圃의 노력으로 收合된 資料集으로 이 책은 壬辰記錄·龍灣聞見錄과 함께 壬辰倭亂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資料이다. 특히 全羅道觀察使 李廷馣과 慶尙道觀察使 韓孝純의 報告文은 倭亂初期 兩南地方의 倡義起兵과 活躍相을 이해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며 倭亂中 사회상을 밝히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리라고 믿는다.
본 위원회에서는 근래에 사료조사 및 수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앞으로도 보다 더 귀중한 史料를 발굴하여 ≪韓國史料叢書≫로 간행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간행할 수 있도록 사료를 제공하여 주신 鄭完鎭선생과 脫草 및 脫草校訂을 맡아주신 張相朝·金喆熙선생께 감사 말씀을 드린다.
1994年 11月 日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李 元 淳

一. 本 龍蛇雜錄은 壬亂扈從功臣 鄭琢(1526~1605)이 기록한 것이다.
一. 鄭琢의 親筆本을 本 委員會에서 硏究者의 便宜를 위해 脫草하여 原本과 같이 실었다.
一. 讀者의 便宜를 위하여 脫草本에 句讀點을 찍었다.
一. 기타 자세한 것은 解題를 참조하기 바란다.

原文

嘉善大夫止巡察使臣韓狀啓 孝烈抄錄

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兼巡察使 臣 韓.
前矣祗受有 令書狀內. 事變後死節死事員役孝子烈女等. 前日 朝廷已令抄錄啓 聞矣. 今幾人旌表. 幾人受賞與否及前後陣亡人某郡幾人恤典 行 未行. 竝爲抄達. 其諸陣中最有功勞而未受賞者及或已賞而不稱其功者. 其前後功勞亦爲附錄以達. 其中陣亡家戶. 則
<171>

勿論貴賤. 依 朝廷公事. 一切復戶勿役. 變後守令終始不離境內. 討賊不懈. 表表有功者及勿論變前後. 守令之勤於治民. 力於奉公. 淸愼自持者. 昏庸不法. 不恤民隱. 貪猾無良者. 竝第其實迹以達. 兵民兩政中最爲方今大弊. 而民不能堪者. 令各邑各令. 詳問父老. 條列成冊上送事有 令是白乎味. 書狀是白有亦. 相考爲白乎矣. 孝子烈女段. 前因 朝廷公事. 慶州居幼學鄭三孝等十二人. 軍威居幼學蔣珍居十三人. 再次啓 聞後. 旌表褒賞事. 時未下來爲白有齊.
<172>

陣亡人段. 比安鄕兵將幼學金喜. 軍威代將校生張士珍. 慶州 訓鍊奉事 金庸. 昌寧前僉使 孫仁甲. 禮安義兵成均權知 柳宗介等. 已曾啓聞後. 孫仁甲段兵曹判書. 金喜段戶曹正郞. 張士珍段慶尙左水使. 金庸段釜山僉使. 柳宗介段禮曹參議爲如追 贈. 其餘表表人段. 本道以各其本官. 優給食物. 以慰妻子爲白在果. 各陣軍士之戰死者極多. 勢難一一表出爲白齊. 有功勞而未受賞者已賞. 而不稱其功者段. 道內戰功之人. 卽時無遺馳 啓. 有司按例論賞. 似無未盡者是白在果. 其中梁山郡守 邊夢龍
<173>

段. 自壬辰八月. 至于今日. 常在賊藪. 苦守其境. 終始不離兺不喩. 龍堂賊船不知其數來泊之時. 因風縱火. 焚三十餘隻. 賊倭燒死者甚多. 其後亦多斬獲之功. 大丘河濱縣義兵將朴忠後段. 大丘賊屯據之時. 夜擊斬倭. 連續獻馘. 前後通計. 幾至百餘級. 左道義兵之中. 其功獨茂. 盈德縣令 安璡段. 變初嶺東賊. 或七八名或十餘名. 潛逃下來時. 聚軍設策. 這這捕斬. 一日倭賊十餘人. 入於民家. 又與淸河縣監 鄭應聖合力. 無遺燒殺. 迎日縣監 洪昌世段. 壬辰五月間. 長鬐等處. 賊船來泊下陸. 昌世冒死力戰. 斬馘亦
<174>

