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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月灘) 한효순(韓孝純)의 연보(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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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작성일17-01-30 08:48 조회2,489회 댓글0건

본문

≪월탄 한효순 이야기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평전 요약≫

- 중종 38년(1543) : 1세 7월 11일 한여필(韓汝弼:1505~1571)과 어머니 유씨(柳氏:사도시정
유엄 柳渰의 딸)의 차남으로 출생, 자(字)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형
은 한효윤(韓孝胤: 1536~1580 판관) 9월 아버지 한여필(39세)이 평안도 용
강현령(龍岡縣令 : 종5품)으로 부임할 때 따라가다)
- 명종 2년(1547) : 5세 용강현 징심당(澄心堂)에서 놀다
- 명종 3년(1548) : 6세 아지를 따라 서울로 돌아오다
- 명종 4년(1549) : 7세 아버지가 전라도 김제군수(金堤郡守:종4품)로 부임하자 따라가다
- 명종 6년(1552) : 9세 12월 서울로 돌아오다
- 명종 7년(1552) : 10세 겨울 역질로 큰병을 앓고 소생하다
- 명종 9년(1554) : 12세 7월 아버지가 경기도 양근군수(楊根郡守: 종4품)로 부임하자 따
라 가다
- 명종 11년(1556) : 14세 10월 서울로 돌아오다
- 명종12년(1557) : 15세 서울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사는 동몽훈도(童蒙訓導) 이응창(李
응 昌)에게 글을 배우다
- 명종 13년(1558) : 16세 7월 서울 주자동(주자동)에 사는 성균관 전적(전적: 정6품)안정
(안 정)의 딸 순흥안씨(1540~1585)와 혼인하다.(4남2녀 출산)
- 명종 14년(1559) : 17세 9월 아버지가 함경도 문천군수(文川郡守 : 종4품)에 부임하자
형 한효윤과 함께 따라가다.
- 명종 15년(1560) : 18세 4월 교리(敎理) 윤구(尹遘)의 아들 윤흥중(尹弘中)이 함경도 고원
군수를 하고 있었는데 창려문(昌犁文)에 밝아 땔감을 지고 가서 배우다.
11월 아버지가 농작물이 피해를 입은 일로 파직되어 서울로 돌아와 원
주(原州) 노수촌(魯藪村)에 은퇴하니,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가다.
- 명종 16년(1561) : 19세 9월 김안국(金安國)의 아들 김여부(金汝孚,성균 전적)가 파직되
어 여주(驪州)로 오자 그가 사학(史學)에 정통헌 것을 알고 찾아가 (자치
통 감)을 배우고, 이어 원주 노수촌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다.
- 명종 17년(15620) : 20세 7월 선조대왕의 스승이였고 서울의 명유(名儒)로 알려진 한윤
명(韓胤明):1537~1567)이 고양군(高陽郡) 내산촌(萊山村)에서 조상 무
덤을 지키고 살았는데 땔감을 지고가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등 을 배우다.
- 명종 20년(1565) : 23세 봄 서얼 출신 척암(惕庵) 김근공(金謹恭: 1526~1568)을 찾아
가 <대학>을 배우다. 그는 이중호(李仲虎)와 성수침(成守琛)에게서 학문
을 배웠으나, 매부인 남언경(南彦經)이 서경덕의 상수역학(象數易學)을
배 우고 최초로 양명학자가 된 인물이였고 그 매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김근공은 동몽훈도가 되어 제자들을 길러 냈는데 한효순도 제자
의 한 사람이다.
- 명종 21년(1566) : 24세 봄 성균관 감시(감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에 모두 급제 했으
나 취소되다
- 선조 원년(1568) : 26세 여름 생원시 3등 13인으로 급제하다.
- 선조 3년(1570) : 28세 성균관에 입학하다. 형 한효윤이 문과에 급제하다.
