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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墓碑銘)

<원문해설>
宗人(종인) 韓 琦(한기), 命玄(명현), 喆增(철증)이 나 元震(원진)에게 書信(서신)을 보냈는데 사연인즉 선조 禮賓卿 府君(예빈경 부군)의 산소가 세대가 오래되어 그 所在(소재)를 알 길이 없어 언제나 子孫(자손)들의 羞恥(수치)가 되었던 바 湖南 靈光郡 陳良面 支藏山(호남 영광군 진량면 지장산) 아래 薪寺洞(신사동)에 한 古塚(고분)이 있으되 옛날부터韓政丞 墓(한정승 묘)라고 전하여 왔다. 辛酉(신유년 단기4074, 서기1741年) 가을에 호남 사는 종인 德潤(덕윤), 重彦(중언), 希孟(희맹), 世龜(세구), 宗聖(종성), 希秀(희수), 日周(일주)가 가서 찾아본 즉 산소에 碑石(비석)이 있는데 이끼가 끼어서문자를 식별할 수가 없다. 모래로 닦고 물로 씻어보니 "朝正大夫行禮賓卿韓光胤之墓(조정대부행예빈경한광윤지묘)" 라는 13자가 써 있고 또 후면에 陰刻(음각)된 글자가있으되 刻字(각자)가 심하게 부숴지고 돌 끝 부분이 흙에 묻힌 곳에羅州陳氏(나주진씨)와 子某某(자모모)라는 若干(약간)의 글자와 官職名 姓 諱 配位 子某(관직명 성 휘 배위 자모)라는 文字(문자)가 한결 같이譜牒(족보)의 記錄(기록)과 符合(부합)되었다.府君(부군)께서 松京(송경)에서 官職(관직)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에는 南部 地方(남부 지방)에墓所(묘소)를 모시게 되었으니 그 당시의 일은 考證(고증)할 道理(도리)가 없다. 그러나 墓(묘) 아래에 사는 주민들의 傳說(전설)에 따르면 政丞公(한정승)이이곳에 左遷(좌천) 당하여 오셨다가 下世(하세)하시므로이곳에 葬禮(장례)를 모시게 된 것이라 하니 事理(사리)가 그럴 듯한 일이요,시골에서는 宰相(재상)을 통칭 政丞(정승)이라고 하는 예도 있다.호남 여러 종인들이 사람을 보내 墓碣(묘갈)의 印本(인본)을 한 장 가지고 와서서울 사는 여러 宗中(종중)에 通報(통보)하였다.다음해 壬戌(임술)년 봄에 喆增(철증)을 有司(유사)로 정하여 墓所(묘소)의 改修(개수)와修護策(수호책)에 관한 일을 主幹(주간)토록 하였는데 때 마침 그 곳 郡守(군수)가先祖(선조)의 後裔(후예)되는 사람이어서 官力(관력)으로 墓所(묘소)를 改封築(개봉축)하고歲事(세사)를 修行(수행)하게 되었고 또 호남 宗人(종인)들이 金錢(금전)을 거두어 祭田(제전)을마련하였으며 官(관)에 提訴(제소)하여 冒葬(모장)한 10여기의 민간 묘를 掘去(굴거)하였다. 묘소를 失護(실호) 한 지가 몇 백년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거니와 이제 갑자기 墓域(묘역)을重修(중수)하고 膽慕(담막)하여 省掃(성귀)할 곳을 가지게 되니 子孫(자손)된 道理(도리)에다행하기 이를 데 없는 바이다. 舊碣(구갈)은 무너지고 떨어짐이 극심하여 불과 수년 내에또다시 인몰할 우려가 있으니 이제는 表石(표석)을 세워야 하고墳墓(분묘)를 찾은 事由(사유)도 기록하여 밝혀두어야 할 것인즉 碑文(비문)을 쓰는 일은그대가 책임지라 하여 나는 이 書信(서신)을 받고꿇어앉아 감격한 끝에 그 서신의 적은 사연대로 이 글을 썼다.
곰곰히 생각 하건데 크게 功德(공덕)이 있는 사람은 그 墓所(묘소)가 반드시 傳(전)하는 法이다.始祖 太尉公(시조 태위공) 묘소도 한때 실전되었으나 肅宗 己巳年(숙종 기사년)에 다시 찾아서香火(향화)를 받들 게 되었으니 이 어찌 공덕의 餘光(여광)이라 아니할 수 있는가.禮賓卿 府君(예빈경 부군)의 事蹟(사적)은 年代(년대)가 멀어서 소상히 알 수는 없으나그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다시 尋得(심득)한 사실만으로도 그 공덕이 위대하심을 가히 알만하다.유구한 세월 속에 興廢(흥폐)가 無常(무상)한데 이제 찾았으니 또다시 失護(실호)되는 일이 없을까예기할 수 없는 터라 그래서 이 돌을 不可不(불가불) 세워야 하고 오래되면또 새 것으로 改替(개체)하여 또다시 永遠(영원)히 이어가기를 바란다.