多. 當其時賊勢滔天. 人皆崩潰. 奔竄恐後. 莫可收拾. 安璡 昌世等. 獨先竭力捕賊. 其功尤有可嘉者是白乎矣. 邊夢龍 安璡段. 只陞副正. 洪昌世段. 只陞僉正. 朴忠後段. 終無褒典. 人頗以爲賞不稱功是如爲白齊.
前都事 金隷男. 自變初爲右道都事. 專總兵戎之政. 或自領軍. 或指揮諸將. 竭力奔走. 勞效最著. 安東府使 禹伏龍. 變初爲龍宮守. 當兇賊長驅北上之日. 聞慶 咸昌 豐基 醴泉 比安等官隣邑守令. 莫不棄城遠遁. 伏龍獨守其邑. 終始不離. 指揮軍卒. 捕賊亦多. 眞寶縣監 金希契. 變生
<175>

之初. 遠近洶沸. 獨能苦守其邑. 鎭定民心. 又與盈德縣令 安璡. 丑山浦萬戶 吳士淸. 淸河縣監 鄭應星. 興海郡守 崔輔臣等. 相與結約. 召聚起軍. 其後領兵於醴泉. 設伏於仁同. 皆有力戰之功. 亦有所自斬者. 軍威縣監 柳澈. 賊兵久據其邑. 四出焚蕩. 幾爲賊所害者. 非止一再. 而終不離其地. 其後指揮代將張士珍等. 或設伏或接戰. 斬賊三十餘級. 前仁同縣監 趙詹. 曾爲本邑守. 賊藪不遠之地. 苦守不去. 指揮邑人. 殺賊甚多爲白在果. 禹伏龍段. 朝廷論賞. 已陞堂上. 柳澈段. 臣之四寸弟. 似當避嫌. 旣承 下問. 不
<176>

敢不以實對爲白齊.
陣亡家戶一切復戶事段. 依令下辭緣. 已爲行移施行爲白乎爾. 最爲方今大弊而民不能堪者. 令各邑守令. 詳問父老上送事段置. 一依有令內辭緣. 行移知委爲白乎爾. 孝子烈女及各陣戰亡人. 拈出現著者. 開坐于後爲白在果. 守令功勞及孝子烈女戰亡之人. 左道則臣所詳知. 右道則前年晉州之變. 列邑震蕩. 凡百文案. 幾盡散失. 又皆前監司 金誠一 金玏時事. 臣無由得知. 追于收拾文書. 參以所聞. 馳達計料爲白臥乎事是良爾. 銓次以善達向敎是事.
<177>

萬曆二十二年正月初十日.
孝子烈女秩
慶州
一. 幼學鄭三孝. 與其養父進士鄭洐. 同竄山谷. 伏於林下. 倭賊先執其父. 將欲殺之. 三孝 直進賊前. 挾父哀乞曰. 勿害老父. 當斬我. 兇 賊不聽竝斬. 父子携手同死.
一. 前奉事 孫奉先. 爲賊所害. 其妻崔氏被執. 欲犯之. 拒而不從曰. 家翁已死. 我生何爲. 自 縊而死.
<178>


一. 訓鍊奉事 金虎. 年將七十. 奮義討賊. 忘身 力戰. 以孤敵衆. 日日設伏. 或尾擊或邀擊. 斬 獲多至十餘級. 射殺射中. 不可勝記. 一日賊 擧衆而來. 虎率軍突擊. 一斬四十餘級. 又欲 盡殲餘賊. 單身血戰. 竟死於賊刃
一. 貢生金錬妻召史. 其夫上京未還. 避賊山 谷. 爲賊所執. 固拒不從. 被寸斬.
大丘
一. 士人李宗澤妻朴氏. 前縣監 忠後之女也. 家在河濱縣洛東江上. 倭賊猝至. 朴氏及其 孼弟輝陽被執. 乘賊搜探家財之時. 朴氏與
<179>