- 선조 4년(1571) : 29세 아버지 한여필이 67세로 원주에서 세상을 떠나자 형 한효윤과 함
께 원주 가마도(佳麻島)에 있는 묘소를 지키다.(오늘날 여주시 강천면 부평
리 가마도)
- 선조 6년(1573) : 31세 6월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다.
- 선조 7년(1574) : 32세 4월 서책과 식량 등을 가지고 양평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용문
사 백련대(白蓮臺)에서 공부하다.
- 선조 9년(1576) : 34세 3월 식년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급제하다. 승문원 권지
부 정자(權智 副正字; 종9품)에 승진하다.
- 선조 11년(1578) : 36세 6월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종9품)에 승진하다.
- 선조 12년(1579) : 37세 봄 승문원 정자(正子 : 정9품)에 승진하다. 여름 승문원 저작(著
作: 정 8품 )에 승진하다. 겨울 승문원 박사(博士: 정7품)에 승진하다.
- 선조 13년(1580년) : 38세 6월 성균관 전적(典籍 : 정6품)에 승진, 공조좌랑(工曹佐郎 :정
6 품)에 제수되다 7월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에 제수되고, 17명의 홍
문록(弘文錄)에 들어가다. 이조좌랑(정6품)에 제수되다. 8월 사간원 정언
에 다시 제수되다.
- 선조 14년(1581) : 39세 2월 청직인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 에 제수되다. 5월 이
조좌랑(정6품)에 제수되다. 당시 이조판서는 이산해(李山海)와 이이(李
珥) 였다.
- 선조 17년(1584) : 42세 정월 어머니 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원주 가마도에서 시묘살이를
하다. 11월1일 우의정 정유길(정유길)이 한효순 등을 추천하다.
- 선조 18년(1585) : 43세 부인 안씨가 세상을 떠나다(향년 46세)
- 선조 19년(1586) : 44세 3월 어머니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다. 임금이 유신(儒臣)
에게 명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음(음)으로 분석하고 교정하여 간행하
기 위해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햇는데 예조정랑(정5품)으로서 참여하다.
- 선조 20년(1587) : 45세 4월 부인안씨 3년상을 마치고 충청도 서산(瑞山) 사람 강효윤(姜
孝胤: 현감)의 딸 (1568~?)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다. (3남2녀출산)
5월 교정청의 일이 끝나자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서 연회를 베풀다. 7
월 의정부 검상(검상: 정5품)을 거쳐 의정부 사인(사인: 정4품)으로 승진
사 인으로 있을 때 잠시 처가가 있는 서산에 거주하다.
- 선조 21년(1588) : 46세 2월 일본 사신의 선위사(선위사)를 맡다. 3월 일본 사신 귤강광
(橘康廣) 등을 맞이하다. 4월10일 일본 사신이 문경지방의 큰다리를 지나
갈때 다리가 무너져 사신은 물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역자(驛子)
는 죽었다고 보고하다. 4월22일 일본 사신을 호송하며 성주 괄거현에 당도
하다. 5월 서울로 돌아오다. 임금이 왜국(倭國)의 정세와 형편을 묻자 “나
라 가운데 66도가 있으며 도감사(都監司: 풍신수길)라는 자가 있는데 지략
이 뛰어나서 전국이 떨고 있으며 지금 자신들이 온 것도 통신사를 청하기
위함”이라 보고하다. 윤달 6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종4품)에 제수되다.
6 월8일 임금이 석강(夕講)에서 ≪통감강목≫을 강했는데 한효순이 아뢰기
를 “제갈량이 손수 부서(簿書)를 다루자 양옹(楊顒)이 간(諫)했는데, 옛 사람
이 말 하기를 제갈공명이 사체를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부득이 손수 다룬 것
인데, 양옹이 공명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다. 7월5일
한효순 등 어사(御史)로 치장하여 지방에 보내다. 8월5일 함경도 재상어
사 (災傷御史)로서 밀지를 받들고 떠났는데 아버지가 군수로 있었던 문천에
이르러 그 읍의 품관, 아전, 관속들을 만나 옛정을 풀다.