崇禎再甲子(숭정재갑자 단기4077, 서기1744年) 仲冬日(겨울) 17代孫 元震 (17대손 원진)
입비전말추명(立碑顚末追銘)
<原文> 系出邈遠肇自軒轅逮之天乙立國于殷歷世十六乃誕文聖天下宗周我罔僕之東出朝鮮用變夷蠻維三苗裔有上黨韓歷年二千有諱曰蘭佐麗統合壁上紀績有諱曰穎校尉之職有諱尙休官至別將有諱曰奕尙衣直長是生希愈虎衛將軍胚胎前烈篤生府君聖人之胃功臣之孫竣德殊績宜多可言世遠難詳後人之寃觀於失墓其餘何諭所可徵者冥蔭綿狐子孫熾昌其麗萬億儒宗詞盟魏勳碩輔譜不絶書有光祖武維其有之是以似之詩不云乎念修在泫. 辛巳五月 後孫 肯鎬 謹銘, 寅洙 謹書, 翼敎 謹篆
<원문해설>
立碑顚末 및 追銘(비석을 세우게 된 동기와 추가하는 글) 이 墓碑(묘비)는 英朝(영조) 17年 辛酉(신유)에 失護(실호) 중이던禮賓卿 府君(예빈경 부군)의 墓所(묘소)를 尋得(심득)하고3년후 甲子(갑자)에 南塘 元辰(남당 원진)이 이 碑石(비석)을 撰述(찬술)하였으나그 당시 立石(입석)까지 완수치 못하고 다시 2년후인 丙寅(병인)에後孫 啓辰(후손 계진)이 本郡 郡守(본군 군수)로 來任(래임)하여새로 短碣(단갈)을 墓左(묘좌)에 建立(건립)하였을 뿐이었다.그로부터 190여년후 庚辰(경진년 단기4273, 서기1940년)에 종중의 公議(공의)가府君(부군)의 顯達(현달)하신 史蹟(사적)은마땅히 神道大碑(신도대비)가 있어야 한다고 決定(결정)하고앞에 쓴 南塘 先生(남당 선생)이 지어놓은 碑文(비문)을 序(서)로하고參判 肯鎬(참판 긍호)의 所撰(소찬)인 銘(명)을 追錄(추록)하되 寅洙(인수)의 글씨와 翼敎(익교)의 篆字(전자)로새 비석에 入刻(입각)하여 다음 해 辛巳 五月(신사 오월)에 묘소 입구에 건립하였다.
追銘(추명):由來(유래)가 아득하여 軒轅氏(간원씨)가 起源(기원)이라.天乙(천을)때 이르러서 殷(은)나라를 세웠으니系代(세대)가 十六世(16세)에 文聖大王(문성대왕) 탄생이라.天下(천하)가 周(주)에 臣僕(신복) 나는 敢(감)히 할 수 없어東(동)으로 朝鮮(조선)와서 禮義 敎育(예의 교육) 널리 폈네.그後裔(후예) 三人 中에 한 가닥이 上黨韓氏(상당한씨)歷年(역년)이 二千餘(삼천여)에 尊諱(존휘)를 蘭(란)하는 분麗朝(려조)를 輔佐(보좌)하여 壁上功臣(벽상공신) 되시었고尊諱(존휘)를 穎(영) 하는분 敎尉(교위) 벼슬 지내시고尊諱(존휘)에 尙休(상휴)는 別將(별장) 벼슬 지내시고尊諱(존휘)를 奕(혁) 하는분 尙衣直長(상의직장) 벼슬인데그 아들 希愈(희유)는 神虎衛將軍(신호위장군) 벼슬이라前烈(전열) 얼을 받아 府君(부군)을 誕生(탄생)하니聖人(성인)의 後裔(후예)이며 功臣(공신)의 子孫(자손)이라.높은 德(덕) 큰 嶪績(업적)이 전할 일이 많으련만옛날 일 알 수 없어 後孫(후손)들이 寃恨(원한)일세墓(묘)까지 失傳(실전)인데 더 할말이 무엇인가그래도 믿는 바는 蔭德(음덕)이 길게 이어子孫(자손)이 繁昌(번창)하니 그 數(수)가 萬億(만억)이라.큰 선비 文章大家(문장대가) 높은 勳功(공훈) 어진 正丞(정승)族譜(족보)에 글귀마다 歷代先祖 功蹟(역대 선조 공적)이라.根本(근본)은 禮義廉치 이것을 繼承(계승)하여詩經(시경)의 말과 같이 이대로만 念修(염수)하라.