輝陽相携. 投江而死. 朴氏年十九. 輝陽時年 十五未嫁. 朴氏始聞賊變. 與輝陽相約曰. 若 遇賊. 與汝同死. 不爲所汚. 卒如其言. 人皆嘆 服.
一. 校生具應勇妻裵氏. 校生北年之女也. 居河濱 縣末山里. 爲倭賊所執. 欲汚至死不從. 賊怒 殺之. 乳兒在傍. 猶飮其乳. 聞者莫不墮淚.
一. 私婢溫代. 私奴加八里妻也. 時年二十八. 生二男一女. 與其母及舅母. 避賊山中. 匿於 巖穴間. 一日倭賊猝至. 竝被執. 賊欲汚. 溫代 罵賊曰. 吾寧死. 不爲汝所浼. 賊荷劍欲斫者
<180>

再三. 竟不從. 賊怒遂格殺之. 母子五人俱被 害. 里人憐之. 收其屍. 埋于一穴云.
義城
一. 兩班鄭太乙妻朴氏及女二人. 爲倭賊所 執. 賊欲汚之. 朴氏母子相携痛哭. 倭賊揮刃 劫之. 母女猶拒不從. 賊遂殺朴氏及二女.
一. 兩班康有男妻張氏. 爲賊所逼. 賊欲汚之. 固拒不從. 遂爲所害. 三折其身.
一. 兩班金致中妻申氏. 與婢福今. 避賊隱於 巖穴間. 賊猝至欲汚. 申氏拒而不從. 遂墜千 丈之巖. 福今痛哭扶申氏之衣. 竝墜而死.
<181>

一. 兩班金致綱妻權氏. 避賊隱於巖穴. 爲倭 賊所逼. 恐爲所穢. 自墜巖下.
禮安
一. 成均權知 柳宗介. 壬辰七月間. 倡義聚兵. 倉卒遇賊. 戰而不利. 爲賊所害. 臨死罵不絶 口云.
軍威
一. 幼學蔣珍妻金氏. 爲賊所執. 欲汚之. 金氏堅 拒賊. 幷其子殺之.
一. 良女李召史. 水軍李敏之妹也. 孝養舅姑. 變出後賊欲奸之. 罵不絶口. 逢刃殞命.
<182>

榮川
前郡守 權斗文妾良女康召史. 隨其夫避亂 于石窟. 賊將殺其夫. 康召史以身翼蔽之. 賊 不忍害. 先縛其父而去. 召史恐辱及於身. 自 墜絶壁而死.
昌寧
一. 幼學張昭遠. 其父張福被殺時. 哀乞代死. 父子俱死.
一. 幼學成繼宗妻李氏. 其父被殺時. 哀乞代 死. 賊從其言放其父. 李氏代死.
一. 幼學郭再欽妻姜氏. 倭賊執促之時. 自刺
<183>

其項致死.
一. 幼學成安禮妻朴氏. 爲賊所執. 自縊而死.
一. 幼學成遠慶妻尹氏. 倭賊縛手牽去時. 投 水而死.
新寧
一. 正兵丁應期妻鄭氏. 爲賊所執. 衣裙盡裂. 堅拒之. 終被刃死.
安東
一. 學生秦孝先女秦氏. 年二十二. 倭賊縛手 載去. 其夜逃還. 則其母已出未還. 卽潛出結 項. 所宿處得諺書云. 今雖棄生母而去. 地下
<184>

有亡父. 欲從之云.
一. 學生金致中. 竄伏絶壁下. 義城賊來. 致中 先墜. 其妻亦自墜致死.
永川
一. 私奴元石妻. 被擄於倭. 欲犯不聽. 賊寸斬 而去.
龍宮
一. 幼學鄭榮國同生妹及其妻韓氏. 倭賊焚 蕩時. 竝自投水死.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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