- 선조 22년(1589) : 47세 2월 사헌부 집의(執義; 종3품)에 제수되다. 10월 성균관 사성
(司成 : 종3품)에 제수되다. 10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터지다. 12월
사은사(謝恩使) 정탁(鄭琢)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가다.
- 선조 23년(1590) : 48세 6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도중 정여립과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
로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파직되었다는 소식을 듣다. 8월 파직되자 필마로
처가가 있는 서산(瑞山)으로 내려가 해미(海美) 양림리(良林理)에 14칸의 농
가를 짓고 오래 살 계획을 세우다. 12월 예빈사정(禮賓寺正: 정3품 당하관)
에 추천되였으나 이조에서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경상도 영해
부사(寧海府使: 종3품)로 좌천되다.
- 선조 24년(1591) : 49세정월 영해부사로 부임할 때 원주에 가서부모 무덤을 청소하다. 2월2
일 영해부에 도착
- 선조 25년(1592) : 50세 4얼14일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주력부
대는 서울로 북진하고 경상도 경주(慶州), 영천(永川),청도(淸道), 인동(仁
同), 당교(唐橋) 등지에 작은 부대를 주둔시켜 놓다. 5월 영해부사 한효순이
영덕현령, 청하현감, 평해군수, 축산포 만호 등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지
금 왜구들이 곳곳마다 가득 찼는데 경상도 감사, 병사, 수사가 모두 거처
를 알수 없어 병무(兵務)의 호령을 주고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에
울진,평해,영해,영덕,청하,흥해,연일,장기를 좌상(左床)으로 삼고, 풍기,영
천(榮川),안동,봉화,예안,진보,청송,의성,의흥,비안,인동을 우상(右床)으로 삼
아 각기 그 소관 군병,기계,식량을 소속 시켰다. 우상은 안동부사가 맡고,
좌 상은 영해부사가 대장을 맡기로 하다. 평양의 임금 행재소에 사실을 알
리는 장계를 올리다. 왜란이 발발한지 50여일이 지났으나 소식이 끊겨져
몰락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평양의 임금과 대신들은 이 장계를 보고 크
게 기뻐하면서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라고 찬탄하다. 8월7일 경상우도 관
찰사로 있다가 뒤에 김성일(김성일)을 대신하여 경상좌도관찰사로 바꾸다.
- 선조 26년(1593) : 51세 1월11일 각 도의 병마 숫자가 17만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
데 안동에 주둔한 한효순의 군대는 1만 명에 이르다. 2월18일 왜적이 진주
를 공격하고 바닷가에 성을 쌓으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다. 4월17일 왜
적이 부산과 동해 사이에 많은 숫자의 적선(敵船)을 정박하고 있어 군대를
증강하는 형세가 현저하다고 보고하다. 4월18일 임금이 식량조달을 위해 공
명첩(空名帖)을 김성일과 한효순이 있는 곳으로 보내라고 명하다. 4월20일
도체찰사 유성룡,도원수, 김명원이 한효순의 첩보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대비
책을 논의하다.5월22일 경상도 왜적의 동향과 이여송 부대의 충주 도착을
보고하다. 6월6일 동래부 지방에 복병을 배치하여 왜적의 머리 68과를 베어
오 다. 6월 15일 관찰사 한효순이 문경,상주,선산,인동,대구,청도,밀양,양산 등
지의 왜적들이 거의 다 바다를 건너갔다고 보고하다. 7월11일 경주 이남의
도로가 점차 개통되어 군사가 통행할수 있다고 보고하다. 7월15일 경상좌
도관찰사로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황정욱의 단자를 임금에게 보고하다.