신사 5월 후손 긍호 지음, 인수 글씨, 익교 새김
追遠齊記(撰 : 後孫 靈光郡守 光近)
<原文>
齊之名以追遠蓋取曾子歸後之義也奧我先祖禮賓卿府君在勝國高元之世登第秩至朝正追封司空左僕射其偉烈盛蹟必有著于世者而文獻無徵今不可考墳山在於古永光郡卽今靈光郡而亦以世遠失傳久矣逮我 英考辛酉後孫世龜等辛得墓碣於本郡陳良面支藏山下翌年任戌諸孫訟于官改封塋置祭田丙寅後孫啓辰以郡宰竪碣而其記事越四年庚午後孫翼暮以道伯始建齊閣墓道儀文於是乎략(田+各: 다스릴 략)備焉不消前守朗州具數頃田以補인(示+西+土: 공경할 인)祀之需獨恨夫齊宇狹隘又賓於傾비遂發重建之儀秋伋經歸末潰于成末二朞첨(공경할 첨)守本郡及鳩잔(욕할)事力改建于舊址不逾時而功告訖前唐廳事爲六楹左右夾室各三楹視前制稍高大焉嗚呼今距府君之世大約垂五百年而雲伋綿延冠組相製沙麓之祥帶礪之勳史不編書赫赫照人以至內外派流殆乎滿國中苟肥我先祖돌(흐를 돌)仁積德何以徵餘慶於後昆歟夫親盡而歲一祭于墓禮也當其歲享之際明發夙夜鷄鳴風雨其能無突然肅然洞洞乎如或見之耶是齊也爲追遠報本而說則觀棟宇之成毁可以卜祚胤之隆衰繼今以往爲我祖先後者其皆修潤기(旣+土: 맥질할 기)茨而丹之于以護松柏于以供芬苾營言孝思百世勿替則南國人士之過我齊者咸曰某公有後而後孫追報之誠斯可歸厚矣凡我同祖之人합(去+皿: 덮을 합)亦勉전(方+人+円: 기 전)
<원문해설>
제각(齊閣)의 이름을 추원제(追遠齊)로 정함은 증자(曾子)의 귀후(歸厚)의 뜻을 취한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 예빈경(禮賓卿) 부군(府君)께서고려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간에 등제(等第)하여지위가 조정대부(朝正大夫)에 이르시고 또 사공(司空) 좌복사(左僕射)에 추봉(追封)되시었다. 그 위열(偉烈)과 훌륭한 공적으로는 반드시 세상에 드러났어야 할 것이나문헌이 무징(無徵)하여 이제 상고할 수 없다. 산소가 옛날 영광군(永光郡) 즉 지금의 영광군(靈光郡)은 세대가 너무 많이 지나전함이 끊어진지 오래다. 영조 신유년(단기4074, 서기1741년)에 후손 세구(世龜)등이다행히 묘갈석(墓碣石)을 본군 진량면(陳良面) 지장산(支藏山) 아래에서 발견하고 다음해 壬戌(임술)년에 여러 후손들이 관(官)에 송사(訟事)를 제기하여 봉분을 개축하고제전(祭田)을 마련하였다. 병인년(단기4079, 서기1746년)에 후손 계진(啓辰)이 군수로 와서 묘갈(墓碣)을 세워그 전말을 기록하였고 4년이 지난 경오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한후손 익모(翼慕)가 제각을 창건하여 묘도(墓道) 의문(儀文)이 비로서 대략 갗추어졌다. 불소(不消)가 전 낭주군수(朗州郡守)로 있을 때 몇 이랑의 위토(位土)를 마련하여제수(祭需)에 보조(補助)하고 다만 제사(齊舍)가 비좁고 쓰러질 날이 가까워짐을 염려하여중건할 것을 발의하고 가을에 돌아왔다.그 후 2년이 못되어 본 군의 군수로 도임하여 자금과 힘을 모아 옛 터에 제실를 개축하고때를 넘기지 않고 준공하니 전당청사(前堂廳舍)가 6楹(5칸), 좌우에 협실(夾室)3영(楹)이라.앞에서 보니 전 건물보다 약간 높고 크게 보였다. 아! 이제 부군(府君)의 시대는 약 500년이 지났다. 후손이 번성하고 고관훈작(高官勳爵)이 끊임없이 이어 지고역사에 혁혁히 빛나 내외의 파(派)는 거의 전국에 퍼져 살게 되었으니진실로 우리 선조의 깊이 쌓은 인덕이 아니었다면이 같은 후손의 여경(餘慶)이 있겠는가.무릇 4대가 넘으면 일년에 한 차례 묘제(墓祭)를 올리는 것이 예의이다. 그 해 제향(祭享)에 즈음하여 이른 아침과 깊은 밤의 풍우(風雨)에어찌 애연하고 숙연한 정이 없겠는가. 이 제사(齊舍)는 멀리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제각이나 제실의 새로 짓고 훼손되는 것을 보면 후손들의 흥쇄(興衰)를 알 수 있으니앞으로도 계속하여 우리 선조들을 위해 끊임없이 수리하고 단청하고 송백(松栢)을 심고 보호하여향기를 바칠지니라. 길이 효사(孝思)하여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면 남국(南國)의 인사(人士)로우리 제사(齊舍)를 지나는 자는 모두 모공(某公)은 후손이 있어 추원보본지성(追遠報本之誠)이 가(可)히 귀후(歸厚)하였다고 전할 것이다. 모든 우리 동조(同祖)의 후손들은 어찌 힘쓰지 아니하리요.