7월16일 6월29일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를 보고하다. 7월27일 경주 접경
전에 봉안했던 어용(御容: 초상화)을 예안(禮安) 청량산으로 옮겼는데 안전하
지 않아 한효순이 관원 두사람을 그곳으로 보냈다. 7월29일 경상좌도 순찰사
로서 왜적이 진주를 무찌른뒤 한 갈래는 부산으로 향하고 한갈래는 초계로
향 했는데 모두 본토로 돌아갈 것이라고 보고했다. 5월19일 울산,언양,양산, 등
지에 왜적이 산야에 가득하나 위급한 형세를 구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다.
- 선조 27년(1594) : 52세 1-2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대병을 이끌고 내려오니 한효순
이 조령에서 맞이하다. 가선대부(종2품)로 승진, 경상좌우도를 통합하는 관찰
사 에 제수되다. 9월 병조참판(종2품)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다. 오는 도중 원
주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조카 한준겸이 원주목의 낭관으로 있었다. 겨울 서
울 장의동에 우거, 병조참판으로서 군공청(군공청) 당상과 비변사 당상을 겸
하다.
- 선조 28년(1595) : 53세 병조참판을 사직, 대사간과 대사현(종2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하고, 다시 병조참판으로서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와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 하다.
- 선조 29년(1596) : 54세 8월20일 삼남도체찰사 이원익(이원익)의 부체찰사에 임명되다.
임금이 만나보고 특명으로 궁전(弓箭),궁대(弓隊),통개(筒介), 어른말 1필을
하사하다. 윤달 8월3일 진주에 이르렀다. 이날 이원익과 상의하여 호남을 지
휘 본부로 만들자고 합의하고 그 뜻을 도원수 권율,찬획사 이발사,통제사 이
순신에게 알려주다.10월 상주에 이르러 본영(本營)을 체찰하다. 11월 한산
도 해영(海營)으로 가니 통제사 이순신이 판옥선에 군관과 수졸을 거느리고
소 비포에서 맞이하다. 한산에서 6~7일간 유숙하면서 수군재건 문제를 논의
하고 성주로 돌아오다. 11월20일 이원익이 성주로 돌아오다. 한효순이 한산
도에 가서 통제사 이순신을 만나 격졸(格卒: 노젓는 군졸),양향(식량),기계
(器械)를 상의하고 처리하고 왔다고 말하니 이원익이 “내가 그 곳에 도착하
여 논의하려던 주사(舟師)의 일을 이미 영공(영공)께서 다 요리 했으니 앞으
로 주사에 관한 일을 모두 영공께 맡깁니다. 충청,전라 및 경상우도의 주사
일은 영공이 혼자서 맡으십시오”라고 말하다. 한효순은 충청,전라를 맡고 경
상우도는 이원익이 맡기로 합의하고 다음날 한효순은 말을 타고 남원에 도
착하여 전라도 주사(舟師: 수군)의 일을 약속하다. 이어 공주로 돌아가서 충
청 감사를 만나고 해변을 따라 내려와서 순천부에 도착하다. 이로부터 하루
도 쉬지않고 호서와 호남의 해변을 왕래하면서 주사 재건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다.
- 선조 30년(1597) : 55세 봄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전라좌수영에서 다시 만나 주사의
일을 논의하다. 수개원 만에 전선 23척을 여러섬에서 특별히 건조하여 한산
도에 보냈다. 7월 원균 부대가 패전하여 전선이 한 척도 남아있지 않자 임
금이 급히 30척을 건조하라고 명하였다. 한효순은 주야를 가리지않고 울면
서 처리하고 배를 만들었다. 그 결과 변산(邊山)의 배가 태반이나 손에 들어
왔다. 임피(臨陂)로부터 한산(韓山)에 가서 강변 촌사에 유숙하면서 충청도
내포지역의 왜적의 정보를 탐지하여 보고하고 암쪽으로 내려오는 피난민들
의 배 값을 올리는 자들을 엄벌로 다스려 많은 사람들을 살리다. 11월 15일
충청도 결성(結城: 홍주)에 있을때 명나라 양경리(楊經理)가 군량미 문제
로 만나자고 하니 속히 올라오라는 명을 받다. 바로 말을 타고 홍주(洪州),예
산(禮山),아산(牙山)에 와서 바다를 건너 설창(雪倉)에 밤 3경에 도착하다. 이
때 “이여송 부대가 이미 배를 타고 강화도에서 출발했으니 즉시 돌아가서 맞
하라”는 명이 내려오다. 그래서 다시 아산 공세진(貢稅津)을 돌아서 면천(沔
川)을 거쳐 태안(泰安) 소근포(所斤浦)에 도착하여 300여척의 이여송 함대를
만나다. 이여송의 부하가 식량을 준비 했느냐고 묻자 한효순은 “방금 도착 했
으므로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자 명나라 장수가 노하여 중국배에 강제
로 태우고 안면도 대포(大浦)에 가서 정박하다. 한효순은 이 지역에 200여석
의 식량이 있으니 싣고가자 하니 명나라 장수는 바쁘다고 하면서 다시 향해
를 시작했는데 밤에 태풍이 불어 표류하다가 2일뒤 구사일생으로 남포(藍浦)
에 상륙하다. 뒤에 아들 한윤겸이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 표해록(漂海錄)이다.
- 선조 31년(1598) : 56세 봄 부체찰사의 직을 그만두고 호남 호서 염철 양향 총관사(湖
南湖西 鹽鐵 糧餉 摠管史)의 직을 받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소금과 무
기 그리고 식량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7월8일 물자를 보내준 것에
대하여 이순신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다. 겨울 임진왜란 종결
- 선조 32년(1599) : 57세 1월 전라도 도순찰사에 제수되다.
- 선조 33년(1600) : 58세여름 전라도 도순찰사를 사직하고 충청도 결성(結城) 수룡곶(水
龍 곶)에 있는 별장으로 내려가다. 가을 도체찰사 이원익의 부체찰사로 영남
에 내려가 여러 지역을 순행하면서 검칙하다. 겨울 부체찰사를 그만두고 서
산(瑞山)으로 낙향하다.
- 선조 34년(1601) : 59세 1월 병조판서에 제수 되었으나 받지 않다. 다시 형조판서에 제
수 되었으나 역시 사양하다. 그동안 피로가 쌓인 것을 풀어 조섭하기 위함
이였다. 겨울 함경도 도순찰사의 직임을 맡다.
- 선조 35년(1602) : 60세 함경도 도순찰사로서 함흥에 이르면서 풍패관(豊沛館)을 짓고
동 남문루를 세우다.
- 선조 36년(1603) : 61세 여름 함흥 무학당(武學堂)에서 신기비결(神器祕訣)을 저술하다.
가을 함흥에서 진설(陳設)을 저술하다. 겨울 함경도 도순찰사를 마치다.
- 선조 37년(1604) : 62세 2월 이조판서(정2품)에 제수되다. 4월 지중추부사(정2품),지의금
부사(정2품)가 되다. 4월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效忠 仗義 迪毅
協力 宣武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서흥 부원군(서흥 부원군)에 봉해지다.
11 월 호조판서(정2품)에 제수되다.
- 선조 38년(1605) : 63세 5월 평안도 관찰사(종2품)에 제수되다. 8월 사도 도체찰사(四
道都體察使), 의정부 우찬성(종1품)에 제수되다.
- 선조 39년(1606) : 64세 7월 병조판서(정2품), 지경연사(知經筵事: 정2품)에 제수되다.
임금과 장시간 국방대책을 논의하다.
- 선조 40년(1607) : 65세 2월 이조판서(정2품)에 제수되다. 4월 판돈년부사(정1품), 판의
금부사(종1품)에 제수되다.
- 광해즉위년(1608) : 66세 4월 개성부 유수(留守: 정2품)에 제수되다.
- 광해 원년(1609) : 67세 11월 개성부 유수를 사직하다.
- 광해 2년(1610) : 68세 4월 덕산온정(德山溫井)에 목욕하기 위해 휴가를 받다. 해미 양림
(海美良林) 농가로 낙향하다.
- 광해 4년(1612) : 70세 봄 김직재(金直哉) 역변(逆變)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하다. (영창
대군파 제거를 위한 무고사건), 10월 숭록대부(정2품)를 받다.
- 광해 5년(1613) : 71세 3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발하다. 박응서 사건으로 영창대군
파가 숙청되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배 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되다. 유
교칠신(遺敎七臣: 유영경,한은인,박동량,서성,신흥,허성,한준겸)이귀양가다.
봄 70세가 넘자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다. 임금이 “경은 노성숙망(老成宿
望: 경험과 명망이 높은사람)으로서 은퇴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리니 내 마음
이 허전하다.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정에 있으라”고 만류하다.
- 광해 6년(1614) : 72세 1월 보국숭록대부(정1품)로서판중추부사(종1품)에 제수되다.
- 광해 7년(1615) : 73세 5월 공조판서에 제수되다. 7월 이조판서에 제수되다. 큰 조카 한
백겸(韓百謙)이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편찬하다.
- 광해 8년(1616) : 74세 10월 의정부 우의정(정1품)에 제수되다. 12월21일 진사 윤선도(尹
善道)가 이이첨(李爾瞻)의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다. 한효순은 언로
의 자유를 들어 윤선도를 옹호하자 이이첨 일파가 역적을 두둔한다고 성토
하다.
- 광해 9년(1617) : 75세 1월4일 종친들이 윤선도를 옹호하고 이이첨의 횡포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다. 1월20일 허균(許筠)이 서궁(西宮)에 투서하여 인목대비가
기자현,유희분,박승종 등과 손잡고 모역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 고발하여 인
목대비 폐위운동을 본격화 하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유생들이 인목대비
의 폐위를 잇단 상소를 올리면서, 여기서 협조하지 않는 한효순을 남인(南
人)의 괴수라 지목하고 목을 베라고 주장다. 1월23일부터 11월에 이르기 까
지 한효순은 우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수십차례 올리고 집에 첨거했으나
불허하다. 11월 25일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700명의 백관회의를 소집하
여 인목대비 폐위에 관한 찬반의견을 수렴하다. 한효순은 여기에 불참 했으
나 이이첨 일파가 거짓으로 이름을 올리다. 11월27일 폐모론에 반대한 영
의정 기자현을 성 밖으로 내쫒다.
- 광해 10년(1618) : 76세 1월4일 이이첨 일파가 한효순의 이름을 빌어 소집한 정청(庭請)
에 마지못해 참석하여 폐모론을 반대하여 새벽가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
한효순이 옷소매를 휘저으면서 반대하여 묘당의 먼지를 모두 쓸어 냈다고
함. 1월18일 좌의정에 제수되다. 1월30일 서궁폄손절목(西宮貶損節目)을 정
하다.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으로 부르고, 후궁에 해당하는 대우를 하기로
결정, 그러나 중국의 승인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과 후금관계 등이 복합
적으로 얽혀 반포하지 못하다.
- 광해 11년(1619) : 77세 6월2일 영충주부사(정1품) 제수되다. 중립적인 후금정책을 건의
하다.
- 광해13년(1621) : 79세 8월24일 조카(韓浚謙)이 귀양에서 풀려나 북방지역을 방비하는 도
원수(都元帥)에 임명되다. 11월15일 서울 장흥동(長興洞: 청운동) 셋집에
서 세상을 떠나다. 장헌(莊獻) 이라는 시호를 받다. 12월 17일 광주 영장
산(靈長山) 서록의 양부 한여번(한여번) 묘소 아래에 안장하다. 현재 성남
시 분당구 서현동, 장례식때 이원익(李元翼),심희수(沈喜壽), 이호민(李好
閔), 윤휘(尹暉), 김류(金瑬), 유몽인(柳夢寅), 여우길(呂祐吉) 등 당대 명
사 들이 만사(挽辭)를 써 애도하고 덕업을 칭송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
물로 평가하다.
- 인조 즉위년(1623) : 4월 폐모론의 핵심인사인 이이첨과 정인홍이 체포되어 참형되다. 4
월 한효순의 관직을 삭탈하고, 살아있덩 세 아들을 중도부처(中途付處)
하여 서산, 횡성으로 낙향하다.
- 숙종 9년(1683) : 증손 한후명(韓厚明: 도정 都正)의 부탁을 받아 외현손 이돈(李墩:
학)이 묘비문을 짓고 외현손 이징귀(李徵龜: 공조판서)가 글씨를 써서
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한효순이 스스로 지은 비문의 음기(陰記)를 넣
었다. 세상을 떠난지 62년만에 묘비가 세워진 것이다.
- 영조 45년(1769) : 임금이 5대손 한종찬(韓宗纘)의 청현직 임명을 허락하다.
- 정조 7년(1785) : 1월11일 서산(瑞山) 유생 7대손 한석민(韓錫敏)이 격쟁(擊錚)하여 한효
순의 관직회복을 청원 했으나 불허하다.
- 정조 11년(1787) : 2월 7대손 한덕후(韓德厚)의 청현직 임명을 허락하다.
- 정조 14년(1790) : 해미(海味) 유생 7대손 한석조(韓錫朝)가 격쟁(擊錚)하여 한효순의 관직
회복을 청원했으나 불허하다.
- 정조 15년(1791) : 규장각에 ⟪신기비결⟫과 ⟪진설⟫을 보관하다.
- 정조 15년(1791) : 2월16일 한석조가 다시 격쟁 상언 했으나 불허하다.
- 정조 18년(1794) : 9월28일 한석조가 다시 격쟁 했으나 불허하다.
- 정조 20년(1796) : 정조 14년 이후로 한석조가 5차례 격쟁, 5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불허
하다.
- 정조 21년(1797) : 3월 한석조가 격쟁 했으나 불허하다.
- 철종 8년(1857) : 신원을 위한 격쟁을 했으나 실패하다.
-고종원년(1864) : 7월 10일 조대비의 명으로 한효순을 포함한 수십명의 관작을 회복 시키
다. 회복된 관작은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김춘추관
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事 金春秋館事)이다.
- 고종 10년(1874) : 10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회복된 관작을 추탈하다.
- 고종 11년(1875) : 해미 유생 한회원(韓會源)이 신원상소를 준비했으나 실행하지 못하다.
- 1908년 : 1월30일 해미 유생 한윤동(韓胤東) 등이 신원(身元)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다.
4월 30일 한효순을 포함한 78명의 관작을 회복시키다.

(한효순의 일곱 아들)
1) 한유겸(韓有謙 1567 ~ 1619) : 안씨 소생, 음보로 인천현감(종6품),
≪인천공파⟫
2) 한수겸(韓守謙 1570 ~ 1622) : 안씨 소생, 음보로 출사, 왜란때 세자를 호종하여 서능군
(서능군)에 봉해지고 이조판서(정2품)역임⟪서능군파⟫
3) 한치겸(韓致謙 1574 ~ 1608) : 안씨 소생, 무과를 거쳐 단천군수(端川郡守: 종4품) 에
이름⟪단천공파⟫
4) 한이겸(韓履謙 1581 ~ ? ) : 안씨 소생, 문과를 거쳐 승지(承旨:정3품)에 이름
⟪승자공파⟫
5) 한윤겸(韓允謙 1588 ~ 1637) : 강씨 소생, 문과를 거쳐 도사(都事: 종5품)에 이름
⟪도사공파⟫
6) 한극겸(韓克謙 1589 ~ ? ) : 강씨 소생, 문과를 거쳐 정랑(正郞: 정5품)에 이름
⟪정랑 공파⟫
7) 한호겸(韓好謙 1596 ~ 1672) : 강씨 소생, 음보로 세마(洗馬: 정9품)를 거쳐 도사(종5품)
에 이름 ⟪세마공파⟫

〈자료제공 : 한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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